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지만 강한 실학자, 이덕무
신 병 주(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코드인사’ 문제로 바람 잘 날 없는 요즈음의 정국에서, 정조시대의 ‘발탁 인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조는 노론 보수 세력의 계속된 방해 때문에 힘겹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조를 후원해줄 세력은 거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조가 추진한 사업이 규장각의 건립이다.
개혁정치를 위한 참신하고 검증된 인사를 찾아 왕실도서관이자 학문연구소, 그리고 개혁정치의 산실로 규장각을 활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규장각을 채울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정조는 기존의 노론 세력을 대신할 수 있는 참신하고 검증된 인사들을 하나씩 찾아 나섰다. 남인 실학자의 대표주자 정약용이 개혁 정책의 선봉에 섰고, 노론 출신이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아픔 때문에 좌절하고 있었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규장각 검서관을 맡음으로써 정조시대의 새 얼굴이 되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정조시대를 뒷받침한 대표적인 실학자였지만, 정약용이나 박지원, 박제가에 비해 지명도는 떨어진다. 그러나 실제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편찬사업은 그의 머리와 붓끝에서 이루어졌다. 『국조보감 國朝寶鑑』, 『갱장록 羹墻錄』, 『문원보불 文苑 』, 『대전통편 大典通編』, 『송사전 宋史筌』, 『규장전운 奎章全韻』과 같은 책들은 정조와 그의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덕무는 조용하지만 강한 학자였다. 스스로 ‘책에 미친 바보(看書痴)’라고 할 정도로 온갖 서적을 두루 읽고 이해하였다. 경사와 문예로부터 경제, 제도, 풍속, 서화(書畵), 금석(金石), 도서(圖書), 조수(鳥獸), 초목(草木)에 이르기까지 탐구하고 고증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이 시기 실학풍의 두드러진 특징은 백과전서를 포괄하는 박학풍이었다.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절충하려는 학문적 흐름은 조선사회가 보다 개방적으로 나가게 하는 힘이었다. 17세기의 『지봉유설』과 『반계수록』을 거쳐, 18세기의 『성호사설』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는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대표하는 책이 되었다.
정조는 자신과 호흡을 맞추어 가며 편찬사업을 주도하였던 이덕무를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그러나 1796년(정조 20) 이덕무는 53세의 나이로, 정조의 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정조는 그의 아들 이광규로 하여금 검서관을 삼고, 각신(閣臣:규장각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실의 내탕금으로 이덕무의 유고(遺稿)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아정유고』8권으로서 윤행임, 남공철, 박지원 등 당대의 명류들이 문집 편찬에 참여했다.
정조시대 학문과 문화를 정리하는 사업에 주도적 역할 이덕무의 박학풍은 아들 광규를 거쳐, 손자인 이규경에게 이어졌다. 19세기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대표하는 이규경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는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규장각과 인연이 깊은 집안 분위기 덕분에 동서고금을 막론한 많은 책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할아버지의 저술 『청장관전서』는 『오주연문장전산고』 저술에 전범이 되었다.
‘자신의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는 ‘청장(靑莊)’을 호로 삼으며, 일생을 학문 속에 파묻혀 청렴하게 살아간 이덕무. 그러나 그의 학문은 조용하게 묻힌 것이 아니었다. 박학과 개방이 요구되었던 정조 시대, 그는 조선의 지성계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확실히 제시하였다. 학자군주 정조와 호흡을 맞추어 조선후기 학문과 문화를 정리하는 사업을 주도하였고, 가학을 통해 계승된 그의 학문은 손자에 의해 근대를 준비할 수 있는 학문체계로 발전했다. 39세로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정조에게 발탁되었지만, 이덕무는 숨겨진 그의 역량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발휘하였다. 그의 학문은 조선후기 백과전서적인 실학풍이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소리만 요란했지 알맹이가 없는 인사들이 반복되는 요즈음이라서 그런지 이덕무와 같은 내실 있는 학자가 보다 그립게 느껴진다.
글쓴이 / 신병주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