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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서학(西學)과 서교(西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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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西學)과 서교(西敎)


다산의 글을 읽어가다 보면 정조대왕의 훌륭함을 금방 알아낼 수도 있지만, 당시 정조대왕을 보필하면서 이른바 ‘문예부흥기’를 만들어가던 학자들의 뛰어남과 선진적인 생각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높은 벼슬인 영의정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서학(西學)에 관심을 기울이던 일군의 진보적 학자들을 보호해주던 번암 채제공(蔡濟恭) 같은 학자정치가를 비롯하여 정헌(貞軒) 이가환(李家煥 : 1742~1801)이라는 석학(碩學)이 곁에 있으며 치세(治世)를 이루는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1799년 공서파(攻西派)들이 더욱 세력화하면서 신서파(信西派)를 공격하던 무렵, 신서파를 적극 옹호하던 채제공이 세상을 뜨자, 힘을 합해 정조를 돕던 이가환은 더욱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을 제대로 받아들여 과학사상을 널리 보급하려던 정조의 뜻은 꺾이지 않아, 수리(數理)와 역상(曆象)의 원리를 밝힐 수 있는 책을 편찬하려는 마음으로 장차 연경(燕京)에서 책을 사오게 하려고 정조는 수리와 역상의 전문가 이가환에게 친필로 자문을 구하는 글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시속의 무리들이 식견이 워낙 어두워 수리(數理)가 어떤 학문인지, 교법(敎法:西敎)이 어떤 법술인지 알지 못하고 혼동하여 꾸짖고 호통치는데 이제 이런 책을 편찬한다면 저에게 더욱 비방의 소리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위로 임금님의 덕에 누를 끼칠 것입니다”(流俗貿貿 不知數理爲何說 敎法爲何術 混同嗔喝 今編是書 不唯臣謗益增 抑將上累聖德 : 貞軒李家煥墓誌銘)라고 이가환이 임금에게 답변하여 일이 끝나고 말았다고 다산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然上以爲不必然也 : 上同)라고 했던 점을 보면 정조나 다산, 이가환등 신서파에서는 서교인 천주교와 서학인 서양의 과학기술이론은 분명하게 구별하여 확실하게 선을 긋고, 서교에는 손을 떼고, 서학에는 큰 이로움이 있다고 믿고, 적극 연구하고 보급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서학과 서교도 구별 못하고 서학의 책만 읽어도 천주교도로 몰아 죽이고 탄압하던 벽파나 공서파들의 역사적 죄악은 어떻게 해아 면할 수 있을까요. 다산과 이가환의 입장은 서교보다는 서학에 경도되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