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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

한국 개신교 예배의 기원

예수,코리아  21.03.21 03:35

 

1885년 4월 5일은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부활주일이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 부부와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부부가 동시에 인천(제물포)에 상륙한 것이다. 이들에 의해 한국 개신교의 선교는 본격화되었고, 개신교 공예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한국 개신교 초기의 예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예배를 전수해 준 선교사들의 교단 배경과 신학의 성향부터 알아보는 것이 유익할 줄 안다.

 

어떤 역사든지 시대를 정확히 나누기는 어렵다. 사관(史觀)에 따라, 서술의 취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생길 수 있다. 이런 전제 아래, 여기서는 한국개신교 예배의 정착을 위한 적응기간이 있었음을 보고, 그 기간을 1884년부터 1893년으로 잡았다. 이 기간은 기독교 전래와 교회 성장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예배 부분에 있어서도 이 기간을 예배의 정착기로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예배를 차례로 살펴보려 한다.

 

1. 장로교 예배

 

장로교 예배는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New Tersey)에 있는 뉴 부른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신학교는 미국 화란계 개혁교회(철저한 칼빈주의)에서 경영하는 학교로 일본개척 선교사 페어벡(G.F.Verbeck)등 유명한 선교사들을 배출한 신학교이다. 그는 1884년 7월 28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 본부로부터 한국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의 신학 경향은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운동 등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제 2의 각성운동 이후 변화된 신앙형태가 전 미국에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더우드는 미국의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와 19세기 말엽의 사회상황에서 철저히 복음주의 적이며, 근본주의 적인 성서주의의 토대 위에 그의 신앙을 세웠다. 그가 한국 선교에서 신학적 문제로 갈등을 빚지 않았던 것은 철저한 정교분리주의를 고수하면서 성서중심의 선교정책만을 지향한 그의 신앙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비밀리에 예전을 베푼 것은 1886년 7월 11일이었다. 이것은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 개신교 예배행위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그 후 1887년 7월에는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주일예배에는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이나 학교, 다른 기관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 개신교 예배는 마침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대한자유장로회 공의회(1901~1906) 결성에 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을 독노회라고도 한다. 이때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결의한 주일 공예배가 정식으로 채용되었는데, 그 내용은 현재 장로교가 사용하고 있는 헌법에 나타나있다.

190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서문에는 웨스트민스터 헌법 중 일부를 역간 하여 싣고 소요리문답 오천부를 출판하였다. 1905년에는 교회신경을 공의회가 의결 채용하게 되었다. 그 후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노회)시 신조와 규칙을 정식 채용한 것이 최초의 헌장이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 성경학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후 1917년 9월 1일(토요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제6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턴 헌법책을 번역하여 총회가 작정한 대로 편집하여 국한문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헌법책’에는 신조, 성경 소요리문답, 성경 대요리문답, 정치, 헌법적 규칙, 권징 조례, 예배모범, 부록(신도개요)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과 이 가운데서 예배모임은 바로 장로교의 공예배에 관한 것임을 부언한다. 지금까지의 진술을 다시 요약 정리하면, 장로교 예배는 1886년 이후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서 자유롭게 행해져 오다가,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주일 공예배를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감리교 예배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셀델톤(Senderton) 독일계 개혁교회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Seminary)을 졸업하고,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왔다.

그의 신학의 바탕은 장로교였다. 장로교인으로 세례를 받았고, 장로교회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1879년 대학시절 감리교로 교적을 옮겼다. 그의 신학과 사상은 드류신학교에서 형성되었다. 당시 드류신학교는 십자가군대의 훈련장처럼 인식되던 신앙규율과 신앙보수를 강조하던 곳으로서, 신학교의 사관학교(West-Point)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신학 수업을 마친 후 1884년 미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제의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부름으로 믿고 승낙한 후, 1885년 7월 17일 서울 정동에 주택과 함께 예배실을 꾸미고 7월 29일 첫 입주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887년 10월 9일에 감리교의 공식적인 예배를 처음으로 드렸는데, 참석자는 아펜젤러 외에 4인이었으며, 이 교회가 바로 지금의 정동교회인 것이다. 2년 후인 1889년에는 남녀교인이 210명에 달했고, 여자 반은 그의 아내 닷지(Ella J. Dodge)가 맡아 예배를 인도했고, 남자 반은 아펜젤러가 맡아 인도하였다. 그후 그는 1895년 한국 최초의 교회건축에 착수하여 1897년에 준공하였는데, 이 교회가 현재 남아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인 정동교회이며 이 곳에서 독립협회 집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감리교는 1930년까지 미국 남북감리교회의 두 선교부의 주관 하에 있던 것을 1930년 12월 2일에 하나로 합치고, 한국인에 의해 제1회 대한감리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감리교 교리, 장정, 그리고 공예배 규범을 제정함으로써 감리교의 공예배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성결교 예배

 

성결교(1921년)가 경영하는 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김상준과 정빈이 무교동에 집 한 채를 구입하여 ‘복음 전도단’을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동양선교회란 1901년 카우만(E. C. Cowman)이 동양선교를 위하여 일본에 세운 선교회이다.

카우만은 1902년에 친구인 킬 보른(E. A. Kilbome)을 초청하여 함께 전도에 힘썼다. 1910년에는 영국인 토머스(John Thomas)가 한국 최초의 감독으로 왔고, 1921년에는 킬보른이 경성(서울)에 주재하였으며, 이때부터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1911년 3월에는 성경학원을 세워 교역자를 양성하였고, 축호전도를 하여 경남에서부터 함남 혜산진까지 이르렀다.

성결교는 초기에 야간에는 노방에서 북을 치면서 악대를 세우고 전도하고, 낮에는 전일에 결신한 사람을 심방하여 가까운 교회로 보내는 초교파전도운동을 벌렸다. 그러다가 1907년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에 1921년 9월에 전국전도단 총회를 소집하고 전도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의,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제정된 헌법 안에 공예배 규범을 정하고, 그 규범에 의해 현재까지 공예배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한국 개신교 초기의 예배를 개관하였다. 우리가 이 초기 예배에서 한가지 효시로 삼아야 할 것은 예배에 대한 열정이다. 새문안교회 70년사에 보면, 1914년 초의 주일예배 시간표에 오전 9시 45분부터 10시 30분까지 성사시간,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는 강론회(설교)였다. 저녁집회는 7시부터 7시 30분까지 면려회(전도사업, 종교활동),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는 찬양회로 모였다고 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 초기 예배가 말씀중심과 열심 있는 예배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출처 :cyworld.com/onemenn/7376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