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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정약용과 일본지도

제23호 (2006.11.15)


정약용과 일본지도

 


배 우 성(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98년 <일본여도>라는 소설(김완식 저)이 출판되었다. 책의 표지에는 ‘우리민족 최초의 일본본토 정벌사’라는 큰 글씨 옆으로 그만큼 선정적인 문구가 붙어 있다. “선남후북벌(先南後北伐). 청을 정벌하기 위해 먼저 일본을 친다. 숙종의 특명을 받고 일본에 밀파된 48인의 젊은 무사들. 그들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은?” 작가는 대학 재학시절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에서 한 장의 일본지도과 운명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한다. 작가는 숙종이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정보를 수집해 오게 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윤두서에게 일본지도를 그리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설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과연 숙종은 남벌을 위해 일본에 첩자를 보냈을까?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윤두서의 <일본여도>를 둘러싼 미스터리


윤두서가 일본지도를 그렸다는 것을 빼면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윤두서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해남 가까운 강진 땅에 그의 외증손이 유배되어 왔다. 다산 정약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18년의 유배기를 보내야 했지만, 그 시간 동안 빛나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정약용은 이 과정에서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한 여러 서책들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문제의 일본지도를 본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정약용은 서울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을 출입했었다. 그런 그가 규장각에서조차 본 적이 없던 일본지도를 해남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군현, 역참, 도리, 도서, 육로, 해로 등에 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지도의 상세함에 놀랬다. 그는 이 지도가 임진왜란 때 퇴각하던 일본인이 남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과연 그럴까?

정약용의 추정과는 달리, 윤두서의 일본지도는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이라는 일본지도를 베껴 그린 것이다. <본조도감강목>은 1687년 (貞亨 4)에 일본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일본전도이다.

일본전도 가운데 이른 시기부터 널리 보급된 것은 <행기도>라는 지도이다. 이 지도는 이미 조선 초기에 수입되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지도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 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윤곽이 개선된 일본지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오랫동안 새로운 일본지도는 조선에 수입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약용은 해남에서 본 일본전도를 임진왜란 때의 일본인이 남긴 지도로 오해한 것이다.

일본에서 일본전도 출판이 활발해진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서서였다. 이 지도들은 통신사의 수행원들이나 왜관의 장사치들을 통해 조선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 <일본해산조륙도(日本海山潮陸圖)>, <일본원비도(日本圓備圖)>등이 있다. 윤두서는 이것들 중 <본조도감강목>의 사본을 보고 베껴 그렸던 것이고, 그 사본이 녹우당에 남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약용의 지도관(地圖觀)


<본조도감강목>은 당시로서는 최신의 일본지도였지만, 오늘날의 관점에 보면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이 지도에서 일본 본토는 동서로 길게 묘사되어 있으며 남북방향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정약용은 이 지도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형상이나 홋카이도의 위치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당대의 어떤 학자보다도 정확한 지도 제작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 정약용은 이렇게 주장했다.

“무릇 지도를 만드는 법에 있어서 한결같이 지지에 기록된 거리를 따라 해야 할 것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반걸음은 어긋나지 않더라도 필경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될 근심이 있을 것이다. 곤여도(坤輿圖)와 같이 경위선(經緯線)을 그린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천리를 그릴 때 그 네 꼭지 점에 대해 먼저 지지를 살펴서 꼭지 점까지의 거리를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종횡으로 5,000리가 되는 지도를 그린다면 남북을 5층(層)으로 하고 동서를 5가(架)로 하여, 먼저 그 층(層)과 가(架)의 경계가 되는 선에 대해 네 꼭지 점에 이르는 거리를 바르게 한다면 천리가 되는 한 구역 내에서 군현과 산천을 분배하고 늘리고 줄이는 데 크게 잘못될 근심은 없을 것이다.”

정약용의 이 주장은 영정조대 지도제작의 성과가 19세기 김정호에게 연결되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정약용이 정확한 지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은 국방과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공저), 돌베개, 1999
          『조선중기의 정치와 정책』(공저), 아카넷,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