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 양(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천하는 세력으로 움직여질 뿐이다.[天下勢而已]”-현실의 세력 판도에 밀린 도덕, 양심, 예술, 문화, 지식...등등의 무기력함이 몽땅 응축되어 한숨으로 새어나오는 듯한 이 말-. 이 한마디 말을 무의식중에 중얼거려 보는 순간이 있다. 2003년 8월 초,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조선조에서 중국으로 사신 가던 노정을 그대로 따라서 답사했을 때였다. 그때 압록강에서 요동까지 가는 동안 중국이 시작하는 동북공정의 기운을 느끼면서 저절로 저 한마디를 되뇌이게 되었다. 암담하고 착잡한 기분으로 답사하다가 봉황성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연암의 깊디깊은 한숨소리를 들었다. 저절로 들려왔다. 그런데 그 한숨소리는 앞의 나의 한숨을 걷어내고 도리어 정신을 맑게 만들어주었다.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답사 이틀째 밤, 요양(遼陽)의 숙소에서 일행들이 답사 소감을 나누었는데, 나는 그때 내가 들었던 ‘연암의 한숨 소리’에 대해 얘기했다. 연암의『열하일기』 첫 부분인「도강록(渡江錄)」 6월 28일자에 있는,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오그라들었다[朝鮮舊疆, 不戰自蹙矣]”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 한마디는 내게 너무도 깊고 생생하게 들려왔던 연암의 한숨 소리였다. 그때 우리 일행의 인솔자이셨던 김태준 선생님께서 깊은 공감을 표하며 더 자세한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이틀 뒤에 간단한 세미나를 할 때 보니, 김태준 선생님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해 발제문(『연행의 사회사』(경기문화재단,2005)에 수록된 논문)을 준비해 오셨던 것인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성급히 소감을 말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이후로도 여전히 연암의 한숨소리를 간혹 듣곤 한다. 마치 신들린 듯이, 나도 모르게 연암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연암은 우리나라 선비들이 서적을 널리 보지 않고, 실제 현장을 고증해보지도 않고, 한 가지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편하게 믿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그런 일이 빚어진다고 했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고, 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아래 편집 주 참조)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의 기반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연암의 이 한숨은, 한줄기 맑은 정신의 힘을 드리운다. ‘천하는 세력일 뿐이다’에 맞서는 비결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그리고 한 개인이,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의 올바른 기반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현실의 무조건적인 힘의 논리를 방어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한숨이다. 이 연암의 한숨을 어떻게 나에게 내면화하고 실천으로 옮길 것인가, 그것은 여전히 절실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 편집 주
(연암이 인용한 글을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당서]
안시성←(5백리)→평양
[지지]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리,
개평현←(3백리)→수암하←(2백리)→봉황성(평양이라고도 부름)
☞ 연암이 연행길에 봉황성에 이르러 이곳이 안시성이라는 소개를 접한다. 이에 대해 연암은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니라 또 다른 평양일 수 있고, 안시성은 여기서 서쪽으로 5백 리를 더 가야 있다는 주장을 폈다. 어느 나라나 민족이 이동하면서 자기가 살던 곳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연암은 압록강 이남에 평양이 있기 전에 요동 땅에도 평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대세에 따라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 땅은 제외하고 압록강 이남에서만 평양을 찾는 안이한 자세를 한탄한 것이다.
글쓴이 / 이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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