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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기타/낚시

낚시에 대한 단상(2)-강태공(姜太公)과 낚시

 

흔히 사람들은 낚시꾼을 통칭 부를 때 강태공이라 한다. 왠일일까? 그는 과연 얼마나 낚시를 잘 하는 고수였기에 수많은 세월을 지나 오면서 아직도 낚시인의 별칭이나 혹은 애칭으로 불리워지고 있는가?


강태공(姜太公), 기원전 12세기경. 중국 주(周)왕조 시대의 실존인물로서 염제의 후손으로,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별칭은 여상((呂尙)으로써 속칭 태공(太公) 또는 여망(呂望)이라고도 한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속칭 강태공(姜太公)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그 후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시조가 되었다.


본래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춘추전국시대터 한(漢)나라시대에는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

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후세에 전략과 전술을 내용으로 하는 병서(兵書)인 《육도(六

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일화나 고사가 많고 특히 그의 저서 육도에 기록된 명언들이 전하

고 있다.


  

<<  보통 "강태공"이라고 불리는 태공망 "여상"은 주나라 문왕인 서백창에 의해 등용되어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었다. 여상은 젊어서는 공부에만 힘쓰고 집안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늘 그런 상태이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이런 남편을 바라보고 살다가 마침내 지쳐 달아나고 말았다.

한편 인재를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서백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위해 점을 쳐 보았다.

점괘는 대길이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교룡도, 범도 아니다. 얻는 것은 왕을 보좌할 인물이로다."

서백은 내심 기뻐하며 이리저리 달리며 사냥을 했다. 그러나 이날 따라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수레는 어느 새 위수 가에 다다라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흰 백발 노인이 홀로 앉아서 낚싯대을 던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저 그 노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못 본 척하고 낚시질만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서백은 그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서백은 그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곁에 가서 말을 걸어보니 놀랍게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슬그머니 낚시대를 들어보았더니 바늘이 없고 실만 메어 있었으며 잡은 고기도 없고 고기 넣는 대바구니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서백은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왔다. 이 사람이야말로 큰 야망을 꿈꾸며 세월을 낚고 때를 기다리는 자로다 하며 그 노인이 낚시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다 마침내 목도삼배로 공손히 스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의 조부인 고공단보께서는 세상을 뜨기 전에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도와 주족(주나라 백성)을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바로 그 사람 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 노인이 바로 여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백은 여상을 스승으로 받들었고, 여상은 서백을 도와 주나라를 위해 일하여 마침내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여상은 주 문왕의 조부(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호하여 불려졌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여상과 서백의 운명적 만남의 유명한 일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후로 낚시하는 사람을 태공망(太公望) 혹은 태공(太公)이라 후세인들에게 불리워�다. 


***비록 서백창이 강태공을 얻어 그해 망해 가는 주나라를 거머쥐게되고, 군사 책사인 강태공의 정치조언 하에 주나라가 다스려졌다는 사적 기록이 전하여지지만 결국 진정으로 천하를 거머쥔 자는 서백창이 아니라, 먼 훗날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기 위하여 원대한 꿈을 낚고 세월을 기다렸던 강태공이었다. 


이 일화 속에서 보여주는 강태공의 낚시를 잠시 우리는 유추해 보자.

학식은 높으나 관직과 벼슬을 마다하고 백발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저 허송 세월을 보내면서 마침내 가산이 탕진되어 가정이 곤궁에 처하자 아내마저 가출해 버리는 처참한 처지에 놓인 여상. 과연 그는 무엇으로 자신의 처절하고 비참한 노년을 위로하고 있었을까? 그게 낚시였을까? 그에게는 낚시가 현실도피의 탈출구였다는 것일까? 아니리라. 그렇게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낚시꾼이 아닌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어부가 �어야 한다. 아니면 고위관직의 벼슬을 택하여 부귀영화를 도모하였으리라.

그러면 그는 왜 낚시로 세월을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을까? 아마 그는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자연의 순리에 송두리째 내맡긴 채 인격도야를 위한 치열한 인고의 시간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수 많은 세월 속에서 자연과 혼연일치된 자아의 해탈한 모습이 물가에 드리운 낚시대와 더불어 득도한 도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푸르른 물위에 비추게 되었으리라. 물속에 노닐고 있는 고기들을 혜안(慧眼)으로 보았으니 미끼나 바늘이나 낚시바구니가 뭐 필요했을까. 잡거나. 낚거나, 어디서나, 어느 때나 마음만 가지면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낚시를 통하여 그는 오묘한 자연의 법칙과 그에 순응하는 진리를 깨닫고, 고기를 낚는 기법으로 비범한 용병술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인격도야를 연마함으로써 점차 득도(得道)하여 선인(仙人)의 길로 접어 들었으리라.


 진정 한가롭게 물가에 펼처 놓은 바늘없는 낚시대는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일평생 낚시를 통하여 원대한 꿈을 가꾸어 오면서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인격도야의 세월’을 낚은 것이리라.


그의 낚시야말로 단순히 고기를 낚는 일차원적인 청빈락도(淸貧樂道)가 아니요 세월을 미끼로 천하를 낚아 낸 최고의 형이상학적 고난도 낚시였음에랴!!  ***


가희 낚시의 최고봉인 ‘조선(釣仙)‘의 경지로고!!!


“군자는 자기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기뻐하고, 소인은 눈앞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한다.” -강태공의 육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