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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공병호 칼럼

타자의 눈에 비친 한국

탁석산 선생의 글은 직설적입니다.
이따금 졸음에 겨운 사람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통념과 다른 이설(異說)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눈에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이방인들의 기록물을
상큼하지 않은 기분으로 읽도록 만드는 책이
(탁석산의 한국인의 정체성 2)입니다.

1. 한국 민족에게는 그 해로운 결과를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는
   극복될 수 없는 나쁜 기질이 있다.
분열, 아첨, 과도한 이기주의, 강력한 지역 대립, 반대파에 대한
아량 부족 등이 그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결점들을
제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W. R. 랭던(미 군정 사령관 정치고문)의 글(1945)

2. 한국의 모든 정파들은 예외 없이 영원한 비밀스러운 음모, 뇌물,
   그리고 인민의 열정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대신들은 일 년에 수차례에 걸쳐 교체되며,
간혹 한 달 안에 여러 차례 경질되기도 합니다.
-파블로프(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의 한국 상황에 관한 단신(1899)


3. 이곳(러시아 끄라스노예와 노보끼에프 사이의 촌)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영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

4. 노비는 심한 노역을 해야 하고 부당한 대우에도 주인을 고소할
    권리가 없다. 주인은 노비를 판매하며, 노비는 자유의 희망이 없다.
이 제도는 인간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동물보다 조금 나은
노비에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다.
가장 지식인이라고 존경받는 이들도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플랑시(1853~1922, 프랑스 공사)의 글

5. 17세기에 조선에 김수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괴팍하고 망령스러운 사람이었다는데, 세도가인 송시열을
자극하기 위해서 당시의 청의 연호인 ‘강희’를 중국의 연호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합니다.
당시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은 지배하게 된
명청 교체기였는데, 송시열은 반청을 주장하면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6. 1628~1644년에 쓰인 숭정이라는 명의 마지막 연호가 조선에서는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연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청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비공식적으로는 명의 마지막
연호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조선이 겪었던 정체성의 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일 겁니다.

8. 고려가 중국을 본받았다고 하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궐 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려의 대궐 문 역시 중국의 예를 따른 것이나, 무턱대로 모방한 탓에
재료가 부실하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투박하고 조악합니다.
하지만 솜씨를 다한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송나라 사신들이 머무는 관사였습니다.
고려인은 평소에도 공손하고 온순했고 송나라 조정도 고려를 대할 때
체통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가 세운 관사는 왕의 거처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그것을 가상히 여겼습니다.
역시 고려는 다른 오랑캐들과는 달랐던 겁니다.

9. 송나라 황제는 새로 세운 나라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청을 받고
    이 나라를 옛 이름을 쫓아 조선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야 고려든 조선이든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겠지요.


10. 명이 이성계의 아버지 이인임이라는 잘못된 내용을 기록에 남겼고
     이에 조선이 그것을 틀렸음을 줄기차게 말했는데도 명이 이를 시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조선은 여러 차례 명나라에 개정을 요구합니다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만력 16년(1588)이었습니다.
무려 200년을 끌었던 것이지요. 조선의
주청사인 유홍이라는 자가 이해에 수정된 내용이 담긴 (대명회전)을
하사받아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11.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조선으로서는 왕의 핏줄에 관한 일인 만큼 반드시 이 문제를
시정해야만 했을 겁니다. 끈질기게 정정을 요구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로는 급할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요.
외국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외국 왕의 이름이나 족보다 명나라에 무슨 큰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출처: 탁석산,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 2: 타자의 눈으로 본 우리의
정체성), 책세상, 2016.

*** 의견: 한족을 대등하게 대할 수 있었던 시기가 불과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뜻과 힘을 모아서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