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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X파일의 글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표준낚시백과사전』을 편찬한 서동찬씨가 쓴 것입니다.
본인의 동의를 얻어 이 세상에 올립니다.
보고 즐기시는 것은 자유롭습니다만 출판 등의 목적으로는 별도의 동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전문적인 낚시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낚시를 취미로 하지 않는 분들도 재미 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낚시인들이 도대체 왜 물가에서 세상을 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지
한번 깊이 들어와 보시기 바랍니다. |
낚시통치학개론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낚시는 어떠했을까? 레저 및 스포츠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풍류(風流)와 가무(歌舞) 그리고 사냥과 낚시가 주된 놀이문화였다. 그 중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한 사냥과 낚시는 제왕들이 늘 주목했던 분야다.
낚시는 시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척도(尺度)였으며 왕조를 떠받치는 통치그룹인 사대부 가운데 인물 발탁의 한 수단이기도 했으며 화합의 정치를 위한 도구로도 쓰였다. 어떤 경우에는 낚시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실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고, 고결한 선비정신의 표현이기도 했으며 은둔과 기다림의 다른 표현방식이기도 했다. 때를 기다린다는 데 뜻을 둔 ‘기다림의 美學‘으로 낚시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은 강태공(姜太公)이 원조일 것이다.
강태공은 기회 포착의 수단으로 낚시를 했으며 결국 그는 주 문왕과 무왕, 주공 단(旦) 삼부자를 낚아 입신출세를 할 수 있었다. 결국 낚시는 큰 인물을 계량하는 지표로 쓰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낚시에 대한 동양적 사고(思考)이며, 인간관리술의 한 측면으로 낚시를 이해한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민들의 눈으로 보면 낚시는 생업의 보조수단이었고, 비용이 들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유희(遊戱)의 한 가지였다. 어느 계층 누구에게나 낚시가 곧 어른들의 유희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국내의 역사를 돌아볼 때 멀리 신라의 석탈해는 왕이 되기 전에 낚시를 하면서 물고기를 잡아 양어머니를 봉양했고, 고구려의 6대왕인 태조왕은 압록강에서 낚시를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왕들의 낚시는 단순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낚시史의 寶庫
우리 조상들의 낚시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사료는 역시 조선(朝鮮)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이다. 왕조실록을 보면 기생을 품고 낚시만을 즐기다 직무유기죄로 파면된 사람, 조야(朝野)에서 벗어나 왕권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자세로 일생을 마친 사람, 왕족으로서 시도 때도 없이 낚시를 하다가 처형된 사람, 여러 왕들의 낚시, 그리고 부산이나 마산·거제 등지의 섬과 바닷가에 대마도의 왜인들이 생업으로 낚시를 하면서 일으킨 분란 등이 자세하게 수록돼 있다. 조선조의 낚시와 그 당시 사람들의 낚시에 대한 생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단서다.
왕자의 난(亂)이라 지칭되는 이방원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정도전이 조정에서 그 세력이 한창 강하던 시기에, 형의 부름을 받은 아우 정도복은 부불삼대 권불십년(富不三代 權不十年)이란 세간의 현상을 예측이나 한 듯 낚시를 핑계삼아 이렇게 사양한다.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으로 이미 영화가 지극한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천수를 누리겠으니 형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
정도전의 죽음과 실각을 낚시꾼의 예지로 미리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미칠 화를 피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으며 은둔한 예의 하나일 것이다.
현군 중에 현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낚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낚시를 아주 좋아한 중국의 송(宋) 태종에 대해 세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송 태종은 정말 어진 임금이다. 그러나 더러는 공치사도 하고 또 희롱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이런 일은 제왕으로서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여기서 말한 ‘희롱’은 시를 짓기를 좋아하고 4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참관한 가운데 낚시를 즐겼던 일을 말한다. 낚시를 좋아한 나머지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낚시를 즐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은 물고기를 잡았지만, 송 태종은 한 마리도 낚지를 못한 적이 있는데, 정위(丁謂)라는 신하는 그것을 빗대어서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물고기가 용안(龍顔 임금의 얼굴)을 두려워하여 낚시에 올라오기가 더디구나(魚畏龍顔上釣遲)
정인지와의 대화 형식으로 세종실록 12년조에 올라있는데, 임금이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을 비꼰 내용이 비위에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종은 정위가 시는 잘 지었으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세종은 명예를 추구하는 신하에게 ‘명예를 낚으려 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해 낚시라는 용어에 달갑지 않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한 세조에 철저히 반기를 든 사육신과 생육신 가운데 생육신은 한결같이 은둔과 낚시로 일생을 마쳤다.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의 생육신 가운데 남효온은 문집 추강집에서 낚시 관련 시를 남겼으며, 김시습도 자신의 처지를 빗댄 제위천수조도(題渭川垂釣圖)란 시를 남겼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경회루에서 수시로 낚시를 했다. 이 때 세조의 찬탈을 도운 박원형을 가까이 두고 밤낚시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이 특별히 즐길 만한 유희가 없어서 낚시를 한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 궁중의 공식적인 자리를 피해 민심을 살피고 인물을 탐색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효령대군은 호탕한 맹렬조사
낚시를 즐긴 왕족도 기록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양녕대군은 사냥과 낚시를 즐긴, 호탕한 인물. 대군(大君)·도정(都正)·정(正) 등의 호칭으로 불리던 종친(宗親)들은 ‘왕이 못된 왕족은 정승집 개만도 못하다’고 자학하며 조심조심 살았던 또 하나의 아웃사이더들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니 낚시를 한 사람이 꽤나 많았다. 그 중에 연산군 시절 이총(李摠)은 낚시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남효온과 자주 어울려 낚시를 했다. 양화도(楊花渡 지금의 제2한강교 양화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고기 잡고 낚시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작은 쪽배를 하나 타고 거문고와 술을 싣고 가서 종일 거문고를 타거나 낚시를 했으며, 날이 저물면 돌아왔으니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연려실기술엔 그의 원 이름이 백원(百源)이며, 태종의 별자(別子 서자)로서 무풍정(蕪豊正)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나와 있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갑자사화가 일어난 연산군 10년(1504년). 무풍군 이총과 친했던 낚시꾼 남효온은 이해 11월에 죽고 이총은 낚시 때문에 목이 잘린다. 인수왕대비가 죽어서 국상 중에 놀며 낚시한 것이 화근. 연산군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어제 국상(國喪) 때 놀며 잔치한 사람들을 가두게 하였는데, 이 역시 군상(君上 임금과 그 일족)을 업신여겨 한 짓이다. 지금 풍속을 바로잡는 때인데 남겨두어 무엇에 쓰랴. 그 때 함께 간 악공(樂工 악사)이니 기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생은 아녀자이므로 혹은 남자한테 이끌려서 마지못해 간 자도 있을 것이니 깊이 논의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풍악을 연주하는 일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므로, 놀며 잔치할 때 궁중 일을 전하여 말한 이도 없지 않을 것이니 형장 1백대를 때려 관비(官婢 관청 소속의 노비)로 내려 보내라. 악공은 음악을 잘 하지만 어찌 그만 못한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인가. 남겨둔들 소용이 없다. 홍식(洪湜)은 궁중 일을 누설하였으며 이총은 종친으로서 조야의 사대부와 사귀어 결탁하였는데, 모두 남겨둔들 소용이 없으니 의금부에서 이총의 머리를 베어오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처는 관비로 부치고 아비와 동생은 장 1백대를 때려 먼 곳에 귀양 보내라. 홍식도 목을 자르고 그 집을 몰수하며 아들 홍세필 역시 참형하되 오늘 안으로 실행하라.”
또한 인조 때 경평군(慶平君)의 작태를 이귀(李貴)가 고해 올린 이야기도 낚시와 관련돼 있다. 왕족이라고 유세를 부리던 경평군을 이귀가 혼내준 사건이다.
“어떤 왕자가 강가에다 정자를 지으면서 낚시터를 빼앗아 차지하고 또 강제로 강가 사람들에게 날마다 고기 잡고 나무하는 일을 시키므로 주민들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조가 어떤 왕자인가를 묻자 이귀는 경평군이라고 하면서 죄를 줄 것을 극력 진언했으나 인조가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낚시 자리를 빼앗다니. 지금이라면 낚시회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다. 모두들 낚시 때문에 졸지에 죽거나 패가망신한 사건이다.
낚시터에 도열한 규장각 신하들
조선조 여러 왕 가운데 낚시를 통치의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한 현군이 바로 정조(正祖)다. 낚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정조가 궁궐에서 여러 대신들과 낚시를 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다음의 두 기록은 흥미롭다.
정조 18년 9월 30일.
(정조는) 여러 각신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정조임금은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내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직책에 있는 모든 자를 집안사람처럼 보았으니, 오늘의 모임에도 마땅히 집안사람의 준례를 적용하겠다. 각신(閣臣 규장각의 신하) 자제들도 모두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허락한다.”
모두들 못에 둘러앉아 낚시를 하는데, 고기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기(旗)를 들고 음악을 연주했다. 정조임금이 각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금일의 놀이는 매우 성대한 모임이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기구(起句)와 결구(結句)를 지을 터이니 경들이 각각 한 연씩 지어서 전편(全篇)을 완성하도록 하라.”하고, 드디어 기구(起句)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내원에선 어조(魚藻)시를 노래하고
앞 연못엔 뛰어난 인재 모여 있네
결구(結句)는 이렇다.
온 자리에 화기가 혼후(渾厚)하니
너희 무리를 집안 사람처럼 보련다
그리고 나서 음식을 베풀었다. 9개의 과녁을 설치하고 각신·승지(왕의 문서비서관)·사관(史官) 및 유생 중 활을 잘 쏘는 자들과 짝을 지어 활을 쏘아서 한 차례에 5개의 화살을 맞추었다. 저녁 때에 이르러 파하였다.
정조 18년 9월 30일.
다시 하교하기를 “‘스산한 비바람이 낚시터를 스칠 제, 고기 새 함께 기심(機心) 잊던 위천(위수) 땅 태공망은, 어인 일로 늘그막에 응양장군 되어서, 속절없이 백이 숙제 고사리 캐게 하였나?(風雨蕭蕭拂釣磯 渭川魚鳥共忘機 如何老作鷹揚將 空使夷齊餓採薇)’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응양(鷹揚)이라고 한 것은 정난훈신(靖難勳臣)에 견준 것이고, 백이 숙제는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김시습의 제위천수조도(題渭川垂釣圖)라는 시와 같은 뜻이 있다.
무릇 신하의 충성과 여자의 정절은 한가지다. 임금이 비록 무례하다고 하더라도 신하는 충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또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도 같다. 비록 남편이 어질지 못하더라도 여자는 정절을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굴원(屈原)은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임금으로 섬기다가 떠나갈 때 못가에서 읊조린 것이 슬프게 원망하며 부르짖은 것이었는데, 문득 모두 부부에 비기었다. 더구나 고 참판 유몽인의 노부사(老婦詞)는 굴원의 이소경(離騷經)이 남긴 뜻을 깊이 체득하여 김시습의 시에 필적할 만하다. 신하와 여자로서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이 모두 이 절조다.
마음이 강개한 것과 조용한 것 사이에는 높고 낮음을 구별할 필요가 없으나 조용한 것은 강개한 것에 비해 더욱 어렵다. 지난번에 유몽인이 당한 치욕을 씻어줄 것을 재가하는 말 중에 특히 단종의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서 김시습 한 사람만을 끄집어낸 데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유몽인은 일찍이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대제학으로 올라갔다. 자기의 지혜를 나타내지 않고 속세를 따랐다면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흉악한 의론을 돌아보고는 명리를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고 기꺼이 강호에 자신을 맡겼으며 시에 능하고 도를 깨달은 승려와 어울려 승려처럼 지냈으니, 이는 김시습이 속세를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는 청빈한 본마음을 보인 것과 같은 것이다.
유몽인은 잡히게 되자 서산(西山 양주의 서산을 말함)에 한 마디 말을 하고는 태연한 자세를 가졌으니, 그 자세야말로 김시습이 위천시로 이른 것과 일반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설악산과 같은 김시습과 금강산과 같은 유몽인을 차이 두고 봐서야 되겠는가. 만약 당시에 옥사를 맡은 관원이 정조임금의 관대한 가르침을 체득하여 유몽인의 죄과를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캐고 물을 마시면서 그 몸을 마쳐 김시습처럼 오점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시습과 유몽인 저 두 사람이 흠모한 것은 백이와 숙제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서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자취와 때일 뿐이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의리를 취한 그 지극한 정성은 백년 뒤에 가서 보아도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을 것이니, 조정에서 김시습에게 이미 베푼 것을 유몽인에게 베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조 19년 3월 10일.
꽃 피는 음력 3월의 꽃구경과 더불어 정조가 여러 대신들과 낚시를 한 기록이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했다. 여러 각신(閣臣)의 아들·조카·형제들도 참여했는데 모두 54명이었다. 또 특별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직부(直赴) 이시원(李始源)을 불렀는데, 영상은 나이가 많았으나 덕망이 있어서 매년 이 모임에 참여시켰으며, 이시원은 인망을 쌓아 규장각의 관리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정조임금이 이르기를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매년 꽃구경하고 낚시하는 놀이에 초청된 각신의 자질(子姪)이 아들과 아우 또는 조카에만 한정되다가 올해에 들어와 재종(再從)과 삼종(三從)까지 그 대상을 넓힌 것 역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뜻에서이다.”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말을 타고 나가면서 신하들에게 말을 타고 따라 오도록 허락했다. 어수당(魚水堂) 앞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였다. 천향각(天香閣)에 어좌(御座 임금이 앉을자리)를 설치하였다.
대신과 각신(閣臣)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임금이 다시 존덕정(尊德亭) 서쪽 태청문(太淸門) 안 막차(幕次)로 행차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내원(內苑)의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外臣)을 내연(內宴 궁중연회)에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이라 하겠다. 옛날 장릉(長陵) 계해년 이후로 훈신을 보살펴주어 곡연(曲宴)에서 모시고 노닐게 하며 가족처럼 예우했다. 그러다가 효묘(孝廟 효종)께서 즉위한 초기에 훈귀(勳貴 훈구대신들)의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며 사림의 인사를 초빙한 뒤 합심해 군국(軍國)의 일을 의논했는데, 어수당과 천향각에는 아직도 송문정(宋文正)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정이 분열되는 환란이 또 일어났으므로 숙종 때부터 선조(先朝 영조)에 이르기까지는 척련(戚聯)의 신하에게 속마음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궁중의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가 아니게 되었는데 이는 단지 그 때의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나는 춘저(春邸 동궁) 때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리(戚里)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 위주로 장식하려 해서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두고 좋은 말을 들으려는 함이었다. 그리하여 좋은 벼슬을 주고 예우했으며 심지어는 한가로이 꽃구경하고 낚시할 때도 각신(閣臣)과 함께 했으며 그들의 아들·조카·형제 역시 모두 연회에 참석케 한 것이다.
예법을 간소화하여 은혜로 접하고 함께 어울려 기뻐하고 즐기는 것을 매년 정례화 했으니 이런 일이야말로 예로부터 신하된 자로서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필경 귀근(貴近)의 폐단이 일어나더니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극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아오면 물러가게 되고 느슨해지면 펼쳐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이치라고 할 것이니, 척신(戚臣)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려는 것이 나의 평소의 성격인 동시에 내가 고심하는 것이니, 수십 년 동안 행해온 일을 지금에 와서 그만둘 수는 없다. 이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여 오늘 내가 유시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한 마리 낚을 때마다 한 곡씩 연주
술이 몇 순배 돌자 정조임금이 세심대의 대(臺)자로 운(韻)을 써서 칠언시(七言詩) 한 수를 지어 읊은 다음, 대신과 신하들에게 화답하라고 하였다. 또 부용정(芙蓉亭)의 작은 누각으로 옮겨서 신하들과 함께 태액지(太液池)에 낚시를 드리웠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낚시를 했다.
임금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으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놓아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한편 정조행장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고기 낚고 하다가 존덕정(尊德亭)으로 가 신하들에게 일렀다. “옛부터 내원 놀이에는 척신이 아니고는 참여하지 못했다. 종친 이외의 신하로서 내연(內宴 궁중연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각별한 대우이다. 옛날 인조임금이 계해년 반정(인조반정 1610년) 이후로 훈신들을 융숭히 대우해 이러한 잔치에서 놀게 하면서 마치 한 식구처럼 대했는데, 효종은 즉위 초부터 훈귀(勳貴)의 폐단을 완전히 없애고 사림(士林)들을 초대해 두고는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마치 어수(魚水 물고기와 물의 관계)요 천향(天香 임금의 아름다운 일)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송문정공(宋文正公)이 마주했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또 조정에 분열이 생겨 숙종조부터 선왕조(영조)까지는 부득이 또 척리들과 밀착하지 않을 수 없어 궁중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 아니었는데 그것은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춘저(春邸 동궁 세자시절)에 있을 때부터 현자를 가까이하고 척리는 멀리해야겠다고 깊이 느꼈기 때문에 즉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부터 세웠다. 그것은 문치(文治)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좋은 벼슬을 주고 남다른 대우도 하며 심지어는 잔치에서 꽃구경과 낚시까지도 꼭 내각 신료들과 함께 해왔다. 아울러 그들의 자질(子姪 아들과 조카) 형제까지도 모두 동참하도록 하면서 오직 사랑으로 대해 자리 전체가 즐거움에 싸여 해마다 되풀이해 왔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간격 없는 만남이라든지 그 영광이며 은총이야말로 지금까지 신하로서 그러한 기회를 얻기란 극히 어려웠으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바로 나의 타고난 성품이고 또 마음써 해온 터다. 몇 십 년 그래오던 것을 지금 중도에 폐지할 수는 없으니 이 자리에 오른 신하들은 각자 자신을 깨우치는 마음으로 오늘의 내 말을 잊지 말라.”하였다.
인재의 등용문으로 삼은 낚시터
정조가 이처럼 낚시를 매개로 종친과 사대부를 궁궐 안에 끌어들여 봄가을로 낚시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조가 죽음을 맞기까지 그의 뇌리를 괴롭힌 것은 양반 사대부들이 무리를 이뤄 당쟁을 일삼고 왕권에 도전하는 데 있었다. 선왕인 영조가 인재를 고루 선발해서 쓰고자 한 탕평책을 정조 역시 그대로 계승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균형의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못질해서 죽이던 현장을 궁궐 모서리에 숨어서 숨죽여 흐느끼며 바라본 정조다.
그 아버지가 죽는 현장을 바라본 정조의 나이는 11살(1762년 5월).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생의 나이에 왕실의 외척이 날뛰는 것이나 당쟁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그로서는 이씨 종친들과 규장각의 신진 학자들의 힘을 바탕으로 기존의 양반 사대부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실권위를 높이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묘지명에는 정조가 수원 화성(華城)으로 행차하던 모습을 기록한 부분이 있다. 정조가 화성행궁을 강행하면서 오가는 길에 지금의 달래내 쯤에서 쉬면서 낚시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낚시를 화합의 정치, 탕평의 정치, 민본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노동쟁의가 잦던 1980년대 중후반. 일반 기업체 가운데 사원들의 낚시 및 등산활동이나 기타 레저 스포츠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곳들이 여럿 있었다. 낚시로 노사간 화합을 다지기 위한 전략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노사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회사의 규모를 한층 키운 사업체가 여럿 있다. 그 사업장의 대표는 진실로 현명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으며 정조에 버금가는 슬기로움을 타고난 사람이었다고 할 만하다.
시대를 달리해가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체제와 제도는 다를지라도 인간의 심성은 변함이 없다. 낚시를 화합의 통치술로 응용한 군주 정조의 낚시를 살펴보면서 지금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언젠가 큰 손 가운데 ‘머슴론’을 들먹여 전국의 월급쟁이를 분노케 한 머저리 사장이 있었다. 사업은 내가 하는 것이고 너희는 머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으로 나 혼자 잘 먹고 너희는 월급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업자들은 정조의 낚시를 잘 이해하기 바란다.
나아가 지금의 정치하는 이들이 정조의 낚시에 대한 생각과 통치술을 조금이라도 본받는다면 최소한 내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입으로만 외치는 꼴만은 면할 수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