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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에서 동양화 묵(墨)을 발견하다 |
한기창 화백의 과학과 미술의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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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창 화백 ⓒ | 최근 국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부산 해운대구 장산지하철역 인근에 ‘아르바자르(Arbazaar)', 즉 아트마켓이라는 뜻의 대형 미술 전시유통 공간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넓이 1천851㎡에 달하는 전시장 내부에는 김환기, 남관, 박수근 등 한국 근현대미술 1세대 작가들의 부스와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고미술품 부스와 함께 국내 작가 60명의 단체전 부스, 유망 작가들의 개인전 부스 등이 이어지고 있는데 국내 최초의 아트마켓에서 선정한 유망 작가 중 한기창 씨(41)가 포함돼 있다.
화가 한기창은 바늘 구멍처럼 성공하기 힘든 곳으로 알려진 국내 화단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 중의 한 명이다. 추계예술대학교 동양학과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그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97년 대한민국 청년미술제에서 수상하면서부터지만 오히려 7번의 개인전, 그룹 초청전을 통해 더 유명해졌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2003년 삼성 미술과 아트스펙트럼, 2004년 금호 미술과 15주년 기념전 등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대형 전시회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문화관광부에서 운영하는 창동 스튜디오의 제1기 입주작가로 활동하다 지난해에는 삼성 미술관이 운영하는 씨테아틀리에의 ‘올해 입주 작가’로 선정됐다.
지난 5월에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학고재 미술관에서 ‘혼성의 풍경’이란 주제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대형 전시회가 열리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도 대중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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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창 '혼성의 정원' 중에서 ⓒ | 한기창 씨의 대표작은 2004년 작품인 ‘뢴트겐의 정원’이다. 병원 치료 중 라이트 박스에 비친 엑스레이 필름에서 명암의 단계적 변화가 먹의 농담처럼 나타나는 데 주목해 한국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엑스선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1993년 유학을 앞두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오던 중 차량이 미끄러지면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온 몸에 철심을 박은 채 수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무려 1년 이상을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엑스 선 필름 안에 들어있는 먹의 농담을 발견했다.
한 화백은 이후 인간의 뼈가 찍혀 있는 엽기적인 필름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필름을 오려 생명을 상징하는 한 포기 화초 등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빛을 발하는 라이트박스 위에 붙여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예술 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탄생한 것이 '뢴트겐의 정원' 연작이다.
1895년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했다면 한 화백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엑스선을 통해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먹의 농담을 발견한 셈이다. 한 화백의 ‘뢴트겐의 정원’ 시리즈는 국내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 평론가는 피카소와 같은 새로운 그림을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 화백은 최근 사이언스타임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엑스선 필름을 통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두드러진 이미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때 보았던 느낌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두드러진’ 이미지였지만 자신의 작품에 100% 도입하는 것이 매우 두려워 엑스선 필름을 작품에 절반만 적용하면서 가능한 한 부드러운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애를 썼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최근의 한 화백 작품들은 초기 작품과는 달리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매우 다양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5월 학고재에서 열린 ‘혼성의 풍경’ 전에 나온 작품들은 필름을 길게 자르고 색을 칠해 뼈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 바탕 위에 컬러 시트로 도시와 행인의 모습을 만들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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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창 '혼성의 풍경' 중에서 ⓒ | 수술 부위 봉합에 쓰이는 의료용 스테이플을 목판 위에 찍어 전통 산수화를 재현한 팝아트적인 작품, 한 가지색 컬러 시트로 민화와 현대적 풍경을 섞어 만든 연작들도 있다. 목판에 아크릴로 동양화적인 풍경을 그린 '검은 풍경', 스테이플 작업을 영상으로 만든 '일필사의도' 등 장르도 다채롭다.
앞으로 엑스선 필름을 통해 어떤 새로운 작품이 나올지 화단은 물론 미술 애호가들의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만큼 한 화백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 화백은 교통사고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자신이 엑스선을 만난 데 대해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큰 관심을 주지 않았던 과학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이처럼 큰 영향을 줄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것.
더 나아가 “예술계도 과학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과 과학이 서로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면서 새로운 이미지와 장르를 개척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며 미술의 폭을 넓히는 일이 21세기 한국 화단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화백은 바쁜 일과 중에도 과학인들과의 모임, 행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대화에 힘쓰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으며, 엑스선 작품으로 의사에서 화가로 데뷔한 정태섭 화백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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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봉 편집위원 aacc4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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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Science Time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