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직분의 기원
집사, 장로, 감독의 직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현 한국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목사, 감독의 직분은 일종의 ‘계급’처럼 이해 되는 경우가 많다. 집사에서 권사로, 권사에서 장로로 임직되는 것을 마치 ‘진급’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아는 어떤 권사 한사람은 여러 번 장로 선거에서 떨어지자, 장로보다 더 높은 계급(?)인 ‘목사‘직으로 ’특진‘하겠다고 하면서 어떤 이상한 야간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목사가 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교회 역사에서 어떤 기간 동안 교회 직분을 ‘계급’혹은 위계질서(hierarchy)로 정한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그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교단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는데, 성경정신이나 개신교 신학에서 볼 때, 교회 직분은 결코 ‘계급’이 아니며, ‘은사’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처음 시작한 사역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과연 ‘직분’제가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시대와 환경과 사회체제가 바뀌었다고 해도 , 그 ‘처음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초 예수의 공동체에서 12제자는 '직분'이었나?
기원 1세기 초반의 예수의 활동이나 그의 사역에 대하여는 신약성서 외에 다른 자료에서는 별로 찾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역사가 요세푸스, 타시투스(Tacitus), 플리니(Pliny)등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와 있을 뿐이다 (주.1) .
분명한 것은 예수는 '교회’를 창설하거나 어떤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다. 예수의 사역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순회전도자 혹은 혜성같이 나타난 예언자 같은 종류로 보였을 것이다.(마13:57,막8:28,마21:11, 눅24:19, 요4:19, 6:14, 7:40, 9:17)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하여,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세례 요한의 환생, 또는 선지자중 에 하나라고 사람들이생각하고 있다’라고 제자들은 대답을 한 것이다.(마16:13-14)
대부분 예언자들의 사역에서 보듯이, 예수에게도 그를 따르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을 ‘믿는 자들’이나 ‘제자’로 부르지 않고, 단순히 ‘무리’ (crowds)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그런 ‘무리’를 조직화 하거나 또는 그 속에 어떤 직분이나 리더쉽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12명의 제자들의 위치는, 예수의 최초 공동체에서는 , 직분 혹은 리더쉽의 자리는 아니었다. 최초에는 다만 예수의 ‘메시야’ 즉 이스라엘의 왕 됨을 기대하고 따라다녔던(마20:20-21, 행1:6 참조) 갈릴리 어부출신이나 세리 등 하층민이거나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저 ‘제자’들이었다.
예수가 떠난 후, 첫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후, 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어느 조직이나 모임이 생기면 그것을 이끌어가는 ‘리더쉽’의 자리가 필요하게 된다. 자연히 예수가 택하였고, 그에게서 훈련받은 ‘12제자’가 ‘사도’라는 명칭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행정적, 권위적 혹은 제왕적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때 ‘한번만’ 있었던 특수한 ‘사도’라는, ‘즉 보냄 받은 자’(apostolos)라는 ‘은사직’의 ‘직분자’들이었다.
최초로 시작된 직분 '일곱'(the Seven) 사역자.
시간이 지나면서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자 사도가 아닌 일반 신자들 중에서 최초의 ‘직분’제가 시작이 되었다. (행 6:1-6).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것인데(행 6:4)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자 교회 내에 자연히 교인 관리, 봉사하는 일 등 행정적인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구제하는 일로 히브리파 신자와 헬라파 교인들 사이에 어떤 갈등 혹은 불평 까지 생기게 되었다(주 2). 그래서 사도들은 신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듣는 사람’ (행 6:3)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을 도와 구제하는 일과 기타 봉사하는 일을 맡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 조직과 행정 및 직분제도의 원시적인 시작이었다. 한데 그때 사도들이 안수하여 세운 ‘일곱’이 과연 어떤 ‘직분’의 성격이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우선 그들은 최초의 ‘집사’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그들을 세운 목적이, 사도들을 도와, 교회의 구제하는 일을 돕도록 한 것을 유추해 볼 때 그들의 직무가 집사의 직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기자가 언급한 ‘음식 베푸는 일’ (행6:2)의 히랍어 표현, ‘식탁(table)을 섬긴다’에 나오는 단어, 헬라어는 diakonein(동사)인데, 이것의 명사형 diakonos는 ‘집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 어디에도 그들을 ‘집사’라고 표현한곳은 없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에 장로와 함께 ‘집사’의 직이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 ‘일곱’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은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기도 하고, 담대하게 말씀전하는 일을 행하였다.(행 6:8-7:60) 또 한사람은 ‘전도자 빌립’(Philip the Evangelist)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사마리아 등에서 전도하며 병도 고치고, 이방전도에 공헌했다.(행8:4-7) 그리고 세례도 베풀었다.(행8:36-39) 그 ‘일곱’을 최초의 장로들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행 11:30에서, 안디옥 교회가 ‘구제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냈다고 했는데, 그 ‘일곱’이 구제와 관련된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곱은 대부분 헬라파 유대인들로 보이는데, 예루살렘교회에 ‘헬라파’장로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대하여 교부 크리소스톰은 ‘그 일곱’은 최초의 집사이고 또 장로이다. 그러나 집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특별한 상황에서 요구된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던, 그리고 그때에만 존재했던, 선택된 사명자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집사직분의 시작이었건, 최초의 장로들이었건, 혹은 단순한 봉사자였건, 교회가 최초로, 성도들 가운데서, ‘직분자’들을 선택하고, 기도와 안수라는 형식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한데 교회가 최초로 세운 그 ‘일곱’, 교회역사에서 시작된 최초의 ‘직분’인 그들 역시 어떤 행정적인 혹은 ‘계급’적인 직책이 아니고, 다만 ‘섬기는 자’의 ‘은사 직’을 받은 사람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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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역사가 Tacitus: 110년경, 네로황제에 의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 고문 등을 기록하고 있다.
Babylonian Talmud: (Sanh.43a): 'Jeshu ha-Nostri' 에 대한 언급이 있 다. ‘그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길 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사람을 유월절 저녁에 매달았다.’
로마의 집정관, Pliny (61-113 ad.)는 크리스쳔 죄수들을 조사하면서, 과연 이 새로운 종파가 위험하고도 악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황제에게 그 당시 크리쳔들이 행하는 관례 등을 보고하는 글을 올렸었다.
(주.2.)
이것은 2천년간 교회 역사에 계속 있어왔던 갈등 및 분쟁의 최초 사건이다. 여기서 갈등의 원인은 단순한 ‘구제’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그룹내에서의 ‘파워(power)’문제였다. 아람어를 사용하며 예루살렘 지역에 뿌리를 가 진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행세를 했고, 헬라말을 사용하는 그룹을 무시하거나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가 ‘분파’의 원인이 될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 같이 다인종 사회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들 이 있을 때,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언어 때문에 오해와 분파가 생길수도 있 음를 보여주는 첫 케이스이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시작된 '장로'(πρεσβυτερο?) 직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형태의 조직과 직분제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사건 이후, 믿는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날마다 모이고, 떡을 떼면서,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고 전하고 있다.(행2:42-47) 따라서 그렇게 자라가고 있는 ‘모임체’를 이끌어갈 지도체계나 직분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처음에는 ‘12사도’들이 단독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사도들을 도와 일할 ‘일곱’명의 봉사자들이 선출 되었다. 하지만 그 ‘일곱’은 ‘임시적’인 직분이었지 항구적인 교회 직분으로 정착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에 그 ‘일곱’중에 하나인 빌립이 사마리아 등에서 활동한 것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후에 그 ‘일곱’직분은 흩어지거나 해산된 것으로 본다.
한데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항상 머물러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수께로부터 받은 천국복음 전파였으므로, 사도들은 항상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자연히 교회에 정착하여 교회를 다스릴 고정된 ‘직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당시 이스라엘 커뮤니티에 있었던 ‘장로’제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유대인들의 커뮤니티에는 ‘장로들의 회’가 있었다.
회당에서 장로들은 예배 인도자는 아니지만, 행정 및 재판과 체벌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는 의장인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70명의 장로들로 구성이 되었다. 그것은 모세의 ‘70인 장로’(민 11;16-25, 출24:1)전통에 그 유래가 있다. 물론 형태나 기능에서는 같지 않지만,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부 유대 커뮤니티의 제도를 따른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제가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또한 어떤 절차로 ‘장로’를 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 처음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히 그랬듯이, 교회에서도 연령과 신앙이 높고, 존경받는 ‘연장자’를 장로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유대사회에 흔히 있었던 제비뽑기나 무슨 선출 과정을 통해서 임직된 직분은 아니었던것 같다.
하지만, 사도행전 및 바울의 서신에서, 그것이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40(AD) 년대에 교회의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임무를 가진 ‘장로’직분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시작된것은 분명하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장로들에게 목회적 책임은 없었던 것 같다.
바울이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때(AD37-40경) 거기에는 ‘사도’들만 있었고 ‘장로’란 직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행9:26-30, 갈1:18-19). 그런데 그후 안디옥 교회가 구제금을 모금하여 보낼때, 바나바와 바울이 그 구제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11:29-30).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에도(행21:17) 거기에 야고보와 ‘장로’들이 등장하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의 조직 운영 체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서 하나를 사도행전 15장에서 찾을수 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신자들의 할례문제로 논쟁이 발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등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을 때, 거기 ‘사도와 장로’들이 있어서 그들의 영접을 받았다. 곧이어 ‘사도와 장로’들로 구성된 ‘교회 총회’가 공식적으로 모여, 토론 끝에 해결책을 결정했다.(행15:1-21).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에 있었던 ‘공의회’(Council)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그때 교회운영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사안이 생겼을때, 사도와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의론하며 결정을 하는 ‘협의체’ 혹은 ‘자문회의’ 같은 것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회의에서 야고보가 의장의 위치에 있었는데 물론 그도 ‘장로’였을 것이다. 그때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모교회로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지도아래, 다른 지방의 신생교회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우위적’ 위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행8:14, 11:22, 15:22등 참조)
이와같이 예루살렘교회에 시작된 ‘장로’직분은, 그 후에 나타나게 되는 바울의 이방교회에서의 ‘장로직분같은 목회자는 아니었다. 유대인 회당에서와 같이 교회 운영에 중요한 사항등을 협의하고 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데 사도행전은 ’일곱 사역자‘ 선출 과정은 자세히 기록하면서, ‘장로’에 대한 선출이나 역할, 기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또 ‘일곱’의 이름이나, 혹은 여러 사역자들의 이름들이 거론되면서도, 장로 직에 있던 사람의 이름은 전혀 없다. 이런점을 유추해 본다면, 예루살렘교회에서의 ‘장로’직은 어떤 행정적 ‘파워’를 가진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 아니고, 다만 그때 교회 안에 있던 '어르신‘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야고보와 관련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찾아볼 필요가 있다. 즉 야고보의 교회 내에서의 특별한 위치이다. 갈라디아서에 언급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기사가 누가의 기록(사도행전)어느 부분과 일치되는지는 논란이 많고, 또 서로 모순되는 부분들이 있지만, 바울 자신이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갈 1:20)라고 말한것처럼, 바울의 보고에 신빙성을 둔다면, 예루살렘교회에서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첫 번 방문때 바울은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고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갈1:18-19).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와 같은 반열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1)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14년후’(갈 2:1), 두 번째로 보이는 예루살렘
방문 보고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유명한자들’ 및 ‘교회의 기둥’으로, 야고보, 게바,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갈2:6-9). 특히 그 ‘기둥’명단 순서에서 야고보를 제일 첫 번째 자리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사도들은 때때로 순회전도차 외부로 나가는 일이 많므로, 야고보가 항상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교회를 지키는 실제적 예루살렘교회의 ’수장‘노릇을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야고보 당시에는 아직 ‘감독’이란 직분이 등장하지 않았고, 그래서 야고보는 ‘감독’이라 불린 적은 없지만, 그의 예루살렘교회에서의 ‘수위적’(primus inter pares)위치나 직무를 보면, 그는 그 당시, 하나의 예루살렘 지역 ‘주재감독’(Resident Bishop)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바울의 선교교회에서의 ‘장로’(πρεσβυτερο?) 직분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는(갈2:8) 바울은 열정적으로 각 지역에 다니며 교회들을 세워 나갔다. 자연히 그 공동체들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선 그가 세운 교회들을 위해, 각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행14:23)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누가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하면, 바울이 선교여행시 처음 장로들을 임명했는데, 과연 새로 시작한 지역의 개체교회내에 자도자적 위치에서 ‘사역’을 담당할만한 일꾼들이 있었겠느냐는 것 이다. 그래서 선교 현지에서 발탁하여 임명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에 있었던 장로들을 초청해 와서 임명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누가의 보고에서 회중이 함께 ‘금식과 기도하며’ 장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바울이 세운 지역, 개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서 신실한 사람들을 택하여 세운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의 임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때 바울의 교회에서 ‘장로’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신약에서 ‘장로’에 관련하여 언급된 내용들을 볼때, 바울의 선교교회에서는, 장로들이 새로 세워진 신앙 공동체를 이끌며 말씀 사역 등 일종의 ‘목회적 사역’을 한 것으로 본다.(행20:27-32, 딤전5:17-18, 딛1:5 등 참조)
한데 바울의 편지들에는, 목회서신(2)을 제외하고 10개 서신에서, ‘장로’(πρεσβυτερο?)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해서 그의 선교초기에는 바울이 각교회에 장로들을 정규적으로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누가의 제3차 바울 전도 여행 기록(AD 약 54-58년경)에 의하면 그때 이미 에베소에 여러명의 ‘장로’ 사역자들이 존재해 있었던 것을 보면(행20:17), 바울은 선교지마다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들을 세웠음이 확실하다.
바울의 서신에서 장로라는 직분명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10개 서신), ‘장로’직을 암시하는 내용들은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그의 편지들에서,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전16:16), 혹은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극진히 존경하라”(살전 5:12-13)고 말한 그 대상은 그때 교회를 지도하고 있던 ‘장로’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직분과 은사를 열거한 곳에서도 ‘관리하는 일’(administration, 고후12:28), ‘지도하는 일’(leadership, 롬12:8)의 은사는, 장로와 관련된 업무를 지칭한 것으로 볼수 있다.
바울의 대부분 편지에서 ‘장로’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초대교회가 조직이나 직분이 분명하게 정착되어 있지 않았고 ‘직제’보다 ‘은사’에 치중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처음 바울은 그가 세운 각 지역 교회에, 필요에 의해서, 유대 커뮤니티 전통인 ‘장로’라는 호칭으로 ‘지도자’들을 임명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용어가 이방교회의 지도자 호칭으로 적당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직명 사용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 교회에서는 ‘장로’대신에 다른 용어의 직분 명칭이, 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집사'(διακονο?)직의 기원
공식 직분 명으로 ‘집사’(διακονο?)직이 신약에 등장하는 것은(빌1:1을 제외하고) 목회서신에서다. ‘집사’의 히랍어 διακονο? 의 본래 의미는 종, 일꾼, 섬기는 자(servant), 조수, 협조자(helper)등이다. 신약 초기교회에서는 공식 직분으로 ‘집사’가 있지는 않았다. 하나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봉사자’들은, 비록 그들을 집사라고 부르지는 않았어도, 교회 역사상 최초의 ‘집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의 주요 임무가 사도들을 도와 ‘구제’하는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주.1)
바울의 선교교회에서도 처음에는 집사직분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교회 내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돕고 구제하는 일을 담당했던 ‘봉사자’들이 있었다. (주.2)
이 διακονο?가 ‘집사’ 직 용어와 관련되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로마서 16:1에서 바울이 뵈뵈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어진 ‘διακονο?’가 교회의 ‘집사’직분을 말하는 것일까? (주.3)
이 단어가 바울의 초기 교회에서 ‘직분’명으로 나타난 경우는 없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빌립보서 1:1절과 목회서신을 제외하고) 어디에도 직분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한데 바울은 자신을 ‘사역자’ 혹은 ‘일꾼’이라고 부를때 때때로 이 ‘διακονο?’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전 3:5, 고후3:6; 6:4, 11: 23, 골1:23,25, 엡3:7 등)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롬15:8, 갈 2:17)
아볼로(고전 3:5), 두기고(엡6:21), 에바브라(골1:7), 디모데(살전3:2, 딤전4:6) 그리고 심지어 사탄의 사자에게도(고후 11:15), 정부 관리를 지칭할 때도 이 단어를 썼다.(롬16:1) 따라서 바울이 뵈뵈를 교회의 ‘diakonos’라고 부른 것은 교회의 공식 직분으로 호칭했다기보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자’ 혹은 ‘일꾼’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빌1:1에 나타나는 ‘집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미 말한대로 빌립보서가 쓰여질 연대(약 53-4년경)에는 교회에 아직 '집사'라는 공식 직분이 있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연대에 쓰여진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에도 ‘감독과 집사’라는 직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왜 빌립보서에는 ‘집사’들이 ‘수신인’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빌립보서는 특별히 바울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성원을 한 교회이다.(빌4:15-18). 한데 그런 물질적 후원의 업무를 직접적으로 당당했던 ‘봉사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업무를 맡은 봉사자를 나중에 공식적 직분으로 ‘집사’라고 했으므로, 그 임무를 감당했던 봉사자들과 그것을 감독했던 장로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수신자’ 리스트에 특별히 ‘감독과 집사’를 추가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따라서 빌 1:1의 ‘집사’직 언급은, 후대에 쓰여졌다고 주장되는 목회서신과 비슷한 시기의 어떤 편집자에 의한 편집의 산물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목회서신에는 좀 발전된 교회 직분제가 나타난다. 장로와 함께 감독, 집사가 공식 직제명으로 등장된다.(딤전 3:8-13) 특히 집사를 선택할 때의 ‘자격’에 대한 상세한 언급을 한 후, ‘시험’을 통해서(딤전3:10) 자격자를 골라 임직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교회 직제가 제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빌1:1절에서처럼, ‘감독’ 직분 다음에 ‘집사’직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도 유의할 일이다. 이것은 후에 등장하게 되는 교회 위계제도(hierarchy)의 원시적 모형으로 볼수도 있다. 집사들은 ‘장로-감독’의 직무를 도와서, 혹은 그들의 지도 아래서 구제 등 교회 행정, 관리, 재정에 관계된 일을 맡아 봉사하는 업무를 담당했을 것이다.(주.4)
하지만, 이것을 가리켜, 신약교회 시대에 이미 교회 내에 상하 위계질서 같은 ‘계급’적인 직분제도가 있었다고 말할수는 없다. 신약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직자’제도나 ‘평신도’라는 개념은 없었다. 누구나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하였다. 따라서 장로직이나 집사직이 상하적 ‘계급’ 직책이 아니고, 교회 일을 서로 나누어서 수행하던 일종의 ‘업무분담’ 같은 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집사직을 받은 사람이 어느 일정 기간 지나서 장로가 되는 것 같은(마치 계급이 올라가는것 같은) 제도는 없었다.
신약교회 의 특정 직분들 - 은사(χαρισμα)적인 사역자들-
바울 서신에서 직분 혹은 사역에 관한 리스트가, 특히 성령의 은사와 연결하여, 언급된 부분이 세 곳에서 발견된다.(고전12:8-11, 롬12:6-8, 엡4:11-12) 우선 50년대 중반에 쓰여?을 것으로 보이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먼저 세가지 직분명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사도’와 ‘예언자’와 ‘교사’이다. 그것도 ‘첫째’, ‘둘째’, ‘세째’로 순서를 정했다.(고전12:28-30) 물론 그것이 꼭 어떤 위계질서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직분들의 ‘중요성’의 순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προφητη?)는 대체로 ‘사도’ 다음으로 나타난다. 에베소서의 사역자 리스트에서도 사도 다음이다.(엡4:11),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았고, 또 그 당시 아직 그가 방문해 보지 않아, 그 교회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을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의 은사 리스트에는 제일 먼저 언급 되어 있다.(롬12:6) 이와 같이 바울의 교회에서 ‘예언자’의 사역은 사도 다음으로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도 ‘예언자’로 불렸었다.(행 13:1).
바울의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 또 그 예언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특히 예언의 은사를 행하는 성도들이 많았던 고린도교회(행19:5-7) 성도들에게 바울이 권면한 교훈들을 보면, 예언은 예배시에 사용된 것 같으며(고전11:4-5, 14:28-31), 방언 같은 은사와는 달리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닌 ‘똑똑한 의식’으로 전달되었다.(고전 14:19) 그 내용은 영감에 찬 교훈, 훈계, 위로, 격려, 권면 및 때로는 ‘질책’등으로써, 결과적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내포돼 있었다.(고전 14:3-5, 12, 22-25, 26 참조)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더 중요한 은사로 말하기도 했다.(고전14:4-5, 19)
예언은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전12:26-31) 고린도교회의 예를 보면, 예배 참석자중 누구든지 ‘계시’를 받은 사람이 예언을 말했다.(고전 14:30)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거짓 예언’을 말하거나 성령의 은사를 남용 내지 오용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폐해가 이미 초대교회에서 있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분별’ 은사가 강조되기도 한 것이다.(고전 12:10, 롬12:2, 빌1:9-10, I요4:1) 사도들의 시대가 지난 후, ‘사도, 예언자, 교사’의 순위를 자랑했던 ‘예언자’는 점차 사라지게 되고,(주. 5) ‘예언’은 성서 내에 있는 예언으로 국한하게 되었다.(주.6)
세 번째 은사직분은 ‘교사’(διδασκαλο?)인데, 교사가 바울의 선교교회에서 어떤 성격의 직분이었는지를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교사’(선생)(διδασκαλο?)라고 하였으며(마23:8, 26:18, 요13:13 등) 항상 이 칭호로 불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칭호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자(롬12:7), ‘지혜와 지식의 말씀’(고전 12:8)으로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는 사역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교사들은 기독교 진리의 해설자, 교육자, 전달자, 양육자들이었다.
한데 바울의 편지에서 ‘교사’는 때때로 ‘예언자’와 결부되어 나오기도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예언자와 교사’로 불렸다.(행13:1등) 그것은 예언자나 교사가 다같이 당시 교회에서 사도와 함께 중요한 사역자임과 동시에 또한 다 같은 말씀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일것이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대체로 ‘순회’적 사역을 했으나 ‘교사’는 개체교회의 고정된 사역자들이었다.
‘교사와 ‘목사’가 함께 나오는 경우도 있다.(엡4:11) ‘목사’(ποιμην)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대부분 ‘목자’로 번역되지만, 사역과 관련해서는 에베소서에 단 한번 ‘목사’(pastor)' 나오는데, 어떤 직분이었는지는 역시 분명치 않다. 하지만 목사와 교사가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동일한 직분의 명칭으로 생각된다. ‘교사’는 순회하는 자가 아니고 개체교회에 정착해 있으면서 가르치고, 때로는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했을 것임으로 ‘목사’(pastpr)로 호칭되기도 했을 것이다. 바울 당시의 교회에서는 직분제도가 완전히 정착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사역의 업무구분이 확실하게 이루어져 있지도 않았던 때 임으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바울의 교회에서 당시 ‘목사’라는 직분이 따로 있었다는 어떤 근거도 신약이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베소서의 ‘은사’적 사역자 리스트에 ‘전도자(ευαγγελιστη?)가 있다. 그들은 그 이름 그대로 전도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도들도 전도자였다. 다른 점은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증언자들이고, ‘전도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전한 말씀을 받아서 전파한 제2차 증언자들이다. 신약에 ‘전도자’라는 호칭이 개인적 이름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두명 나오는데 그것은 빌립(행21:8) 과 디모데(딤후4:5)의 경우이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바울의 선교교회에 있었던 교회의‘직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한데 그것을 현대교회의 ‘직분’ 개념과 연결해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 내에는 ‘직분’이란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 공식적인 직제 구조가 조직화 되거나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다. 누구나 받은 ‘은사’대로 ‘사역’에 동참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직분의 명칭이나 성격도 분명치 않으며, 따라서 교회마다 비공식적인 명칭들이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수고하는 자들, 돕는 자들, 동반자들, 섬기는 자들, 사자들, 일꾼들 같은 명칭들이 각 교회에서 쓰여 지기도 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명 으로 보이는 칭호들이 나열되어 있으나(엡4:11), 다른 교회에서는 ‘전도자’나 ‘목사’같은 직분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명칭들이 꼭 제도화된 직분명이라기 보다 그때 활동하고 있던 성도들의 ‘사역’ 내용이나 ‘활동’의 성격 같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같은 데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지자와 교사’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행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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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6:2절의 ‘음식 베푸는 일’에서 사용된 히랍어 διακονειν τραπεζαι?는 ‘식탁에서 섬기는 것을 의미 한다.
2) 롬12:7의 은사 리스트에서 ‘섬기는 일’은 διακονια 이다. ‘구제하는 자’도 나온다. 고전 12:28절의 은사 리스트에는 ‘도와주는 것’(αντιλημφι?)이 있다. 모두 ‘집사’직분에 해당되는 말이다.
3) 롬 16:1의 ‘διακονο?'를, 한글 성경은 모두 ‘일꾼’으로 번역하고 있고 ‘집사’로 주를 달고 있다. 영어성경은 대체로 servant 로 번역하고, deacon 또는 deaconess 의 주를 달고 있으나, NRSV등은 deacon으로 번역하고 ‘minister'의 주를 달기도 했다.
4) 딤전3:9-10에, 집사의 자격으로,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을 것’, ’깨끗한 양심‘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들의 업무가 교회의 재정이나 구제 등 물질에 관계된 일을 수행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5)디디케(Didache)에 의하면(11:7) 2세기 중반까지도 예언자의 활동이 있었다.
6)디다케, 순교자 저스틴, 유세비우스 등은 모두 거짓 예언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몬타누스주의(2세기)가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전승과 다른, 새로운 예언적 통찰을 주장하자, 교회는 ‘예언’에 대해서, 성서에 있는 예언만 참된 예언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신약교회에서, '감독'(episkopos) 호칭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
‘감독’이란 직명은 바울의 선교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 왜 바울의 선교교회에서는,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은, 생소한 직명인 ‘감독’(episcopos, overseer)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는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바울은 그의 이방인 지역 선교 교회에 처음부터 양떼를 돌볼 책임자로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행14:23) 베드로전서에 보면 소아시아의 이방인교회들에 ‘목회’ 사역적 역할을 하는 ‘장로’들이 있었다.(벧전 5:1-5)
그런데 이 ‘장로’라는 호칭이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교회의 사역자로서의 직분명에 적합한 것이 될수 없음이 나타나게 되었을것이다. 몇가지 이유를 들수 있다. 우선 바울의 선교교회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유대인 중심이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점점 이방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혹은 처음부터 이방인 중심으로 시작된 회중도 있었다.(주1.),
해서 교회 지도자를 유대 회당적 용어인 ‘장로’ 라는 칭호로 쓰는것이 맞지않게 되었을것이다. 다음으로 장로라는 호칭은 유대 커뮤니티뿐 아니라 헬라, 이집트 문화권의 커뮤니티에서도 나이많은 어른을 ‘장로’라고 불렀다. 따라서 바울의 신생 이방인교회에서 신앙적 지도자를 단순히 ‘장로’로 호칭하는것도 좀 문제가 있었을것이다. 또한 바울의 신생교회에는 젊은 지도자들도 많이 나왔을것임으로, 흔히 장로는 나이많은 사람을 지칭한다고 볼때, 더 이상 바울의 교회에서 지도자를 ‘장로’로 호칭하는데는 문제가 있었을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중요한것은 장로의 직능이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는, ‘회당’의 장로제같은 것으로, ‘목회 사역적’ 직분이 아니었으나 ,바울의 이방 교회에서는 그 기능이 달라?기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직명 혹은 호칭 사용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그당시 통용되고 있던 용어인 ‘감독’이라는 호칭이다. 히랍어로 ‘감독’(επισκοπο?)은 ‘관리’, ‘감시, 감독’, ‘다스림’ ‘검사, 관찰, 조사’등의 뜻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히랍권에서는 지방 행정관 특히 새로운 식민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되는 정부 관리를 의미하는 칭호로 쓰였다. 로마에서는 어떤 도시의 특별한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 왕이 임명하는 ‘특별관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 때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집단의 감독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쿰란, 에세네 공동체에도 이와 비슷한 직능을 가진 고위직이 있있었다는것이 연구에서 발견되었다. (주.2.) 하지만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바울의 선교교회들은 모두 헬라-로마권 지역에 속해 있었으므로, 교회 지도자의 직명으로서,‘ 장로’라는 유대적 칭호보다, 히랍-로마권 용어인 ‘감독’이란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는것이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더 이해가 잘되고 적합한 명칭이었을것이다.
신약에서 교회 직분명과 관계되어 ‘επισκοπο?'(overseer, 감독자)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것은 사도행전에서다. 바울은 그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정 중에, 밀레도에서 만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들을 ‘감독’(επισκοπο?)으로 세워, 교회를 돌보게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행20:28) 물론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감독‘이란 용어는 그 당시 교회의 공식 ‘직명’으로 보기보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업무의 성격을 나타낸것이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등장한것을 보면 이미 55년경, 바울의 선교교회에서는 ’장로‘를 ’감독자‘란 칭호로 부르기 시작했다는것을 암시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신약에서 두 번째로 ’감독‘이란 직분 명칭이 등장하는것은 ’‘빌립보서’에서다(1:1). 바울의 서신들(목회서신은 제외하고)중에는 오직 이곳에만 이 용어가 수신인으로 사용되어 있는것은 이상하다. 빌립보서가 쓰여지던 시대(53년경)에는 교회에 ‘감독과 집사’라는 직제가 공식적으로 아직 없던 때이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의 공식 직분명이 아니고 그와같은 사역을 하고 있던 지도적 위치에 있던자들을 그렇게 부른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 편집자가 자기 시대 당시의 교회 직제를 반영한 편집의 산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런 용어 사용의 등장은 그 당시 바울의 선교교회에서 ‘장로’라는 직명이 ‘감독’이라는 칭호로 바뀌었음을 뜻하는것은 아닐것이다. 여전히 ’장로‘라는 직명이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감독’이라는 호칭이 함께 병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호칭 ‘병용’ 의 사유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설명되고 있다. Campenhousen은 이 직분명 병행 사용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나 목회서신의 저자가 ‘유대 크리스챤(’Judaeo-Christian' tradition) 전통’인 ‘장로’ 명칭과 ‘바울적 감독’('Pauline-episcopal' tradition) 호칭을 ‘융합’시켜 기록해놓은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3.)
이 주제에 대하여 Robert L. Williams는 그당시의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실제적인 상황을 제시하며 설명한다. 즉 그 당시 바울의 선교교회들은 모두 어떤 개인집에 있었던 ‘가정교회'(house church)였다. 자연히 그 집의 ’가장‘(head of the family)이 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지도하고 관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 ’가장‘되는 사람을 ’장로‘라고도 부르고, 또는 그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돌보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감독자‘(overseer)로 부르게 되엇다는것이다. (주.4)
고구엘과 제라미아스(Goguel and Jeremias)는, ‘장로’(presbyteros) 직명은 마게도니아 지역 교회에서 많이 사용되어졌으나, 감독(episkopos)용어 사용은 특히 아시아 지역 교회들이 선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목회서신’시대 교회의 '감독‘직분에 대한 이해
흔히 바울의 서신으로 알려저 있지만, 후대에 쓰여졌을것으로 추정되는 ‘목회서신’은, 물론 어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 서신이 쓰여지던 시대의 교회 직제를 이해하는데 약간 도움을 제공해 준다. 하나 그것은 또한 목회서신이 언제 쓰여졌는냐에 따라 그 관점이 달라질수 있다. 목회서신의 저작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고, 한마디로 결론내릴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그것은 본 논문의 주제와는 다른 문제임으로 여기서는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한두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근거해서 연대 추정을 해보는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우선 본문 내용에 바울적인 요소가 일부 있다고 해도, 문체, 용어, 신학사상, 교회 직제, 시대적 배경 등이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의 상황이나, 또한 여러 바울서신과 다르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썼다고 주장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도 후기의 초기 시대 교부들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간략하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목회서신이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활동했던,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익나시어스, 폴리갑 등에게 알려저 있었거나 일부분 인용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주.3)
특히 110년에서 17년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 익나시어스의 편지에 나타나있는(주.4) 당시 교회 직제 및 상황들은 목회 서신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익나시어스의 편지들에는, 목회서신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비교할수 없을만치 훨신 더 발전된 교회 조직이나 직제등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것에 비하면 목회서신에 나타나 있는 직제나 상황은 원시적이다. 익나시어스의 편지에는 이미 ‘카톨릭’ 교회라는 말이 나오고, 성직자의 위계질서(hierarchy)가 나타나 있으며, 군주적 감독제가 표현되어 있다.(주 4)
익나시어스가 그의 편지에서 언급했던 교회 직제나 제도가 그시대에 이미 정착된 제도가 아니고, 다만 익나시어스의 ‘감독권’ 확립을 위한 투쟁 및 주장이라는 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익나시어스 시대의 교회 제도나 상황은 분명히 목회서신 시대 것보다 훨신 발전되어 있는 후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서 목회서신은 바울이 순교한 때(65년경) 이후부터 익나시어스의 편지가 쓰여지던 때(110-17) 이전의 시기로 말할수 있다. 여러 가지 연구들과 정황들을 고려하면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 경(더 늦게 잡아도 2세기 중반 이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목회서신’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직제나 상황은 1세기 말경 시대 전후의 교회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것이라고 할수있다. 목회서신은 물론 사도시대보다는 발전된 직제 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성직의 3중’ 계급제도 같은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목회서신의 연대를 2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은 목회서신에 나오는
감독, 장로, 집사를 ‘3중 성직 목회 구조’로 설명하려고도 하고, 목회서신 시대에 이미 군주적 감독제도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주.5)
하지만 목회서신은 다만 그 직분들의 ‘자격’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고, 직분의 성격이나 직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어서, 그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찾아볼수는 없다.
그리고 감독의자격을 제시한후 집사의 자격을 얘기했다고 해서 감독과 집사 간의 종속 관계를 단정지을수도 없다. 만일 그 당시 ‘3중 목회 구조’가 정착되어 있었다면 딤전 3장에서 직분의 자격을 논할 때, 감독, 장로, 집사 순서로 되어야 하는데 장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딤전 3:1-13참조) 목회서신에서 ‘감독’이라는 단어가 정관사가 붙은 단수로 나타난다고 해서, 감독은 개교회에 장로들의 수장으로 1명만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목회서신 기자가 ‘감독’직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교회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딤전 5:17-18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을 함깨 말한것 등을 보면,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임을 나타내는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개체교회들(가정교회)의 초기에는 1명의 장로-감독이 있었을것이나, 교회가 성장하여 한 교회에 ‘장로-감독’이 여러명 있을때는, 말씀사역을 주로 하는자들도 있었고 또 ‘다스리는’(행정) 임무를 주로 하는자들이 나뉘어 있었던 같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수 있는것은 목회서신 시대에는 아직 ‘제왕적’ 1인 감독 제도 개념은 없었으며, 단순히 장로를 감독이라고 바꿔 불렀을것으로 추정된다.
목회서신이 그당시의 직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도, 사도들의 활동시대보다는 발전된, 어느정도 제도화가 된 교회 직분제가 정착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사도나 예언자 등은 나타나지 않으며, 그런 사도나 ‘순회 사역자’들에 의해 교회가 돌보아지는것이 아니라, ‘각 지방 개체교회에 정착되어 있는 개교회 사역자들의 목회와 리더쉽에 의해 교회들이 이끌어저 가는 시대가 된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교회 시대’에서는 교회 내에 ‘성직’, 과 ‘평신도’를 구별하는 ‘성직자’제도는 아직 없었다. ‘장로-감독’직분을 가진자들이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양떼들을 인도했으나, 그들도 여전히, 사도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성도’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선교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낼때, ‘장로나 감독’을 수신자로 한적은 한번도 없다. (빌립보서에 대한 설명은 이미 했다) 다만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익나시어스 시대 혹은 그 이후 시대부터 2세기 말경에 가서는 ‘집사’, ‘장로’, ‘감독’ 직이 교회 성직의 ‘3중 목회 구조(3 fold ministry)로 정착이 되었으며, 대표 ’감독‘ 1명이 한 지역 교회들의 수장이 되는 ’제왕적 감독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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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은 대체로 각도시에서 전도할 때 처음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찾았다.(행 13:5,,14,43; 14:1; 16:13; 17:1 등) 그러나 빌립보같은 도시는 유대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었고, 따라서 유대인 회당도 없었다. 더 나아가 유대인에 대해 반감을 들어 내 기도 했다(행16:20-21).
2) James K. Mathews, Set Apart to Serve, p.28
3)Campenhausen, Ecclesiastical authority, 77, 81, 107, 116.
Rudolf Bultma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Macmillan, New York, 1980, 2:102
4) Robert L. Williams, Bishop Lists Gorgias Press, 2005, P.48
주3) The Interpreters Bible ,vol XI p369
4)The Epistle of Ignatius to Smyrnaeans, Source from Ante-Nicene fathers, vol.1, Edited by Alexander Roberts, James Donaldson and A. Cleveland Coxe, Buffalo, NY: Christian Literature Publishing Co. 1885 (익나시어스의 서머 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도 있다.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감독의 승인받지 않고 하는 세례나 애찬식(agape)은 불법이다. 감독을 영화스럽게 하는자는 하나님에게서 영광을 받을것이다.” )
5)Donale G. Bloesch, The Church, Sacraments, worship, Ministry, Mission, (Inter Varsity Press, Downers Grove, Il, 2002) P.204
김택규 목사
감신대 졸, S.M.U.에서 고대예배 및 직제연구(M.Th)
Drew University(D. Min.)
미UMC목회
감신대 객원교수(전)
미주감신대 초빙교수(전)
미주 이민목회연구원장(현)
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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