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목사님들은 예수진리를 옳게 가르치십니까?
"나는 모태에서부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계셨던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 속에 아름답고 순결한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인하여 나는 진실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100% 확신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이 순종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죄와 세속을 거절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좁은 길을 걷게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불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전혀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신학대학에 등록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수십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보다도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놀라운 열심을 가지고 신학과의 모든 강의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시간이 얼마쯤 지나면서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교수님들이 신학대학원과 박사코스에서 학위를 받는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예리한 논리와 이론을 배우지만, 그들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순결한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서서히 신앙을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온 신학계를 범람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세속에 물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들의 어깨에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라는 학문적 명예가 둘리워졌을 때에는 그들의 마음 속에 더 이상 하나님의 사업과 진리에 대한 희생적 헌신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채 경건의 높은 모양만을 가지고 신학대학의 강단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오랜 교수 경험을 거치면서 그들의 논리는 숫돌에 간 칼날처럼 예리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강의를 듣는 '어린 양들은 교묘한 설득력과 노련한 경험 앞에 쉽사리 굴복하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순결한 신앙을 합리주의와 학문적 논리로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양'들'은 자신들의 학점에 대하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을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입니다. 교수 중에 어떤 분들은 성경이 100% 영감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갖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곤 합니다. 소위 '분석이나 비판'이라는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분명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은채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하는 강의는 학생들의 마음을 깊은 회의와 의심의 미로 가운데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그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걸어야할 순종과,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를 강조하여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영적 경험을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성경에 기록된 어떤 부분들은 과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며, 그들도 자신들의 스승들처럼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합리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더이상 100% 영감의 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희생, 순종, 극기'라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어색한 단어가 되고 맙니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나는 그러한 혼돈의 와중에서도 기만당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교수님들의 왜곡된 신앙을 정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숨어 있는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이후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거나 자유주의적인 가르침을 강의하면, 조심스럽고도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지적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첫번째 시도는 교수님에 의해서 젊잖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교수님은 자신의 가르치고 있는 높은 학문에 계속적인 도전을 받게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강의를 듣고 있던 다수의 학생들도 교수님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가 교수님처럼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수업 시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교수님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지혜로운 권면'을 하였습니다. '학생, 나는 그대가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그대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경험과 학식의 폭이 넓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 나는 교수님께 나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썼지만, 교수님은 노련하지 못한 나를 여유있게 제압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충성심을 넣어주셨던 어머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교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성경의 100% 영감성을 은근히 부인하며, 죄에 대한 승리의 불가능함을 은근히 조장하는 논리를 조심스럽게 펼쳤습니다 .
"다음 강의 시간부터 나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크게 의심스러울지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학급의 친구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들은 교수님의 강의를 여과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학기말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시험지에 진리에 대한 원칙들을 기술하였으나, 교수님은 나에게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위기와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목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개인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포부의 성취여부가 교수님의 손에 크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나는 한가지 중요한 현실을 보게 되었는데, 교수들은 가르치고 점수를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 후에 목사로서의 길을 열어주는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 어떤 도전이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목사직을 얻게 되면, 순결하고 인간의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강력하게 설교해야지'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번째 딜레마
"나는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고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서 내가 봉사하고 있던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세속과 자유주의 신앙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주어지는 설교 시간에 신자들에게 죄를 포기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죄와 세속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강력한 설교를 했으며, 이러한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준비되어 있다는 메세지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담임 목사님에 의해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어리석은 양'들 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내 설교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하더니, '당신은 매우 유망한 장래를 가지고 있소. 그러나 매우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내게 와서 당신의 설교가 너무 강하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분들은 당신의 설교가 교회의 평안과 안정을 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높이고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해야 된다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나는 또 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다시 결심하였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한 교회를 맡게 되면,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껏 외치리라!' 라고. 다음 설교 시간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설교 내용을 부드럽고 듣기 좋게 다듬어야만 했으며, 나중에 내 자신이 직접 교회를 맡게 될 때까지 곧바른 진리의 선포를 미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세번째 딜레마
"마침내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정식 목사로서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마음껏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악하고 거센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몇몇 영향력 있는 집사들과 장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목사의 설교가 너무 강해서 교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불만과 염려를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자들과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는 세속적인 자들이 불만 세력에 동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으며, 나이 많으신 보수적인 장로님들도 걱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몇 분이 하루는 목회실로 나를 찾아와서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성경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교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목사님의 설교 주제를 정하시는 일에 있어서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점잖게 권면해 주었습니다.
"그 즈음에 나는 좋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지만, 남편인 나의 장래를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안정적인 목회 생활에 방해가 되는 설교는 제발하지 마세요. 좀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내용으로 설교하세요. 교인들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설교는 그들의 마음을 오히려 완악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두가지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이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가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장미빛 목회 생활과 안정된 가정 생활에 대한 미련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나의 정직한 양심에 '좁은 길을 걸으라'라고 속삭이시는 성령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고, 다른 한 쪽에서는 '너도 다른 목사들처럼 하면 돼! 왜 너만 유별나고 특별한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려고 하니? 조금만 지혜롭게 처신하면 너도 큰 교회의 인기있는 목사가 될 수 있어!'라는 사단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결국 내가 목회를 중단하게 되면 나에게 맡겨져 있는 이 사랑하는 영혼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결국, 목회를 중단하게 되면 이들에 대한 영적인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으므로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해야겠다고 생각함으로써 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타협의 길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장로님들이 나의 기별에 동의하고, 아내가 나의 부담을 이해하고, 교인들이 나의 설교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곧바로 설교하는 일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번 진리를 타협하게 되었으며, 양심 속에서 부르짖는 죄책감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타협의 과정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진리에 대한 사랑과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겠다는 순결한 포부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나 역시 '성공적인 목회는 교인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 역시 그들처럼 정치적인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하나님의 진실한 종으로부터 사단의 효과적인 종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진리를 타협하는 목회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점점 인기와 평판을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돈과 명예를 은근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교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두려워하게 되었고,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고용된 삯꾼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담임하고 있던 교회 속에 유행과 세속과 이기심과 탐욕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하였고, 죄와 세속을 지적하거나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교인들이 세속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될 것이야'라고 막연하게 기대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고 기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다른 목사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고, 내 아래에 젊은 전도사들을 몇 명 거느리는 '사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전도사가 가끔씩 나의 목회 지침과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도전할 때마다, 과거에 내가 들었었던 '노련하고 지혜있는 말'로 충고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이렇게 큰 교회를 맡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전도사는 석연찮은 얼굴을 하면서 나의 충고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도전하였지만, 나는 약간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노련하게 그들이 도전을 잠재웠습니다. 그러한 전도사를 볼 때마다, 나는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나의 '단순함과 미숙함"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회한의 눈물
"무엇보다도 슬픈 사실은, 이러한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많은 내 동료 목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형편을 종종 보았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죄를 합리화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나는 설교를 곧바르게 하지 않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영적 어두움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수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목회를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분의 요구에 위배되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첫번째 초림하시는 길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침례 요한이 일어나서 곧바른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두번째 재림하실 때에도 그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예리하고 곧바른 기별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곧바른 설교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압력이 두려워서 설교 내용을 듣기 좋고 반대를 받지 않을만한 내용으로 다듬었던 것입니다.
"이제 은퇴를 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길을 덮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뇌로 인하여 내 영혼에는 쉼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의 목회를 통하여 죽어간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고통당합니다. 젊은 시절에 있었던 나의 굴복과 타협에 대한 깊은 회한이 나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회는 성공적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했었던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나의 얼굴에 깊은 근심의 줄을 긋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그가 주문하는 대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치욕적 과거를 되돌아 볼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다시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 이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만일 나에게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는 젊음이 주어진다면, 하늘로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서 하는 것과 같은 설교를 할텐데 라는 후회가 내 영혼을 엄습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는 진리를 전하며, 교회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온전히 굴복시키는 기별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내 마음을 전율시키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성결과 거룩함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후배 목사들이시여, 마지막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온 생애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헌신이 선제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자신의 생애와 가정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정직한 양심과 순결한 진리를 가지고 영혼들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목사들만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가장 높으신 부르심에 올바로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들만이 '내가 다시 목사가 될 수 있다면....' 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의 고백)
목사도 틀릴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갈라디아 2장에 나타난 한 장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바울)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는(바울)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갈 2:11~14.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개종시켰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는 위선적인 면을 나타냈다.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복음과 위배되는 베드로의 위선을 목격한 바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갈라디아 2장에 전개되어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앞에서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견책하였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베드로의 수치스런 위선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안디옥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사도였다. 그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분의 설교와 기적을 직접 듣고 보았고,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는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첫 설교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씨앗을 제일 먼저 뿌린 사도였다.
그토록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수치스러운 잘못을 범했다. 지금 나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 하에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화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언제든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쓰러질 수 있으며, 또한 곁 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영생을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빼어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은 썩어질 육체 안에 거하는 한 하나님의 손을 놓는 순간에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높은 성직과 안수
높은 성직과 권위있는 직책이 사람을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모든 교리적 잘못과 도덕적 연약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게 보장해 주는가? 결코 아니다. 비록 그가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감독이나, 사제나 목사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안수 기름을 바르고, 경건한 대주교의 손을 통하여 안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를 잘못된 교리와 배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모태로부터 신앙을 받은 사람, 교회에는 정기적으로 나가지만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사람, 친구나 가족이 나가는 교회를 별다른 생각없이 따라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정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시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하심을 안전하게 따라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말며,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교리를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여 진리를 발견하도록 애쓰며, 이것이 정로이며 진리의 길인가를 항상 숙고하라. 이것이 하늘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의 예증들
안디옥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잘못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예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는가? 그 믿음의 용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에 아내 사라의 권고를 따라서 젊은 후처를 얻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홍해의 기적,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직접 먹었던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춤을 추도록 방조했던 역사를 기억하는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여 이방 신전을 짓도록 허락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유다의 선한 왕인 아사 왕이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그 당시의 의사에게 찾아간 일을 기억하는가? 선한 왕인 여호사밧이 악한 아합을 돕기 위하여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를 구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왜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이 범했던 이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하여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진리를 ....
종교 개혁자들의 잘못
교회와 수도원이 정치의 권력과 부에 이끌려 부패되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이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어났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잘못이나 실수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없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고집스럽게 성체 공존론을 주장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루터의 동료 개혁자인 멜란톤에 의하여 루터 교회가 몇몇 잘못된 교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요한 칼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장로교회를 어처구니 없는 예정론으로 이끌고 말았으며, 크래머는 자신의 첫 신앙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한동안 물러가는 모습을 보였다. 제월은 죽음에 대한 잘못된 교리에 빠져서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주장을 답습하게 되었으며, 후퍼는 예식 때에 입는 예복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공회에 해를 입혔다. 후기의 청교도들은 지옥과 무저갱의 고통을 부인하였고, 요한 웨슬리와 탑레디는 치열한 교리 공방전으로 인하여 수치와 상처를 받았으며, 어빙은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빠짐으로서 미혹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지난 역사와 사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입을 모아서 "성직자도 틀릴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인간을 의지하는 정신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사람도 우리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에 "우리 주교님(목사님)께 물어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말라. 여러분이 어떤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말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직자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말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스런 목자이시며,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고, 대주교 중의 주교이며, 교황보다 높으신 분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의지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정보다 주교나 사제의 인정을 더 필요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깊이 회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존경하는 성직자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조를 맡겨 버리는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보다는 어떤 목사, 어떤 사제, 어떤 주교, 또는 어떤 신학 박사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진리는 어떤 교단이나 학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진리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 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직자를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것이 최상의 안전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양같아서 하나가 움직이면 나머지도 모두 따라간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서두에서 언급한 갈라디아 2장의 안디옥 사건도 바로 이러한 잘못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 이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기독교회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유대 교회의 관습과 의식에서 한동안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이 신약 성경에 여러 곳 나와 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베드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만들었다. "그(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평신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사도가 잘못을 범할 리가 없어. 그를 따르는 한, 결코 잘못에 빠질 수 없을거야!"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나 주교나 목사직에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이해가 초대 기독교회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였다. 바울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 안에 유대 교회의 전통이 들어 옴으로써 복음의 빛이 퇴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의 의견과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가 쓰러지면 그 밑에 있는 교회 전체가 쓰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바울은 노장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써, 진리를 올바로 세울 수 있었다.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초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다. 1세기 이후, 세월이 흘러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게 되었고, 교회는 많은 신도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언제부터 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교님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주교나 사제나 목사나 장로가 도데체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목자일지라도 단지 사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였다. "아볼로는 누구이며, 바울은 누구이냐?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5.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아이러니칼하게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며서 자기 마음에 맞는 신조로 만들었던 장본인은 성직자들이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큰 오류는 모두 성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무질서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던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성직자였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성직자였으며, 이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아리우스도 성직자였다.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몄던 사람도 성직자 이지만, 어두운 교회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났을 때, 가장 앞에 나서서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성직자들이었다.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을 때, 어떤 성직자가 그의 편에서 섰었는가? 그의 곁에는 농민들과 소수의 귀족이 있었을 뿐이다. 진리를 전하는 것도 성직자이지만, 진리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성직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안수를 받았다는 인준서가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으로만 진리는 확증된다. 성직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누가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가에 따라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베드로도 놀라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였고, 그의 기도를 통하여 죽었던 도루가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진리는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확증될 수 있다.
맺는 말중세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종들을 무조건 신뢰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의 상을 교회 안에 세워 놓고 우상시 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던 스코터스, 피터 롬바드와 같은 신학자들을 거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성인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서두에 붙혔다. "틀릴 수 없는, 거룩한(Rev.),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등등. 나는 두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로버트 멕킨의 "회고록과 설교집"과 같은 책이 오리겐이나 사이프리안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저술한 어떤 책보다도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알지 못했으며, 희랍어나 라틴어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 저술한 "천로역정"은 지금도 온 세상 사람에게 놀라운 진리의 빛을 전하고 있다.
옥스포드 신학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학위나 숫자나 어떤 교단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도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쫓겨나지 않았는가!그대들이 존경하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사람일수 있으며, 모든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서 진리 위에 올바로 서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또 하나의 교황으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자리에 성직자의 교리를 올려 놓지 말라. 그대가 존경하는 성직자는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추측하지 말라. 성직자가 오류에 빠질 경우에 그대가 따라서 치루게 될 댓가를 생각해 보라. 성직자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직자에 온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들이 틀리고 깨어질 때에 함께 쓰러지지만, 자신의 신앙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그리스도인은 타고 있던 배가 흔들리거나 파손된다고 해도 반석 위에 굳게 서있을 수 있다. 부디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인 성직자를 존경하기 바란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뢰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 위에 두어야 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0.
출처 : cafe.daum.net/idid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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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윗글 참 감명받습니다.
어쩜 그렇게 시원한 답을 해주시는지 제가 약식으로라도 드릴 말을 자세하게 믿음의 체험과함께 간증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저렇게 돌아온 목사님을 이 글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
목사님,모든 목사님, 제발 이 글을 읽고 돌아오시기를 권면합니다.
영혼이 메말라 갈급한 심령들을 시원하게 적셔주기를 기원합니다.
절대 진리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고 눈물로 먹으며 다짐합시다.
많은 양들을 맡겼으면 생명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소돔성에간 그 자 처럼 세상으로 가다가 불과 유황의 못에 빠지지 말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교인 수가 다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진리를 외치십시오,
이렇게 되시길 하나님께서 원하실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소중히 여기십시오,
언젠가 저는 지방에 목사님이 예배때마다 기도하며 울고 찬송하며 울고 설교하다가 우는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같이 많이 울었습니다. 비록 지하 20평 규모의 교회이고 성도가 열몇명 있는 교회이지만 전 그렇게 감동스런 살아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많았슴 좋겠습니다. 이곳 서울에도 그 비슷 한교회가 있습니다.그러한 교회로 모두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daum.net/question/38972159?q
댓글 2.
개인의 간증이자 모두에게 던진 화두로 생각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의 잘못' 이란 글은 신학적 논란이 있는 부분인데
개인적인 비판이 공통 인식인 것처럼 단정하는 오류가 보입니다
biblenara.org/jboard/?p=detail&code=idbsi3&id=2203&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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