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없다, 소이치로를 버려라 | ||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제조업신화(12) | ||
![]() 얼마 후 나온 개발안은 세부적으로 달랐지만 기본적인 컨셉은 같았다. ‘누구나 처음 차를 살 때 선택할 수 있는 엔트리 카로 가볍고 컴팩트한 느낌을 줘야 한다. 또 잘 달려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두 팀의 개발진척도를 비교해 보다 우수한 팀으로 흡수했다. 시빅의 성공으로 이 같은 개발 방식은 1970년대 이후 혼다의 기본 개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방식의 전환은 소이치로라는 천재에 의존했던 기존 시스템을 부정한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에 의존하지 않고, 팀 전원이 기술개발에 참여한 것이다. 혼다가 대기업으로 거대화하면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사장이 도면을 들고 엔진 실린더 길이나 위치 하나하나를 참견해서는 대기업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사원 수십 명 정도의 작은 회사라면 가능하지만 70년대 초반 혼다는 종업원만 1만7천명이 넘었다. 소이치로의 항복, 공랭식 엔진 경영위기를 넘긴 혼다는 1971년 안정을 찾았다. 획기적인 저공해 CVCC 엔진이 세계 처음으로 미국의 배기가스 규제법안인 머스키법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혼다는 그 기술을 다른 자동차업체에 공개하는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했다. 경영 위기로 실추됐던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는 좋은 기회였다. 고객들 사이에서 ‘역시 혼다 기술은 대단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대단한 기술을 공개한 것 역시 환경을 배려하는 기업 이미지로 이어졌다. 혼다 성공의 초석이 된 수랭식 CVCC 엔진 개발 뒤에는 기술자 소이치로가 은퇴를 결심하는 중대한 ‘항복’이 있었다.
‘공랭식 이외에는 엔진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세계 어떤 자동차 업체도 다루고 있지 않다’라는 점과 ‘개발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이치로는 더 고집을 피웠다. 장애물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의 투지는 더 강해졌다. 사내 누구도 그를 거역하지 못했다. 문제는 공랭식 엔진 개발을 부여받은 소이치로의 제자들이었다. 공랭식 엔진은 어떻게 해도 배기가스 규제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공랭식을 계속하다가는 회사가 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배기가스 규제에 맞는 엔진이 성공하지 못하면 망할 수도 있었다. 답은 수랭식 엔진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고한 소이치로는 수랭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를 걱정하는 기술자들이 몰래 수랭식 엔진 개발에 착수했지만 숨어서 하는 것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새로운 엔진 개발에는 보통 4,5년이 걸린다. 더구나 이제까지 다룬 적이 없었던 수랭식 엔진을 3년 만에 개발해 시장에 내놓으려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점점 수랭식은 연구소 전원의 의사로 굳혀졌다. 연구소에는 소이치로 충성파도 상당수라 의견이 갈리는 소동이 뒤따랐지만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로 정리되고 만 것이다. 1969년 8월 당시 스기우라 히데오(杉浦英男) 연구소장이 소이치로를 만났다. “어떻게 해도 공랭식으로는 미국의 배기가스 규제를 맞출 수 없습니다. 수랭식을 하게 해주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쯤 있다가 소이치로가 불쑥 말을 뱉었다. “너희들이 이겼다.”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독재자’가 한 사람의 범인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 노령의 기술자가 은퇴를 결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이치로는 이제 자신의 방식으로는 젊은 연구원들의 머리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새로 개발된 컴퓨터를 전혀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이제 혼다기술연구소는 소이치로를 넘어섰다. 남은 목표는 머스키법을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2년 CVCC 엔진이 개발됐다. 세계서 처음으로 성공한 저공해 엔진이었다. 소이치로의 가르침 소이치로는 “공해 방지와 관련한 신기술은 모두 공개한다.” 라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혼다는 2000년 연료전지차량의 사양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린다. “배기가스 규제는 자동차 업체가 맡아야 할 사회적 책임이므로 이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의무다.” 1972년에 공개한 CVCC 엔진 기술 역시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엄격했던 배기가스 규제치인 ‘미국 머스키법’은 어떤 업체도 달성하기 어려웠다. CVCC는 엔진에 부연소실을 만들고, 최적의 연소를 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컨트롤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기존 엔진에서 실린더의 헤드 윗부분을 교환하기만 하면 가능해 어떤 엔진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230건의 특허를 낸 그 엔진은 도요타에 기술 제공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 후 포드, 크라이슬러, 이스츠 등 다른 업체에도 기술을 제공했다(GM에는 아예 엔진을 공급한다는 소리도 나왔지만 혼다에 추가로 엔진을 더 만들 여력이 없어 실현되지는 못했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획기적인 기술을 공개한 것은 바로 혼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공해대책 기술을 공개하는 것이 자동차 업체로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소이치로의 유산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도전 정신. 철저히 독창적인 것을 만든다. 단념하지 않는다. 높은 뜻(꿈)을 갖는다.” 물론 이 세 가지 정신의 밑바탕에서는 환경을 위한 기술 공개와 같은 ‘정도(정도)를 가는 정신’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계속) | ||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 ||
2007.07.18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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