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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간난과 고독 속에 얻은 학문공동체

제38호 (2007.3.28)


정 출 헌(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1801년 겨울,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 도착했다. 거기는 더 이상 발 내디딜 곳 없는 남도의 끝자락이었다. 다산은 그곳에서 18년이란 긴 세월을 보낸 뒤, 겨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간난의 기간 동안 다산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던가? 우리는 그가 그곳에서 남긴 방대한 저작의 규모를 기억해야만 한다.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래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저작 목록은, 척박한 유배지가 일궈낸 한 인간의 기념비적 분투임에 분명하다.


다산학단,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된 집체저술 조직


다산 자신도 그때 그곳에서의 생활을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책 쓰는 걸 낙으로 삼으며 지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담담한 어조에 깔린 그의 깊은 좌절과 고독을 읽어내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 우리는 그러한 혹독한 삶이 한 인간을 얼마나 경이로운 인간으로 거듭 나게 할 수 있는가를 보면서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지식인이라 행세하고 있는 지금/우리 같은 학인(學人)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주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지적 활동일 터다.


공(公)은 20년 가까이 고독하고 우울한 심경으로 지낼 때, 다산초당에서 연구저술에 마음을 기울였다. 여름의 무더위에도 쉬지 않고, 겨울밤엔 늘 새벽닭의 울음을 들었다. 제자 가운데 경전을 열람하고 역사서를 탐색하는 자가 두서너 명, 부르는 대로 나는 듯이 받아쓰는 자 두세 명, 손을 바꿔가며 원고를 정서하는 자가 두세 명, 옆에서 줄을 치거나 교정·대조하거나 책을 매는 작업을 하는 자가 서너 명이었다.


기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남긴 방대한 저작은 이처럼 고도로 숙련된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산은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된, 그런 집체저술(集體著述)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다산학단(茶山學團)’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산의 유배시절보다 조금 이른 시기, 최신 정보를 교환하고 번뜩이는 사유를 나눠같고 날카로운 논점을 가다듬던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 모임을 기억한다. ‘연암그룹’이라 명명되는 이들 모두는, 당대를 대표하는 일급 지식인들이었다. 다산도 이들의 모임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도 끝자락에 홀로 내쳐진 뒤, 그네들의 활달하고도 자유로운 지적 교류를 점점 더 아름다운 모임으로 깊이 간직했을 법하다. 급기야 다산 자신도 학인들의 학문공동체를 조직하고 싶었을 정도로.


단점조차 장점으로, 제자 길러내 학문적 동지로


하지만 강진이란 곳은 학인을 좀체 만나기 힘든 변방 가운데 변방이었다. 그럼에도 다산이 우리를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것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던 학인으로서의 자세다. 다산은 구석구석 제자를 찾아 길러내고, 그들을 자신의 학문적 동지로 하나하나 동참시켜 나갔던 것이다. 자신의 믿음직스런 제자 황상(黃裳)을 학문의 길로 권유하던 다산의 말이 가슴 뭉클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나는 산석(山石)[황상(黃裳)의 아명]에게 글을 닦도록 권했다. 그러자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로 막혀 있고, 셋째로 미욱합니다”하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공부하는 자에게 세 가지 병통이 있는데, 네게는 그게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소홀히 되며, 둘째 글짓기에 빠르면 그 폐단은 부실하게 되고, 셋째 이해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거칠게 된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들면 그 구멍이 넓어지며, 막혔다가 소통되면 그 흐름이 툭 트이며, 미욱한 것을 닦아내면 그 빛이 윤택하게 된다. 파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이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이다. 닦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이다. 그렇다면 부지런은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마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요즘에야 느끼게 된 것이지만, 암기 잘하고, 글 잘 쓰고, 이해력 빠른 게 학문하는 사람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세상물정에 어둡고, 앞뒤 꽉 막힌 학생이 훌륭한 학자로 크는 걸 종종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부지런히 파고, 부지런히 뚫고, 부지런히 닦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격려가 입에 발린 거짓이 아니건만, 그게 그리 쉽겠는가? 하지만 털끝만큼의 가능성이라도 허투로 보지 않고 제자로 키워내던 다산의 집요한 제자 교육, 그건 학문적 동지에 대한 갈망 혹은 학문적 외로움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다. 그리하여 단점조차 장점으로 뒤바꿔 놓는 참스승이 될 수 있었다.


정말 그러하다. 혹독한 간난과 고독, 그것은 한 인간을 발분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지적 연대의 소중함을 느끼게도 하고, 제자에게 지극 정성을 쏟는 자상한 선생으로 성장하게도 했다. 그게, 내가 요즘 밀양이란 궁벽한 곳에다가 ‘상처받은 40대 영혼들’이 함께 공부하고 함께 생활하는 연구공동체를 꾸려보겠다고 바삐 드나들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산 선생을 들먹이는 것은, 참으로 외람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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