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7. 7. 10
주지 명진 스님의 개회 법문. 지난 토요일(7일) 강남 봉은사 보우당은 한국불교학회의 학술토론 현장을 목도하려는 불자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논문 발표는 정예로운 젊은 학자 5명이 했고 총론 발표와 사회를 내가 맡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3시간 동안 유지되었고, 수백 명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경청했다. 대한민국의 종교문화도 이 정도 되면 세계 지성사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그 구도적 자세의 진지함은 은산철벽도 뚫어버릴 준열한 기세였다. 불교는 본시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에도 자력(自力)이 있고 타력(他力)이 있지만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력을 본위로 삼는다. 그런데 토론의 주제로서 '믿음(saddh?, sraddh?)'을 끌어들인 것은 색다른 시도였다. 경북대의 임승택 교수는 초기 경전 '니까야'에 나타나는 용례를 들어 믿음이란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연세대 신규탁 교수는 대승원교(大乘圓敎)로서의 화엄불교가 말하는 진심(眞心).일심(一心)을 상세히 설파하고 인간의 본성은 본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전문대의 이덕진 교수는 간화선(看話禪)의 중요성을 상술하면서 간화의 핵심은 신심(信心)이요, 분심(憤心)이요, 의심(疑心)이라 말했다. 의심이 끊임없이 일어나 의단(疑團.의심덩어리)이 형성되어야 비로소 확철대오의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 같은 '돌대가리'가 깨닫는 데는 유리하겠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는데 부처를 죽이고 나면 곧 내가 부처라니 그 부처는 또 웬 말이냐?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야 할까? 예끼! 큰일날 소리를 하는구먼. 나는 말했다. 문제는 내가 몸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는 데 있는 것 같소.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큰 환난이 있는 까닭은 오직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몸이 없는 데 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뇨?(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예수의 법신(法身)이나 싯다르타의 법신이나 진리의 몸으로 보면 같소이다. 뭔 얘긴지 궁금컬랑 매주 일요일 중앙SUNDAY에 절찬인기리 연재되고 있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를 구경하시구료. 보우당의 청중은 희색이 만면했다. 환희봉행(歡喜奉行). |
2007.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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