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그는 당시 국무총리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그해 12월 6일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1979년 12월 12일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이 일어났고, 1980년 5월 18일에는 저 끔찍한 광주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10·26이 가져다준 ‘서울의 봄’을 얼어붙은 겨울로 만든 신군부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서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그해 8월 돌연 하야(下野) 성명을 내고 8개월간의 대통령직을 마감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단명한 대통령이었다.
침묵으로 진실 규명 외면 그 후 군사정부가 물러가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12·12와 5·18의 진실 구명(究明)을 위한 노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진실 규명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대통령 재임시에도 급변하는 사태에 대해서 한 마디 말이 없었던 그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를 ‘용각산 대통령’이라 불렀다. 당시 용각산 광고에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를 용각산에 빗대어 비꼰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의 26년 동안에도 검찰의 조사를 거부하며 철저히 용각산임을 고수(固守)했다.
12·12와 5·18 사건 수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병국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최 전 대통령은 검찰의 조사 요구를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로 완강히 거부했다”고 했다.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고 나는 그의 한문 실력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항룡유회라는 말의 본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항룡유회’는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의 건괘(乾卦)에는 4가지 모습의 용(龍)이 나오는데, 잠룡(潛龍), 현룡(見龍), 비룡(飛龍), 항룡(亢龍)이 그것이다. 용은 양기(陽氣)의 상징으로 임금에 비유된다. 잠룡은 물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며 장차 비상(飛翔)을 준비하는 용이고, 현룡은 세상에 나타나서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는 용이며, 비룡은 드디어 때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의 지위에 오른 용이다.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가서 내려올 수 없는 용이다. 비룡은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에 해당한다. 요임금은 자기 자식이 아닌 순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순임금 역시 자기 자식이 아닌 우(禹)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그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임금이었다. 반면에 항룡은 나아갈 줄만 알았지 물러날 줄을 모르는 용이다. 자기의 지위가 영원할 줄 알고 끝까지 올라가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용이니 폭군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 종국에는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용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항룡의 상태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그가 진심으로 후회했다면 최 전 대통령이 항룡(亢龍)의 본뜻을 알았다면 자신을 항룡에 비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대통령으로서 신군부의 전횡(專橫)을 견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한 듯한데, 그가 진심으로 후회했다면 역사적 진실을 밝혀 진심으로 참회했어야 한다. 또 8개월 만에 사임한 것으로 자신의 과오를 어느 정도 씻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사임이 군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건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용각산임을 자처하고 ‘모르쇠’로 일관한 그의 자세와 『주역』의 “항룡유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짧은 기간이나마 대통령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장을 치러 주는 것은 좀 과분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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