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正言)이라 쓴 명정 길게 펄럭이며 丹 悠揚寫正言 가을 바람에 마른 풀 언덕으로 향하는구나 秋風衰草赴高原 … … 용혈(龍穴)의 봄놀이 어제 같구나 龍穴嬉春事隔晨 옥같은 낙지에 은빛의 생선회였네 絡蹄如玉 如銀 누군 죽고 누군 살았다 구별말세 誰生誰死休分別 그 당시에 벌써 끼리끼리 모였었네 已作當分一隊人 다산에 통소와 북소리 요란하게 들릴 적에 茶山簫鼓鬧芬華 머리에 쌍갈래 어사화를 꽂았었네 頭揷雙條御賜花 잔치 벌리던 주변의 몇 그루 버드나무엔 演 場邊數株柳 헤어질 때 벌써 황혼 까마귀 날아들었네. 別時已復集昏鴉 [윤정언만사(尹正言挽詞)]
외동딸의 시아버지이자 다산의 평생친구인 정언 벼슬을 했던 윤서유의 죽음을 슬퍼한 만사(挽詞)라는 시입니다.
다산보다 두 살 아래의 윤서유는 53세이던 1816년 가을에야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합니다. 55세이던 다산은 한창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과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시절입니다.
두 집안, 정씨와 윤씨 집안의 인연은 참으로 끈끈했습니다. 윤서유의 아버지 윤광택(尹光宅)은 다산의 아버지 친구로 이름난 부호인데다 베풀기를 좋아해 퍼주기로 유명한 자선가였습니다. 그 아들은 다산과 동년배인 평생의 친구로 유배사는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강진에 거주했습니다. 윤서유의 아들이 윤창모(尹昌模),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글을 배워 진사(進士)에 오르고 끝내는 다산의 사위가 됩니다. 그 사위의 아들, 즉 다산의 외손자가 윤정기(尹廷琦), 외할아버지 무릎 아래서 소년시절에 글을 배워 온 나라에 큰 이름을 얻었던 다산풍의 실학자가 된 분입니다.
호가 방산(舫山)인 윤정기는 커서는 외숙인 다산의 큰 아들 정학유에게도 글을 배웠습니다. 4대에 걸친 정씨와 윤씨의 인연, 베풀기를 좋아하던 부호인 윤씨들 덕택에 다산은 불편없이 넉넉하게 유배지에서 학문을 대성할 수 있었고, 그런 덕분에 혼사를 맺은 윤씨네는 아름다운 명성을 세상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강진의 명승지 용혈에서 노닐었고 생선회를 대접받았던 추억으로 슬픈 애도시를 쓴 두 사람의 우정은 200년이 지났어도 따뜻하게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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