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코리아 21.03.27 08:17
임종석 | seok9448@daum.ne
지금 인터넷상에는 ‘인디안의 늑대 잡는 법’이라는 글들이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을 봐도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엇비슷한 내용들입니다.
15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책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의 저자 강헌구 교수가 쓴 <가슴 뛰는 삶>이 2008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요, 거기에 소개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 잡는 법’이라는 글에서이지요.
그런데요,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은 그 내용이나 형식으로 봐서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를 재구성 아니면 베껴 쓴 것이 아닌가 하는데, 어쩠든 그야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같은 내용의 글들이 그렇게 많이 올라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하기 때문일 테니까요.
어떻든 그 내용이라는 것은 대충 이렇습니다.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은 사냥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너무 춥다보니 바깥 활동이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늑대를 잡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왜 피에 굶주린 늑대라는 말이 있잖아요? 늑대가 피를 좋아한다는 말과도 괴를 같이 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늑대는 후각 또한 발달한 동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먹이를 찾을 때에도 이 후각을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에스키모들은 이 같은 습성을 이용하여 늑대를 잡는다는 것인데, 그 방법은 이렇대요.
양날 칼을 면도날처럼 잘 들게 갈아 피를 흠씬 묻힌 다음 얼립니다. 얼면 그에 다시 피를 묻혀 얼리고, 그것도 얼면 또 다시 묻혀 열리고…, 이러기를 반복하여 한 덩이의 고기모양이 되면 그것을 얼음 위의 눈밭에 세워둡니다. 늑대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이지요.
후각이 예민한 늑대가 이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요. 이를 코앞에 둔,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늑대는 제 정신이 아니게 되지요. 생각 같아서는 한 입 가득 물고 뜯어먹고 싶지만 단단하게 얼린 얼음덩이이니 그럴 수는 없고… 정말이지 환장을 하는 거예요.
늑대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핥기 시작합니다.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가 막히게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에 정신없이 핥아댑니다. 그러는 사이 얼음과 극대방의 얼어붙은 냉기로 혀는 마비되어 가고 칼날은 드러납니다. 혀가 칼날에 베여 피가 나지만 마비되어 느끼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맛본 신선한 피 맛에 늑대는 그게 자기의 것인지도 모르고 더욱 정신없이 칼날을 핥아댑니다. 그러며 혀는 너덜너덜 찢어지고 피는 더욱 많이 흘러나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피가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늑대는 쓰러져 죽어갑니다.
어떻습니까.
무엇인가의 유혹에 빠져들고, 욕심이 탐욕을 불러들여 파멸을 자초하는 우리 인간들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많이 올라 있는 것도 이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런데요, 저는요, 이 장면을, 그러니까 늑대가 피를 흘려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며 죽어가는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으로 본다면 정말이지 멋있는 한 신(scene)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걸 여러분께서도 한번 상상해 보시지요. 분명 멋있는 신이 될 거예요. 그러나 그 멋있는 신에서 연상되는 인간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우리 인간들의 맹점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지요.
우리 함께 또 다른 장면(scene) 하나를 상상해 보지요.
에스키모들이 그렇게 잡은 늑대를 어깨에 메거나 눈썰매에 싣고 돌아오는 모습의 장면을 말이에요. 하얀 눈길을 그렇게 돌아오는 모습도 외견상으로는 멋있어 보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내면은 어떨까요. 생존을 위한 수단의 하나이니 그 또한 아름답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방법은 섬뜩할 만큼 잔인하지 않나요.
잔인, 그렇지요.
잔인이지요. 죄악 중에서도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는 죄악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잔인한 짓을 생존이라는 구실로 태연스럽게 연출해 가며 살지요.
그런가 하면 유혹에 넘어가 향락의 달콤함에 빠져들고, 욕심이 이성을 마비시켜 죄를 잉태하는 현상을 낳기도 하는데, 그 모두 늑대가 피를 묻혀 얼린 칼날을 핥다가 죽어가는 모습과 닮은꼴이지요.
나는 아니라고요? 그러나 아니지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다 같은 것이지요. 그런 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인간도 본래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라는 작품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질이 사랑이신 그분 하나님이 그들 부부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어 이 세상에 내놓으셨거든요.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 하나님이 금하신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창조주의 명을 거역함으로, 인간들에게 원죄라는 죄의 혈통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잔인한 방법으로 늑대를 잡는 에스키모와 같은 인간을,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아니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늑대와도 같은 인간을 양산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의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그 형상을 되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기도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 했는데, 죄 없는 사람은 없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도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로 내려진 영혼의 죽음이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최초의 인간,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나님을, 성삼위 하나님을 나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내 안의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미련 없이 버려 버리고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그 자리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하거든요.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말씀하셨잖아요. 바로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 사도 바울을 통해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단 두 글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이 가능해요. 이에 좀 더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복음의 “사랑”’이 되는 게 아닐까 해요.
에스키모들의 늑대 잡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이도 비약했다고요?
그러나 비약이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걸요. 사실 세상만사, 인간만사의 거의가 그렇게 귀결되는 것 아닌가요?
출처
당당뉴스
www.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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