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귀양살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해남의 대흥사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 곳입니다. 뒷날 대흥사의 대종사(大宗師)로 조선왕조 불교계의 마지막 거성이던 초의선사는 젊은 시절에 다산을 찾으며 학문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산과 초의는 사제의 사이였습니다. 초의선사가 선승이며 학승이자 다성(茶聖)임도 잘 알려진 일입니다.
더구나 초의는 다산의 둘째 아들이자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알려진 정학유(丁學游)와는 동갑의 나이이고, 당대의 학자 추사 김정희와도 같은 나이의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다산의 큰아들 학연(學淵)은 그들보다 세 살 손위여서 그들은 모두 동년배 친구로 참으로 가까이 어울리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함께 마시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후기 유교와 불교가 만나고 학문과 예술이 합해지고 시와 서예가 혼합하여 아름다운 문화가 꽃피던 시절이었습니다.
1830년의 마지막인 섣달그믐의 제야(除夜)에 다산의 집에 다산의 제자들이 모였나봅니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도 모처럼 선생을 뵈러 찾아왔고 서울의 제자 이강회(李綱會)도 찾아와 내일이면 고희를 맞는 다산선생과 회고의 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제자들에게 시를 한 수씩 증정했는데, 초의에게 준 4자시(四字詩)가 멋있습니다.
축 늘어진 풀옷(艸衣)에 草衣 풀어헤친 벗겨진 머리 禿髮 너의 불교의 외피 벗겨버려 剝爾禪皮 너야 선비의 골상 드러냈도다 露爾儒骨 옛 거울 이미 갈고 닦았고 古鏡旣磨 새로운 도끼 무디지 않으니 新斧非  밝은 별처럼 깨달음 보여줘 見明星悟 새로 보이는 달빛 그거로세 是第二月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70의 나이를 맞은 노인 다산은, 도를 이미 얻어 높은 스님에서 뛰어난 유자(儒者)로 오른 제자의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시를 지어주었습니다. 불교와 경전에 밝았기에 고경(古鏡)은 이미 갈고 닦았고 한시에도 뛰어나 새로운 도끼도 예리하다니 옛 학문에 새로운 학문도 뛰어나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생이 많이 남지 않은 스승을 찾은 제자의 마음도 아름답고, 제자의 수준을 충분히 인정해준 스승의 뜻도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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