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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언어 귀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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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언어 귀족주의


민주주의란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을 믿는 바탕 위에서 성장한 이념이다. 국왕이나 귀족의 생각이 일반 민중의 생각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그런 곳에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밀하게 나뉘게 된다. 중세 이전의 유럽의 성직자, 귀족 등 지배층은 라틴어라는 언어적 도구를 이용하여 일반인이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쳤다. 루터는 이런 언어 장벽을 거둠으로써 일반인도 신의 말을 읽고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지식이 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일반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생긴 것이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이런 통로가 잘 닦인 곳부터 차례로 일어나서 발전해 나갔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갈라 놓는 언어 사용

동양에서는 한자라는 글자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았다. 중국이 대단한 문명을 일으켰지만 지금도 수많은 민중은 글자 문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중국에 발을 붙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나 일본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은 한자가 자기 말과 맞지 않아서 더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자국어를 철저히 활용하는 방법으로, 한국은 한글이라는 글자를 이용하여 민중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20세기 이후 한국처럼 역동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가 발전한 나라는 없다. 한글이 지식을 급격하게 대중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겨우 한자의 장벽을 거두어 가는 시점에서 국민과 정부, 소비자와 기업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새로 설치되고 있다. 새로운 장애물은 영어라는 장벽이다. 정부와 기업은 영어를 아는 자와 영어를 알지 못하는 자, 영어를 사용하는 자와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 점점 깊은 골을 파고 있다.

민주주의는 일반 민중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는데 정부와 기업이 영어를 지나치게 강요함으로써 일반 민중보다는 소수 영어 능력자에 좌우되는 비민주적 사회로 떨어질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한자로 대변되는 구파와 영어로 대변되는 신파 또는 이들을 합친 언어 귀족주의자들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대학을 나온 자나 나오지 못한 자나 관계없이 영어를 아는 자가 아니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시기가 올지 모른다. 과연 그것이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일까?

28년 전인 1979년 영국에서는 신기한 운동이 하나 일어났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쉬운 영어 운동(Plain English Campaign)’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운동인데, 이 운동을 시작한 ‘크리시 마허’라는 여성이 이런 주장을 했다. “우리는 공적 정보를 민중이 듣거나 읽어서 즉시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게 적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는 정부, 기업 등의 공적 의사표시를 국민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정확한 이해 없이 민주주의는 설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관계는 소통에 의존한다. 어려운 글은 소통에 걸림돌을 만든다. 정부처럼 큰 기관이 일반인과 소통을 할 때 오해가 생긴다면 그 피해는 엄청나다. 많은 경우에 뽐내는 단어, 복잡한 문장, 끝없이 긴 글은 간결성과 투명성을 소멸시켜 그런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쉬운 영어 운동’, 공적 정보를 국민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요즘 고위 공무원들은 공적 의사표시에 영어를 쓰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영어 약자를 사용한 정부 계획서가 난무하고, 영어 약자를 사용한 공사 이름, 행사 이름, 산하단체 이름이 쏟아지고 있다. 문화관광부가 ‘한 스타일(Han Style)’을 육성하겠다고 하는데 국민들이 이런 말을 쓰거나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대학로 문예극장 이름을 ‘아르코예술극장’으로 바꿨는데 무슨 극장인지 더 어렵게 되었다. 노동부는 기능대학을 ‘한국폴리텍대학’으로 바꿨다. 그래서 한국폴리텍여자대학, 한국폴리텍바이오대학 등 듣기 거북한 대학 이름들을 양산해 놓았다. ‘폴리텍대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행정자치부는 정부중앙청사 현관에 ‘INNOVISION’이라는 거대한 간판을 내걸고 정부의 혁신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영어 아는 사람들끼리만 혁신하면 되는 일인지 모를 일이다. 정보통신부는 “행복한 U-Life와 함께 하는 U-Korea 실현”이라는 표어로 목청을 돋우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외교통상부에는 ‘외교 CyWatch’라는 모임이 있는데 시민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모임인 것 같지만 시민들이 참여하는 모임을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서울시가 ‘Hi Seoul!’이라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인사를 하고, 시민들의 발을 ‘서울 메트로’라고 바꾸고, 산하 공사 이름을 ‘SH공사’라고 바꾼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꾼 사람들은 어깨를 으스대고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은 그것을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국가 정책을 따라가자니 힘들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그러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다. 크리시 마허의 생각을 원용한다면 우리 공무원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행할 의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은 배운 자들이 세우는 것이고, 정책을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하려면 영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사회 건설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들에게 과감히 맞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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