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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금강산으로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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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으로 떠나며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남북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1998년 6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몰이 방북행사를 연출하고 이어서 그해 11월 18일 현대 금강호가 관광객을 싣고 첫 출항에 나선 이래 벌써 100만 명이 훨씬 넘는 남쪽 시민들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북녘땅을 밟는 일 자체가 국가안보를 해치는 범법행위라고 뇌리에 입력되어 있던 우리들에게는, 비록 제한된 구역 안에서 일정한 통제를 받으며 하는 것이라 기대에 너무 못 미치기는 하지만,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의 의식을 짓눌러 온 금지와 강제로부터의 상징적 해방인 셈이었다.

 
남과 북, 해외 문인들을 포괄하는 문학인 단체를 결성하고자
 
그런데 내일 아침 문학인 50여 명과 함께 금강산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 글을 초하는 내 마음은 해방감보다는 중압감이 더 크다. '6.15민족문학인협회'의 결성을 위해 우리 문인들이 북한으로 간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더구나 내 이름이 남쪽 대표단 단장으로 알려지자, 친척들 중에는 걱정하는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동료교수는 북에 가더라도 절대 춤판에는 끼지 말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잠시 경위를 소개하면, 작년 7월 남-북-해외의 문학인 200여 명이 평양과 백두산 등지에서 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민족작가대회’라는 이름의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그때 작가대회에서 채택된 결정들 중의 하나가 남과 북 및 해외의 문인들을 포괄하는 단일한 문학인단체를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여곡절 끝에 그 결성식을 하러 금강산으로 떠나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한 까닭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지난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조성된 새로운 한반도정세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핵실험 이후 유엔 안보리는 신속하게 대북제재를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은 북한에 대한 다양한 압박을 시도하면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를 위한 해상검색에 한국이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여러 차례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천명했지만, 북한은 전면적 제재가 사실상의 선전포고라고 주장함으로써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일촉즉발의 험악한 정세 속에서 문인들이 한가한 목적을 위해 금강산에 모인다는 것은 현실을 망각한 철부지 같은 짓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 남쪽 문인들의 금강산행은 북한의 핵실험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용인하는 것 아닌가, 설사 주관적으로 북핵찬성의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북의 선전공세에 이용될 가능성은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과거와 같은 냉전시대라면,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거꾸로 북의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6.15민족문학인협회’결성을 주도해 온 남쪽 문인들이 시종일관 핵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 왔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예로서, 지난 10월 16일 소설가 정도상씨가 작성하여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을 위한 남측조직위원회 일동’의 이름으로 동료작가들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조직위원회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비핵화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같은 위험한 방법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다양한 형식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체제안정과 한반도 평화정착을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렵게 싹튼 동포들 간의 화해와 신뢰의 불씨 살려야

물론 대화를 통해 체제안정이 보장될 것이 확실하다면 북한이 대화를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보기에 미국의 목표는 북한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북한체제의 붕괴이고,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 그것은 북한 지도부의 지나친 피해망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195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남한 지역에 배치됐던 수많은 미군 전술핵 때문에 핵공포에 떨어야 했던 북한으로서는 핵카드의 미련을 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걸었던 길을 결코 걷지 않겠다는 것이 북한 당국의 불변의 결의라고 한다면, 우리 민족 앞에는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 같은 위험이 상당기간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남북의 문인들이 만나 하나의 단체를 만들고 ‘문학의 밤’ 행사를 열어 시와 산문을 바꿔가며 낭송하는 것은, 마치 쿠데타군의 탱크 앞으로 어린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나아가는 행위처럼 무모하고 천진난만해 보이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무력도발의 당사자들 모두에 대한 비폭력의 저항이고 평화에의 호소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남과 북의 정치체제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문인들의 몫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적대관계를 넘어 마침내 싹튼 남북 동포들 간의 화해와 신뢰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은 오늘 우리 문인들이 외면할 수 없는 임무이다. 그런 꿈을 갖고 이제 우리는 떠난다.

 

글쓴이 / 염무웅
· 문학평론가
· 영남대학교 교수
· <창작과비평> 발행인, 민예총 이사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 역임
· 저서:<민중시대의 문학><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