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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음악을 잘 아는 왕, 정조(正祖)

제42호 (2007.4.25)

 조선왕조는 예악정치를 표방하였다. 예악(禮樂)의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화합을 위한 것이다. 예는 행실을 절도 있게 하고 악은 마음을 온화하게 한다. 절도는 행동을 절제하고, 온화함은 덕을 기른다. 이 둘은 적당한 수위를 지녀야 한다. 예가 지나치면 멀어지고, 악이 지나치면 방종에 흐르기 때문이다. 예악정치의 구현에서 이 두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 상보적 관계를 이룰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오례(五禮), 즉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로 규정되어 시행된 국가전례(國家典禮)의 여러 의례와 음악은 이러한 예와 악의 이념이 외부적으로 구현된 것이고,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각종 오례서(五禮書)에 기록되어 있다. 

예악정치, ‘예’는 질서를 ‘악’은 화합을

 
예와 악의 중요성은 조선의 역대 제왕이 모두 인지하였으나 그 실제는 ‘예’에 비해 ‘악’이 소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는 잘 갖추어졌어도 악은 미비하게 되어 예와 악이 균형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악이 미비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특히 전란을 치르고 난 후, 연주자와 악기가 구비되지 않아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음악 없이 제례(祭禮)가 행해졌던 적도 있었다. 또 악사들의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음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의례와 음악, 양자의 중요성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한 왕은 정조(正祖, 1752-1800)였다. 정조는 제사를 지낼 때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정조대의 어느 무렵,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올릴 때의 일이다. 정조는 제향을 올리면서 당상(堂上)에서 연주하는 등가(登歌)와 당하(堂下)에서 연주하는 헌가(軒架)악을 듣게 되었다. 음악을 유심히 들으니 절주를 잃은 곳이 많았다. 속도가 예년에 비해 지나치게 빨라져서 여유로움을 잃었다. 그런 음악을 듣고 정조는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것은 제사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예와 악이 조화를 이루어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언이다.

 
정조는 이미 동궁 시절부터 악학(樂學)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스승 가운데에는 서명응(1716-1787)이 있었다. 서명응은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난 인물로 사학, 경학, 역학, 천문, 지리, 악학 등 여러 분야에 학문이 깊었다. 정조의 악학은 스승 서명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명응은 방대한 분량의 악서(樂書)를 남긴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한 스승의 영향으로 정조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하였고, 특히 악학연구는 상당한 깊이를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음악 실력은 단순히 이론적인 데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음악을 듣는 능력도 뛰어났다.

 
정조가 친히 사직단에서 사직제(社稷祭)를 올릴 때의 일이었다. 제사를 위해 판위(版位)에 나아가 서자 당하(堂下)의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었다. 그런데 제례악을 가만히 들어 보니 어떤 부분이 이상하게 들렸다. 이에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 빨리 가서 알아보도록 했다. 음악 감독에 해당하는 전악(典樂)은 매우 긴장하여, “제 2성에서 당하의 왼쪽에 있는 특경이 두 박자를 빠뜨리고 연주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조의 귀가 이 정도이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 선율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정조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음악이 제대로 연주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제례를 올릴 때  연주되는 음악의 선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후의 여러 제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전악 이하 악생(樂生)과 악공(樂工)들의 자세가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예와 함께 악을 제대로 갖추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문화융성기를

 
정조는 매번 제례를 올릴 때마다 음악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지적하곤 하였다. 정조 자신이 음악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 정조대의 학자관료들에게는 조선의 어느 시기에 비해 악의 교육에 비중이 두어짐이 확인된다. 정조의 집권 초반,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鐘), 경(磬), 금(琴), 슬(瑟)을 특별히 규장각에 하사한 것도 악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또 장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특종(特鐘), 편종(編鐘)과 같은 악기를 규장각으로 옮겨 놓고 학사들로 하여금 그 제도를 상고하고 음률을 익히도록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악을 잘 아는 신하, 즉 지악지신(知樂之臣)의 양성을 위하여 시교(詩敎)와 악교(樂敎)를 강조하였고,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 교육에는 악학과 관련된 조문을 많이 내려 평소 악학을 꾸준히 연구하도록 강조하였다.

 
정조가 강조한 악을 아는 신하 양성의 목적은 ‘음악실기인’의 양성에 있다기보다 ‘음악입안자’ 양성에 있었다. 한 나라의 음악정책에 핵심적 역할을 해낼 인물, 즉 세종대의 박연, 맹사성과 같은 인물의 양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조에게 음악이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었으므로, 기교적으로 잘 훈련된 음악실기인보다는 악을 통해 덕이 갖추어진, 악을 아는 인물의 배출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악을 잘 아는 음악입안자가 배출된다면, 그를 통해 악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음악정책이 펼쳐짐은 물론,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인들이 배출되고, 이와 아울러 국가전례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제 궤도에 올라 좋은 풍속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와 함께 악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은 정조 시대를 문화융성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 시대의 예악(禮樂)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글쓴이 / 송지원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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