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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차마 부끄러움 없이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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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부끄러움 없이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


내가 10.26사태와 관련하여 이미 고인이 된 박흥주 대령의 집을 찾아나섰던 것은 1986년 봄이었을 것이다. 박흥주 대령은 군인신분이라는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상사요 사건의 주범인 김재규 장군의 형이 대법원에서 미처 확정되기도 전인 80년 3월 6일, 소래의 야산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때 그에게는 아내와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 애가 대학에 들어갈 때 등록금으로 쓸 수 있도록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얼마의 돈을 은행에 신탁했었는데, 그 증서를 찾아들고 나는 길을 나섰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잘나가는 군인인데다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이 행당동 산동네 12평짜리 집에 사는 그 청빈은 당시 법정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서민아파트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산동네의 가난과 남루는 여전했다.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남의 집에서 일하다말고 달려온 그 부인의 거친 손에 한사코 싫다는 그 증서를 던지듯 맡기고 나는 그 비탈길을 뛰어내려왔다. 오랜만에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은 내게 그 뒤로 10.26사태를 연상하면 떠오르는 기억의 하나가 되었다.

최근 우연히 책을 읽다가 박흥주 대령이 바로 죽기 며칠 전, 죽음을 예감하면서 아내와 두 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나는 아무도 없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디 쥐구멍이 있으면 거기라도 들어가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두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주일(主日)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고 하였고,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요. 의연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라고 쓰여져 있었다.

두 딸에게 보낸 편지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모두 그것을 읽는 우리를 숙연하게 하거니와, 나는 특히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요”하는 대목이 목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도 남아 있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을 믿고 떠났는데, 남아 있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그의 남겨진 가족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그 말이 내 가슴을 칠 때, 나는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10.26사태를 생각할 때,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 나는 차마 부끄러움 없이는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74년 12월, 그 전 해에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치사당한 최종길 교수에 대한 추모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있었다. 최종길 교수의 부인 백경자 여사는 중앙정보부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어린 아들, 딸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참석했었다. 그때 아들 광준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그리고 다시 14년이 지나 88년, 내가 평화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씨가 74년에 쓴 양심선언을 세상에 공개했다. 이를 근거로 사제단이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해 고문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 때 검찰은 공소시효를 핑계로 “고문을 했다는 증거도 간첩이라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면서 수사를 종결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주지 않아

최종길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단체가 꾸려진 것은 1998년 10월 17일, 제25주기 추모식에서였다. 추모식도 이때가 처음이었고, 이 추모식을 주도한 것도 이제는 법학교수가 되어 돌아온 그 아들 최광준 교수였다. 그 어려웠던 시절 ‘이럴 수는 없다’고 세상에 대고 외치거나, 그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위에 말한 것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언필칭 ‘법과 정의’를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저 유명한 서울법대의 그 누구도 한마디 하지 못했다. 25주기 추도식 때 어느 법대교수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을 듣고 “몇몇이 술 먹고 밤새 울었노라”는 얘기를 무슨 자랑인양 얘기하는 것을 듣고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최근 최종길 교수에 대한 고문치사사실이 확인되고, 법원에서 국가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로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면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당연히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 증거를 제시하고, 증인을 세우고, 법학이론과 소송의 논리를 개발 주도한 것은 최광준 교수였다. 물론 변호인의 조력과 그 주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고문치사된 사실만 확인되었지 아직도 그 정확한 사인과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최광준 교수는 괴로워하고 있다. 아직도 그 불효에 눈물짓고 있다. 그런 최교수를 보면 가슴이 시리고 진실을 밝히는데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럽다. 그래서 내게 최종길 교수 부자(父子)는 “차마 부끄러움 없이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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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