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따라 용하다는 점집에 갔다온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점쟁이가 그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뜸 "너 애인 있지?"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집안 잘 돌보며 살고 있는 그 친구가 워낙 참하고 얌전해서 에이, 설마, 싶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 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역시 캐묻지는 않았지만, 점쟁이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점쟁이는 왜 위압적인 반말을 내지르는 걸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족집게처럼 잘도 알아맞추는 용한 점쟁이에 대한 탄복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무당이든 도사든 점쟁이든 다른 사람의 길흉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왜 한결같이 위압적으로 반말을 내지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반말을 쓰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거나 그런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남자들 사회에서, "우리, 말 트고 지내자" 라고 제안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한 가지는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거나 그런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군대에서 상사는 부하 사병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반말은 권위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권위를 생성한다. 때로는 위압적일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반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간의 친밀감을 공유하거나 상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길흉화복의 점괘를 내는 사람들이 반말을 쓰는 연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신통력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자연스러운 화법.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말의 권위를 앞세우고, 그러면서도 고객에게 남다른 관심이나 애정을 품고 있다는(당신의 운명을 알려주고 좋은 길을 제시해 줄 정도로)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반말을 구사한다. 일반적으로 점술가들의 말을 신통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바넘 효과(Barnum effect)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선언을 자기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폭풍을 잘 견디면 밝은 날이 온다, 가까운 사람을 조심하라, 같은 경구조차도 자신의 운세로 주어졌을 때 꼭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위압적인 반말은 바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던지는 반말은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이름이 꽤 많이 알려진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면 간혹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메시지를 잘 전달하려는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설교 중에 청중들을 향해 반말을 던질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기분이 좀 묘해진다. 특별할 것도 없는 관찰이지만, 대개 신령함을 강조하거나 영적인 힘을 내세우는 경향을 가진 분들에게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점괘를 든 사람이 반말 화법을 구사하는 동기와 이런 목회자들의 동기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신통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지배받고 있는 성직자에 대한 안타까움도 생긴다. 점괘를 내미는 점쟁이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신통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화법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성직자들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성직자들의 권위는 신통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권위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신통력 효과라는 저급한 동기에 의지하려고 한다면, 그런 분은 그것 말고는 자신의 권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지(점쟁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혹시 성경 속의 예수님의 언어를 흉내내느라고 반말을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 첫째로 예수님과의 동일시 욕망은 그것 자체로 불경이고 오만이며, 두번째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반말을 썼을 거라는 가정이 근거 없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나 예수님이 실제 사용했던 아람어에 존댓말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공손한 표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또렷한 우리말로 옮길 때 이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의 모든 말이 반말로 번역된 것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거북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예수님에게 신적인 권위가 이미 부여 되어 있고, 읽는 이는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예로 든 극히 일부의 '신령한' 성직자들의 반말 화법이 성경 속 예수님의 언어로부터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없지 않다고 보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경어로 바꾸는 새로운 번역 성경의 제작과 보급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천주교쪽에서 나온 200주년 신약성경을 보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가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적어도 이런 성경 본문을 읽고 설교하는 목사가 청중들에게 반말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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