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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신유교옥(辛酉敎獄)과 갑신(甲申)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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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교옥(辛酉敎獄)과 갑신(甲申)개혁


서교(西敎)와 서학(西學)을 구별도 못하고 정치적 반대파들의 몰락만을 추구하던 정조시대의 벽파(派)와 공서파(攻西派)들은 1801년 신유옥사를 일으켜 300여 명의 백성들을 죽였다고 「황사영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해가 1801년이니 쇄국정책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開化)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1884년인 갑신년에 일어난 갑신개혁의 시기까지는 무려 80년이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요즘 강재언(姜在彦)교수의 옛날 논문을 읽으면서 이런 80년의 세월동안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창조적으로 우리나라 학문과 사상에 접목시킬 길이 막혀서 근대화의 길도, 나라 발전의 활로도 폐쇄된 불행으로 망국의 아픔을 당했다는 주장을 읽다보니 정말로 수긍할만한 논리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른바 신서파라는 이가환, 정약용 등의 논리가 천주교도로 둔갑되어 죽고 귀양 가는 불행 때문에, 80년이 넘는 암흑기를 맞이해 쇄국정책의 어리석음으로 망국에 이르고 말았으니 얼마나 불행한 역사였습니까.

이가환은 신유옥사에 목숨을 잃었고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서학사상의 연구를 쉬지 않고 탁월한 주장을 펴는 저서를 썼습니다. 『경세유표』를 읽어보면 눈물겨운 서양의 과학사상 보급의 주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새로운 정부부서를 새로 설치하여 중국을 통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나라에 과학기술을 발전할 방도를 전문적으로 강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공업기술의 정교함은 모두가 수리학(數理學)에 근본을 두고 있다”(百工之巧 皆本之於數理)라고 말하면서 기하학(幾何學)이나 수학(數學)의 원리에 밝아야만 공업기술은 발달할 수 있다는 탁견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호조(戶曹)에 있는 산학(算學)기관도 ‘산학서(算學署)’로 독립시켜 전문적으로 산수를 가르치고 배워 그 수준을 적극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강재언교수는 이런 탁월한 다산의 학문이 현실정치에 반영되지 못해 국가정책으로 자리 잡지 못한 점이 바로 나라가 망하고 근대화에 뒤진 것으로 보았으니 타당한 견해가 아닌가요.

과학기술의 발달을 위해서는 수리학, 즉 수학의 연구가 절대 필요하다던 다산의 주장은 지금에도 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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