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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도요타, 어제의 빅브라더에서 오늘의 라이벌로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13)

 

혼다는 1980년대 말 주요 공장이 있는 미에(三重) 현 스즈카(鈴鹿) 시로부터 호의적인 제안을 받았다. 스즈카 시에는 혼다 최대 규모의 공장과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인 포뮬러1(F1)을 위한 레이싱 경기장이 자리 잡고 있다.

스즈카 시는 혼다가 일자리를 제공해주는데 감사하고 이참에 혼다의 기반 도시로 자리매김 하고자 시 이름을 혼다(本田)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도요타(豊田) 시의 경우가 그랬다. 시의 원래 이름은 코로모였지만 1959년에 도요타로 개명했다. 도요타 시에는 도요타 본사와 11개의 공장이 있다. 혼다는 여러모로 솔깃했지만 거절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기술과 창조를 강조하는 혼다정신(혼다이즘)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전체 자동차 생산 대수의 70퍼센트 이상을 해외에서 팔고 있는데 특정 도시의 이름을 혼다로 쓸 경우 글로벌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점과 지나치게 일본 본사가 강조될 수 있다는 점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대가 다르긴 했지만 도요타와는 정반대의 결정을 한 셈이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혼다 본사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옮겨 갈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워낙 미국의 비중이 큰 데다 연구소·생산 공장이 대부분 미국에 몰려 있어 이 같은 소문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옮겨가는 것도 미국만을 한정지어 ‘도전과 창조’라는 혼다이즘에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어 소문으로 끝났다.

도요타여, 카피는 이제 그만

▲ 혼다는 스즈카 시가 혼다(本田)로 바꿔주겠다는 제안을 기술과 창조를 강조하는 혼다정신(혼다이즘)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
“도요타는 이제 ‘빅 브라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작은 자동차 회사의 디자인을 카피할 때가 아닙니다.”

2003년 5월 혼다의 요시노 히로유키(吉野浩行) 사장(1998.6~2003.6)을 만났을 때 들은 얘기다. 혼다가 자랑하는 모테기 트윈링 레이싱 서킷에서다. 모테기 서킷은 도쿄에서 동북쪽에 있다. 신칸센으로 약 한 시간 정도 달린 뒤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시골 같은 분위기 속에 아름다운 호텔과 자동차 전용 트랙이 나타난다.

필자는 혼다 본사의 초청으로 ‘모터사이클 레이스’ 강습에 참가했다. 당시 니케이, 아사히, NHK 등 일본 유수의 미디어를 비롯해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자동차 담당 특파원과 함께한 자리였다. 미국 유명 언론의 경우 일본 특파원 가운데 자동차 담당을 따로 둔다. 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 데다 일본이 세계 2위의 자동차 강국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의 한 특파원은 “일본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비교해보면 이미 일본이 앞서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우위 요소로 품질과 코스트, 경영진의 능력을 꼽았다.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소위 3강의 약진 때문이다. 2003년 미국 시장에서 일본차의 점유율은 40퍼센트에 육박했다. 역대 최고치다. 미국 빅3 판매량에 근접한 수치다.

요시노 사장과는 5, 6명의 특파원들과 함께 약 40여 분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 시장, 환경 문제 등 주로 세계 자동차 산업의 전망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결국 도요타와 혼다의 라이벌 관계가 화제가 됐다. 한 특파원이 “도요타가 2003년 초 내놓은 7인승 미니밴 위시를 보면 혼다의 미니 밴 스트림을 카피한 것 같은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요시노 사장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도요타의 빅 브라더 이론’과 ‘중국의 카피 문제’로 대신했다. 당시 요시노 사장은 도요타의 위시 출시로 판매가 큰 폭으로 떨어진 스트림 판매 실적을 보면서 도요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도요타는 일본 최고의 기업이지만 첨단 기업으로 유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앞선 기업을 그대로 모방하는 기업도 아니다. 보수적이지만 개성이 강한 기업이다. “혼다는 작은 회사입니다. 도요타는 일본 1위뿐 아니라 생산대수로 세계 3위의 큰 회사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혼다에서 만드는 차를 카피하고 있지요. 이제 도요타는 빅 브라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판매를 늘리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다운 몸가짐을 해야죠.”

그는 중국에서 합작 사업 중 겪은 카피 문제도 곁들였다.

“중국에서 혼다의 스쿠터(소형 모터사이클)를 생산하는 합작 법인이 있습니다. 중국의 합작 파트너가 스쿠터 공장 바로 옆에 또 다른 공장을 만들더니 혼다 스쿠터와 거의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고는 상표도 ‘홍다’라고 붙여 팔기 시작하더군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 ‘홍다’는 혼다와 상표권 소송까지 이어져 혼다가 승소했다. 중국의 카피 문제를 빗대 도요타를 한 번 더 꼬집은 셈이다. 요시노 사장의 말 중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혼다는 작은 회사라는 말이다. 연간 자동차 판매 대수 290만 대로 세계 9위권인 혼다가 작은 회사라는 것이다. 2003년 매출만 88조, 영업이익 8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회사다.

혼다는 늘 작고 강한 회사를 꿈꿔왔다. 그래서 차종도 풀 라인업이 아니다. 대형 승용차나 픽업트럭 같은 차종이 없다. 실제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빅3에 들지 못했다. 항상 판매 순위에서 앞서 있던 닛산, 마쓰다, 미쯔비시 등이 버블 경제 붕괴와 함께 몰락하면서 혼다는 2위로 부상했다. 제 길만 가고 있던 혼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 시장에서 도요타의 경쟁 회사가 된 셈이다. 요시노 사장은 혼다가 2위로 부상한 것은 혼다가 잘했던 것보다는 다른 회사의 몰락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혼다는 도요타의 경쟁 회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론의 관심이 혼다에 쏠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혼다가 작은 회사라는 것을 강조하는 단구의 요시노 사장의 말에서 진정 ‘혼다다움’이 느껴진다.

뉴 오디세이 발표회에서 만난 도요타의 카피 문제

▲ 오디세이는 새로운 자동차 시장을 만들어 낸 혼다의 대 히트작이다. 94년 첫 선을 보인 이 차는 7인승 레저 차량의 전형이 됐다.  ⓒ
“오늘 발표한 뉴 오디세이의 신기술은 카피 잘하는 도요타라고 해도 1년 안에 따라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동안은 두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2003년 10월의 일이다. 혼다가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7인승 레저용 차량 뉴 오디세이 발표장에서 만난 개발 관련자의 한 맺힌 소리다. 그동안 얼마나 도요타의 카피에 시달려 왔는지 이 한마디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공식적인 기자 간담회에서 이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필자의 질문에 속에 맺힌 응어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뉴 오디세이 발표회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의 3대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필자는 나고야의 한 호텔에서 열린 발표회에 참석했다. 나고야는 도요타의 본고장이지만 2000년 이후 혼다의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고 있다.

도요타는 일본에서 혼다보다 무려 4배나 많은 딜러와 대리점을 갖고 있다. 영업력에서는 게임이 안 된다. 그래서 10년 전 닛산이 어려워지기 전만 해도 자동차 업계에선 이런 말이 유행했었다. “영업의 도요타, 기술의 닛산, 엔진의 혼다”라는 말이다. 엄청난 규모의 대리점을 바탕으로 도요타는 쓸 만한 혼다 신차가 나오면 6개월도 채 안 걸려 카피(도요타는 벤치마킹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 자동차 업체들은 모두 경쟁차를 카피 또는 벤치마킹하는 게 통상이다)해 비슷한 차를 내놓는다. 그것도 혼다 차보다 조금 싸고 보기 좋은 기능을 한두 개 정도 추가해서 말이다. 그리고는 막강한 영업력을 앞세워 단숨에 혼다 차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선다. 혼다에서 보면 기가 찰 일이다. 공은 혼다가 세우고 상은 도요타가 받는 격이다.

소비자들은 먼저 시장에 내놓은 혼다 차의 장점을 알아줄 리 없다. 더 싼 가격에 품질 좋은 도요타가 만들어 내놓으니 소비자의 선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니 혼다 개발진은 신차 개발 단계부터 “어떻게 하면 도요타가 카피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만들까”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경영학자는 도요타의 이런 카피에 대해 “큰 형(빅 브라더)답지 못하다”며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 학자는 소비자의 편익에서 보면 도요타가 잘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카피를 했다고 하더라도 더 싸게 소비자에게 공급하면 좋은 것 아니냐는 얘기다.

그래서 도요타가 필요 없는 개발비를 줄이고 이 덕분에 이익을 많이 내는 등 경영을 잘 한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혼다의 경쟁력은 도요타의 카피 때문에 더 단단해졌는지도 모른다. 도요타의 카피를 늘 의식하기 때문이다. 항상 기존 자동차보다 앞서가는 새로운 유형의 차와 디자인을 내놓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디세이는 새로운 자동차 시장을 만들어 낸 혼다의 대 히트작이다. 94년 첫선을 보인 이 차는 7인승 레저 차량의 전형이 됐다. 자동차와 함께하는 가족 레저 문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의 히트로 혼다는 미국에서 소형차 전문 회사라는 이미지에서 레저 차량으로까지 발을 넓히게 됐다. 또 버블 경제 붕괴 이후 판매부진에 시달렸던 혼다의 위기를 구한 효자이기도 했다. 현대차의 트라제가 오디세이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차다.

뉴 오디세이는 기존 것보다 실내는 더 넓어졌는데 차고는 오히려 낮아졌다. 일본의 경우 차고가 155센티가 넘으면 기계식 주차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진 등의 이유로 아파트에 지하 주차장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2층으로 된 기계식 주차장이 많다. 많은 일본인들이 레저용 차를 사고 싶지만 차고가 높아 생기는 주차 문제 때문에 구입을 망설여 왔다. 이 점을 혼다가 파고들어 기술로 극복해낸 것이다.

자동차를 모르는 혹자는 “차고를 낮게 만드는 게 무슨 기술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승용차가 아닌 7인승 레저차량의 경우 차고를 낮춘다는 것은 대단한 설계 및 기계공학 기술이 필요하다. 차 안에서 2, 3열 시트 사이를 오갈 수 있으려면 적당한 높이가 필요하다. 뉴 오디세이의 경우 차고를 낮추기 위해 차체 바닥에 위치한 기름 탱크를 얇게 펴서 깔았다. 그 대신 실내 높이는 줄이지 않았다. 이 기술 개발을 위해 혼다는 1년 반 동안 일절 오디세이 개발 공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혹시 도요타의 첩자가 또 있지 않을까”해서일 것이다.

또 다른 신기술은 보통 때 잘 사용하지 않는 3열 시트에 있다. 통상적으로 접어서 트렁크로 사용하는 3열 시트는 전동 스위치 하나만 누르고 있으면 자동으로 접힌다. 또 7명이 타기 위해 시트를 펼 때도 마찬가지로 스위치만 누르고 있으면 된다. 편리한 기능이다. 필자는 2004년 여름 일주일 동안 일본에서 뉴 오디세이로 여행을 했었다. 편리함뿐 아니라 주행성능에서도 손색이 없다. 일본 가격으로 2,400cc 자동변속기 고급형이 270만 엔이다.(계속)

/중앙일보 김태진 기자, 니혼게이자이 한국특파원 스즈키 쇼타로  


2007.07.24 ⓒScienc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