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할-장하준 지음(부키 / 2006년)
서장 |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아서
경제 부문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역할은 예전부터 논란이 많은 주제였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이 가장 뜨겁게 진행된 시기는 아무래도 지난 20여 년 동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시대의 총아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규제 없는 시장의 미덕을 설파하고, 탈규제와 개방․민영화를 설교했다. 그러나 이처럼 개입의 범위를 계속 확장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은 공언했던 것과 같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사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성적표는 대단히 초라하다. 세계의 1인당 소득은 ‘바람직하지 않은 구시대bad old days’로 불리는 1960~1980년 기간에도 3.1% 증가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던 1980~2000년에는 소득 증가가 겨우 2%에 그쳤다. 이런 처참한 성적표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조차도 참으로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개발도상국에서 시민 소요가 벌어지고 선진국에서 ‘반反세계화’ 시위가 발생하는 등 신자유주의 독트린에 대한 불만이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맞서 내세울 만한 실질적 대안이 있는가? 그 대안은 어찌 보면 이미 존재해 왔다. 1980년대 이전 상당수 개발도상국이 추진했던 수입 대체 산업화ISI(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정책이 그 중 하나이다. 또 한국, 일본, 대만 등의 ‘동아시아 모델’이나 중국이 지난 십 수 년간 형성해 온 독특한 자본주의․사회주의 혼합 체제도 대안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의 결과이다. 그 중에는 상당히 이론적인 것도 있고, 다소 실증적인 주제에 치중한 것도 있다. 또 국내 정책은 물론 국제적 정책에 관련된 다소 넓은 범위의 글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관통하는 이론적 맥락이 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institutionalist political economy에 입각한 접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변명하든지 상관없이 그들의 정책은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무참하게 실패했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들이 시장과 국가와 그 외의 다른 제도들 간의 상호 관계를 균형 잡히고 세련된 형태로 이론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실패한 이론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담론을 전개해 왔다. 게다가 이들은 실증적 증거들까지 지나치게 편향되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결함을 증폭시켰다. 이 책에서 필자는 일련의 주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지적 파산을 드러내는 한편, 실증적 증거들이 균형적으로 반영된 대안적 이론 틀을 구성해 보려고 시도했다. 이 책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뢰할 만한 대안을 이론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설사 그들의 대안이 나의 대안과 심각하게 다르더라도 말이다.
1부 국가의 개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의 경제 개입을 둘러싼 논쟁사
1989년에 딘P. Deane이 경제 사상사에 대한 자신의 걸작 《국가와 경제 시스템The State and the Economic System》에서 보여 주었듯이, 국가의 역할은 당초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독립적인 학문 영역이었다. 경제학은 초기에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 또는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등으로 불렸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국가의 지배자들은 경제 운영에 대한 ‘정치적’ 조언이 점점 더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정치적’ 조언이 ‘정치산술’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수많은 학자들은 이 학문에서 ‘정치’(혹은 국가)라고 하는 학문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요소를 떼어 내기 위해 끈질기게 시도했고, 이는 20세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이 학문의 이름이 ‘경제학economics’으로 명명되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국가 혹은 정치는 다소 극적인 방식으로 경제 이론과 정책 결정 과정으로 회귀한다.
양차 대전 사이의 이론적 흐름은 종전 직후 경제 이론과 경제적 실천이 국가 개입주의interventionism로 극적으로 전환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전후 경제 재건의 필요성, 아시아 및 동유럽 일부 국가들의 사회주의 건설 시도,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의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에 따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2차 대전 직후 고도로 국가 개입주의적인 견해를 기꺼이 채택했으며, 또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로 알려져 있는 2차 대전 이후의 사반세기 동안 국가 개입주의 정책들은 세계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에 따라 국가 개입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 역시 경제의 작동에서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주도적인 경제 주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경제 이론과 실천에서 국가의 부상은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황금시대 이후 국가는 급격한 추락을 경험하는데 이 또한 상당히 극적인 과정을 거쳤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경제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는 가혹하게 공격을 당했다. 먼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서 복지국가주의welfare statism의 권위가 떨어지더니, 1980년대에는 개발도상국들에서 탈규제 프로그램이 확산되면서 국가에 대한 공격이 한층 강화되었다. 국가에 대한 공격은 1989년 이후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중앙 계획 시스템이 와해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이식이 시도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물론 수많은 국가 개입 반대주의자, 즉 반개입주의자anti-interventionist들이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국가의 후퇴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적 흐름 자체가 국가 개입의 이론과 실천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다양한 반개입주의 이론들은 각자 나름의 역사적, 정치적, 제도적 상황, 그리고 이론적 전통 속에서 발전되었다. 어떤 이론은 신고전학파(예컨대 수입 대체 산업화에 대한 브레턴우즈 식 비판)를 계승하고 있는 반면, 다른 이론은 오스트리아 학파나 제도주의 같은 다소 비정통적인 전통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반개입주의 이론들의 공통점은 경제문제의 ‘기술적’ 측면보다 ‘정치적’인 측면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개입주의의 정치적 기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윤리, 정의, 권력 등의 쟁점들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복귀시켰다. 지금부터는 신자유주의 전통을 계승한 이론들을 일일이 비판하기보다 이 이론들을 관통하는 지적 기반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해 보자.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주인-대리인 모델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주인에게는 대리인의 행위 전반을 감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리인의 사적인 이익 추구를 방지하기 위한 ‘유인incentives 체계의 설계’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개별적 사안을 넘어서는 일반적 수준에서 주인-대리인 모델을 적용하면 당혹스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컨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이란 말인가. 어느 쪽이 주인이고 어느 쪽이 대리인인지를 확정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은 없다. 오히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인지 가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 그 자체가 현대 정치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주인-대리인 모델은 이 같은 정치-경제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할 수 없다. 이 모델이 주목하는 요소는 오직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려는 이기적 개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이론에 기반해서 ‘경제 영역에서 국가를 몰아내자’는 급진적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은 국가에 대한 깊은 불신이다. 신계약주의자들에게 국가란 본질적으로 확장 경향이 있는 필요악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사회 계약의 주체인 주권적 개인들sovereign individuals이 국가를 지속적으로 감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불신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무비판적으로-혹은 의도적으로?-국가 또는 그 구성 요소로서의 관료 집단에 대해 언제나 자신 또는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개인이나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 또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자기중심적 전제를 허무는 사실들은 일상적으로 너무나 많다. 이 같은 사실들을 무시하는 모델에 기반한 정책들은 잘해봤자 혹세무민에 불과하거나, 최악의 경우 그 모델 구축자의 ‘국가 반대’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국가 불신의 또 다른 특징은 개개인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맹신이다. 물론 모든 친親시장적 이론들은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이 ‘잘못된’ 제도와 국가 정책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즉 경제 전반의 생산능력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이윤 창출 노력이 (예컨대 혁신과 같은) 새로운 지식을 생성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한데, 국가 개입은 이런 개인들의 노력을 해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의 문제점은 기업가 정신을 본질적으로 개인적 행위의 일종으로 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내부에만 지식이 비축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현대 경제에서는 제도와 조직들 역시 지식을 축적하는 공간으로 역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은 점점 더 집단적 행위의 성격을 띠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을 비판했다. 우리는 대다수 신자유주의 이론이 (경제 주체와 사회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른) 인간 행위에서의 동기의 복잡성,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리인인지 불분명한) 현대 정치 형태의 복잡성, 정책 형성 및 수행 과정에서 정당화의 중요성,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관리의 필연성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기껏해야 남을 오도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사기로 만들어 버린다. 첫째, 전시戰時나 우주 개발 계획처럼 압도적으로 중요한 목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중앙 계획 경제가 시장보다는 더 잘 작동한다. 둘째, 중앙 계획 경제만큼 정보 수집 능력이 절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앙 계획 경제만큼은 효율적인 또 다른 형태의 국가 개입이 있다. 바로 동아시아 스타일의 산업 정책 경제이다. 하이에크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제3의 길은 있다. 아니, 수많은 제3의 길이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존하는 국가 개입의 유용성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역사적 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실제로 현재의 국가 개입 중 일부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했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 개입의 새로운 형태를 정초하기 위한 연구의 막이 오른 것도 사실이다. 이제 와서 신자유주의의 부활 이전으로 지식 사회의 시계를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세계 경제가 엄청나게 변화했음은 물론, 그 과정에서의 실제 경험과 신자유주의적 비판에 입각해 볼 때 과거 사고방식의 결함들이 일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전의 지적인 황금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유효한 통찰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벗겨낸 뒤, 더욱 넓고 객관적인 지식 틀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종합이 우리의 목표이다.
구조 조정 시대의 국가의 역할
그 어떤 국가도 아무런 흠집이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아무리 ‘강고’한 국가라 해도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무수한 영역에서 경제 활동의 초국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정책을 고안하는 국민국가의 역할은 점점 더 어려운 국면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혹은 다른 경제 주체) 입장에서는 좋든 싫든, 쉽든 어렵든 기업가 및 갈등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상호의존성과 (급진적이든 점진적이든) 기술 및 제도 부문에서의 혁신이 특징인 현대 경제에서 국가는 기업가와 갈등 관리자로서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국가가 이런 역할을 포기한 결과는 일관성 있는 조절 구조와 원활히 작동하는 갈등 관리 시스템의 출현이 지체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 해당 국가의 경제 변동은 엄청난 낭비와 사회 세력 간의 반목을 수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필자는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으로 불릴 수 있는 방법론을 제안하며, 그에 필요한 이론의 몇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이론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기초인 ‘시장의 우선성’ 가정을 기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시장을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다른 제도들에 비해 우위성이 없는 또 하나의 제도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은 다른 제도들만큼 ‘자연스러운’ 동시에 ‘인위적’인 제도로 자리매김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라야 우리는 시장․국가․그 밖의 다른 제도들 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더욱 정확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이상적인’ 시장의 작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고전학파적 관점은 수많은 그럴듯한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하고, 게다가 특별히 탁월한 것도 아니다.
셋째, 우리는 신고전학파 이론이 기본적으로 시장에 대한 이론이라는 것을 (그것도 도식적이어서 대중을 오도할 수 있는 이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으로서 시장들의 집합체 이상이며, 수많은 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어느 정도 역설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신고전학파 이론 구조에서 엄청난 문제로 인식되는 시장의 실패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넷째, 우리는 시장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시장을 떠받치는 특정한 권리/의무 구조와 관련짓지 않으면 정의할 수 없는데, 이 같은 권리/의무들은 정치적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신고전학파 (혹은 신자유주의) 논객들이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것처럼 어떤 ‘과학적’ 혹은 ‘자연적’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내용들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제도주의 이론의 다섯 째 요소로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신자유주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균형잡혀 있으며, 보다 세련된 정치에 대한 관점인 만큼 앞으로 이런 정치적 관점에 입각한 정치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제도적 다양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제도적 다양성이라는 논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추상적인 시장 경제 이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교환에 기반한 ‘교환 경제’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경우 부분적으로는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세금/보조금과 공적 소유 외에도 국가 개입에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국가 개입이 많은 나라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국가 개입이 없는 것으로 잘못 묘사한다.
2부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경제학을 향하여
초국적기업의 등장과 산업 정책
한때 많은 비평가들은 초국적기업에 대해 빈국貧國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를 왜곡하는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초국적기업을 비난했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초국적기업이야말로 개발도상국이 새롭게 부상하는 국제화된 생산 네트워크에 통합되도록 촉진하는 것은 물론,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도록 도움을 주는, 경제 개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초국적기업에 대해 장밋빛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조차 점점 높아져가는 경제의 국제적인 상호 의존성이나 ‘세계화’, 특히 그 과정에서 초국적기업의 중요성이 증대되는 것을 제지할 방도가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의 선호 여부와 상관없이 국가가 초국적기업에 대해 좀 더 융통성 있는 태도accommodating attitude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현재 초국적기업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한 ‘세계화’도 아니며, 그 진행조차 고르지 않다. 초국적기업 대부분이 고수익을 겨냥해 활동을 국제적으로 재편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경 없는’ 기업이라기보다는, 주변적 활동만 본국 이외에서 진행하는 여전히 ‘국가적 성격을 지닌’ 기업에 그치고 있다. 상황이 느리게나마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지만 이런 식의 진행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많은 개발도상국들과 이전에 공산 국가였던 나라들의 경우 여전히 국제적인 외국인 직접투자의 흐름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렇듯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초국적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매우 과장되었음이 드러났다. 많은 동아시아 경제가 국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특별히 외국인 직접투자에 의존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초국적기업에 대한 개방적 정책 지지자들은 초국적기업에게 좋은 것이 자본 유치국에도 좋은 것이며, 초국적기업과 자본 유치국 사이에 존재했던 사소한 이해 충돌은 최근의 세계화 추세 덕분에 제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부 개발도상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초국적기업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 견해가 별로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이 곧 초국적기업이 경제 발전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견해로 이어질 수는 없다. 최근의 이론적 발상과 실증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기적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경영과 기술 역량을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초국적기업을 선별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고유 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산업화 전략이 보다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과 대만이 채택한 정책들은, 초국적기업은 경제 발전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고 활용될 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산업화 전략과 개별 산업 각각의 구체적인 요구에 따라 그 역할이 분명히 정의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기업이 국경의 제약을 받는 정도가 약해짐에 따라 특정 국가 차원에서의 ‘전략적’ 산업 정책의 유효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가하지 않는 제한을 적용할 때 초국적기업은 당연히 해당 국가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빈국을 제외한 모든 잠재적 자본 유치국의 경우 단순한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들 나라는 초국적기업과의 협상에서 상당한 협상력을 갖고 있으며, 실제 발휘하기도 한다. 초국적기업이 속성상 진퇴가 자유롭다는 주장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투자에 있어 (물질적 자본이나 생산 네트워크 모두에서) 매몰 비용이 막대한 산업이 많은데, 이런 매몰 비용은 초국적기업의 이동성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규제는 초국적기업이 투자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시장의 성장 전망 같은 다른 요소에 비해 사소한 요소에 불과하다.
유능한 정부라면 (일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 필요한 자본, 기술, 마케팅 네트워크 등을 획득하기 위해 전략적 방식으로 초국적기업을 활용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해 왔다. 이 글이 주장하는 요점은 전략적 산업 정책을 추구하는 유능한 정부라면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이 추천하듯 초국적기업에 대해 산업 전반에 걸쳐 ‘균일한’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은 일부 산업에서 어느 정도나마 ‘협상 카드’를 지니고 있다. 비록 개발도상국들이 초국적기업에 비해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협상력이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 국가는 여전히 보유하고 있고, 앞으로도 보유 가능한 협상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국가는 여전히 외국인 직접투자의 수익과 비용을 결정할 수 있는, 적지만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별적 산업 정책은 지금도 유효한가?
지난 세기 동안 사회적으로 어떤 경제 활동이 다른 경제 활동보다 더 바람직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지배하게 되면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이 점점 더 그 힘을 잃어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더 바람직하고, 따라서 정부의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관념은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수입 대체 산업화와 그것과 관련된 아이디어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신고전학파 개발경제학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는데, 신고전학파 개발경제학은 근본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신뢰했고, 모든 정부 간섭을 깊이 불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1980년대 후반 들어 다시 바뀌었다. 한국이나 대만 같은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의 발전에 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서 이 국가들이 흔히 하듯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 정책을 기반으로 했다면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이 지적된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의 (특히 일본과 한국, 대만의) 성공에 따라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과 관련된 논쟁에는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논쟁의 초점이 정책 이행의 제도적 선결 조건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벌어진 논쟁 과정을 통해 이제는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 정책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애써 제한적 성공이라고 강조하기는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통해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의 반대자들은 여전히 제도적 간섭을 허용하는 특정한 유형의 제도 존재 여부가 그 정책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만큼,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은 그런 제도적 선결 요건을 갖추지 못한 국가로 쉽게 이전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집한다.
필자는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이 시장 지향적 정책의 시행에는 불필요한 ‘제도적 버팀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비현실적이라는 현재의 통속적 견해를 비판한다. 이는 시장 중심적 정책 또한 ‘제도적 버팀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이 효과적으로 설계되고 이행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데, 여기에는 관료 조직, 국영기업, 금융 흐름의 통제 혹은 조정위원회나 산업연합회 같은 중개 기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역할이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주장한다. 이는 성공적으로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활용한 국가의 경험에서 유용한 교훈을 이끌어 내려면 더욱 주의 깊은 연구와 더 많은 실증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WTO 체제 아래서도 여전히 방법을 찾을 여지는 있으며, 완전히 적법한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는 많은 정책이 있다는 사실 또한 지적했다.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논의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궁극적인 의문은 ‘복제 가능성replicability’이다. 이와 관련 국경을 넘어서 제도를 이전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견해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성공적으로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을 활용했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로부터 최저개발국이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교훈은 ‘시장 개혁’과 관련해 흔히 듣게 되는 지나친 낙관론을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교훈은 최저개발국의 경우 선별적 산업․무역 정책의 수행에 필요한 제도적 변화를 이룰 능력이 없다는 잘못된 비관론을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술 발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제도 발전의 영역에서도 모방과 혁신의 여지는 많이 있다. 정치적인 의지를 갖고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친다면 최저개발국도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산업 정책 국가’의 성과를 달성해 낸 동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의 경험을 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반경제성 비판
규제의 경제학과 정치학
규제regulation는 통상적으로 정부-혹은 국가-가 민간 부문 행위자들에 대해 ‘공공 이익’과 충돌을 빚는 일이 없도록 어떤 행위를 할 수 있고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는지 직접적으로 명시하거나 금지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규제는 정부 세입tax revenues에 의거한 공공재의 정부 공급이나 공기업을 통한 상업적 재화 및 서비스의 공급과는 구별되고, 또한 조세와 보조금을 통해 가격 신호를 수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민간 부문 행위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의도된 행위들과도 구분된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구분이 그리 분명하지 않다. 우선 ‘공공 이익’을 규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경제학자들- 혹은 다른 사회과학자들 -이 이론적으로 공공 이익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정부가 인식하고 있는 공공 이익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부가 실제로 공공 이익을 증진하기를 원하는지, 정부가 공공 이익을 증진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문제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사반세기 동안, 즉 연구 목적상 ‘규제의 시대age of regulation’라고 지칭하고자 하는 이 시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정부 개입 수준의 전반적 상승이 목격되었다. 미국은 전형적인 자유 시장 경제라고 자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규제에 관한 한 많은 영역에서 다른 선진국들보다 앞서 나갔다. 다른 선진국들, 즉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 지금은 그 차이가 줄어들었는지 모르지만 미국과는 다른 형태의 규제 체제를 취했다. 하지만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규제의 목적에 있었다. 미국에 대해 ‘추격자’의 입장인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규제 체제가 종종 ‘개발 지향적developmental’ 목적에 맞춰 형성되었다. 미국의 경우 규제 체제가 주로 ‘정태적static’인 생산과 배분의 효율성에 대한 우려에 의해, 일부는 형평에 대한 우려에 의해 형성되었던 데 반해,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생산성 향상, 기술 개선 및 효율적 구조 변화 달성과 같은) ‘동태적dynamic’ 고려들에 비중을 둔 것이다.
‘규제의 시대’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국가들이 급격한 성장과 전례 없는 물질적 번영을 경험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규제 체제의 효과에 대해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많은 나라들에서 이 시기의 벽두에 (그리고 일부 탈脫식민국들의 경우 독립 후 1960년대 초까지) 들어선 규제의 틀이 대체로 잘 작동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이나 서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 근대화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미국의 규제 체제가 ‘폭넓게 이용 가능한 수준 높은 서비스, 확실한 공급 계약, 그리고 안정적인 (그러나 종종 일부 소비자가 나머지를 보조하게 하는) 가격의 제공’이라는 자체 목적을 대거 달성했다는 점도 인정받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의 경우에는 전체상이 다소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안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전후의 규제 체제가 대체로 잘 작동했으며, 몇몇 나라에서는 실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규제를 비롯한 정부 개입 전반에 반대하는 정치적․조류는 1970년대에 부상하기 시작해 1980년대 초부터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나라들이 여러 가지 내외 압력으로 말미암아 국가와 경제 간의 관계에 대해 광범위한 구조 조정의 길에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규제 개혁, 예산 삭감, 민영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지속된 경제 실적의 지체로 말미암아 옳건 그르건 케인스주의적 총 수요 관리와 광범위한 정부 규제에 의존한 종래의 경제 관리 모델을 불신하게 되었다. 케인스주의적 거시경제 정책의 매력이 떨어지고 복지국가가 부과하는 조세 부담을 대폭 줄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과다한 규제가 일본이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의 경쟁에서 많은 선진국들, 특히 서유럽 국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우려가 증대되었다.
전체 경제의 수준에서 탈규제의 영향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일부 부문별 성공담에도 불구하고 두 탈규제 주도국, 즉 미국과 영국은 탈규제 추진 이후 자국의 경제 실적을 뚜렷하게 향상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선진국들은 영미의 경우처럼 그리 대대적으로 탈규제를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규모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아직까지는 탈규제의 영향이 그리 가시적이지는 않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멕시코처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탈규제를 추진한 나라들이 장기적 성장률을 제고하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탈규제의 추진으로 인해 대폭적인 투자의 하락이 초래됨으로써 장기적 성장 전망이 약화된 때문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경제에서 (가나같이) 급진적인 탈규제를 추진한 나라들의 경우 초기에는 좋은 경제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것은 주로 설비 가동률 제고와 수입 자재의 공급 개선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그 원동력이 다소 빠르게 소진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반세기는 다양한 규제 (그리고 일반적으로 국가 개입) 이론들이 태동하고 발전하고 몰락한 세월이었다. 더불어 여러 나라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규제 체제들이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세월을 경과했으니 우리는 아마 50년 전보다는 훨씬 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해결책을 찾았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기까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현존하는 이론들이 거의 무시해 왔거나 충분히 심층적으로 탐구하지 못한 중요 쟁점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규제 개혁을 향한 현실 세계의 진전은 자신들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려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규제’라는 대상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느린 발전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지난 50여년의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세계는 우리가 믿거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실체라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공기업의 효율성
공기업이 언제나 ‘비효율적’이라거나, 대부분 실적이 저조하다는 주장은 기초적인 사실 조사만으로도 그 허구성이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전 세계의 혼합 경제 국가에는 공기업이 광범위하게 설립되어 있다. 공기업이 좌익 체제나 저개발국가, 경제 실적이 저조한 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공기업은 대만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경제적 성공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이들 국가의 공기업 부문 규모는 인도․아르헨티나․브라질․멕시코 같은 다른 선도적 신흥공업국들과 엇비슷했고,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필리핀이나 페루보다 훨씬 컸다. 그 중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기 어려운 대만에서 공기업은 1950년에서 1975년까지 총 자본 형성의 3분의 1을 기여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대만은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과 산업화를 보여 주었다. 또 아프리카 관련 데이터에 따르면, 공기업은 (때로 성공적이라고 간주되곤 하는) 코트디부아르나 케냐 같은 시장 지향적 국가에서나 ‘사회주의적’인 탄자니아에서나 마찬가지로 큰 역할을 수행했다
수익성을 기준으로 하는 실적 평가는 본질적으로 공기업에 불리하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조차도 저개발국의 공기업이 항상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은 내리지 못한다. 심지어 수익성이 낮아도 공기업이 사기업보다 우월한 실적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낱낱이 뜯어보면, 상당수의 공기업은 아프리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이윤을 내고 있으며, 수익성 측면에서도 상응하는 사기업보다 나은 실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재무 실적을 무시하자거나 저개발국의 공기업들에게 재무적으로 개선할 점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저개발국 공기업의 재무 실적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의 조세 수입을 크게 증가시키기 어려운 저개발국이 다른 부문에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을 창출할 주요 수단으로 공기업을 설립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일반적으로 공기업이 사기업보다 실적 측면에서 떨어진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엄밀한 실증적 증거는 없다. 그렇다고 공기업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고 그러므로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저개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 문제 중 하나는 ‘공기업의 실적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 가장 인기 있고 간단한 처방이 민영화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자가 지적했듯 민영화는 유일한 대안도 아니고 최선의 대안도 아니며, 그저 그런 대안도 못 되기 쉽다. 기업의 효율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에는 소유 형태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이는 결국 민영화가 공기업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처방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소유 형태 이외의 요소들이 동시에 바로잡히지 않는 한 민영화로 해당 기업의 실적을 개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의 공기업들은 다양한 이유로 말미암아 수익성이 저조한 산업 내에서 운영된다. 게다가 이미 지적했듯, 공기업 중 일부는 부실 경영으로 국유화된 사기업이다. 이렇듯 (이전에는 사기업이던) 공기업이 사양 산업에 속해 있을 경우에는 대규모 구조 조정을 감행하지 않는 한 수익성이 저조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공기업의 수익성이 낮은 경우 매각 대상이라 하더라도 구매자가 나설지 의문스럽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민영화에 따라 반드시 정부가 모든 책임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순수하게 세입을 창출하기 위해 설립된 (관광호텔이나 담배 전매 등의) 공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공기업은 민영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 규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민영화된 공기업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독점이나 과점에 해당하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이거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외부 효과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영화로 공기업의 실적을 개선하는 방안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공기업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공기업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의 수를 줄여야 한다. 공기업이 너무 많은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가뜩이나 희소한 저개발국의 경영 자원이 희석되는 탓에 도리어 실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센티브 개혁이다. 공기업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 중 하나는 이들 기업의 경영자와 노동자에게 더 나은 실적을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보상과 처벌에 해당하는) 적절한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보상 측면을 살펴보면, 실적을 보수와 연계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어느 정도 유용하다. 기업 실적이 하락할 경우 경영자 징계 측면과 관련해서는 (적자 경영을 지속하는 기업이 국가 또는 은행에 의해 지속적으로 구제됨으로써 기업의 금융 제약이 연성화되는 현상인) ‘연성 예산 제약’을 제거해야 한다. 노동자 징계 측면과 관련해서는 일부 저개발국의 공기업들이 누려 왔던 ‘철밥통’ 관행을 깨뜨려야 한다.
상당수의 저개발국에서 공기업은 제조업 고용의 주요 원천인데다, 다른 부문보다 높은 임금을 주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공기업은 사기업들이 하청 계약을 수주할 수 있는 주요 원천이기도 하다. 공기업 운영에 관련된 일자리 수와 자금 규모를 감안하면, 상당수의 저개발국 정치인들의 경우 정치적으로 선호하는 집단에 대한 소득 재분배의 수단으로 공기업을 이용한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공기업의 경영진 임명, 고용 정책, 계약 등에 발휘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기업을 (정치인과 민간이 특혜와 정치적 지지를 맞교환하는 관행인) ‘후견주의clientelist’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행은 ‘국가가 약체인’ 개발도상국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민영화든 조직 개혁이든 거시경제 상황의 개선이든 간에, 이 경우에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경제 문제들은 정치 동향과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기술적 처방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경제 문제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책요약 월간지 "for Beautiful Leaders" 07년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