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4:35(13-35)
제목: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2001.03.18 오전설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영적 방황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대로믿고 실행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방황이 없겠지만, 기독교인이라 말하면서도 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주님 안에 있지 못하고 주님의 곁을 떠나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한 일-주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육신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곁을 떠난 사람들은 결국 많은 방황과 공허함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세상의 것들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주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잃어버린 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평안과 화평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떠나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오늘날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온갖 육신적인 발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과는 전혀 무관하고, 주님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슴이 무리를 이탈하면 사자나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듯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고, 믿음으로부터 이탈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즉시 영적 악한 세력의 먹이 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주님의 은혜로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만약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재조명해보고, 혹시 주님의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다시금 주님께로 돌이키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1. 제자들은 잘못된 목적지(13절)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온천들"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6마일(1마일=1.6 km)가량 떨러진 마을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엠마오가 있었습니다. 엠마오 보다 더 가까운 곳에 여러 마을들이 있었지만, 클레오파와 다른 한 명의 제자는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뒤로하고(또한 부활의 소식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름의 뜻(온천들)에 걸맞게 그들은 휴식을 취하려 갔는지도 모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옛날 요나가 니느웨가 아닌 타시스로 가는 배를 타듯이,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피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린 도망가는 것이 아니야, 이 정도 거리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어, 특별한 일이 있으면 즉시 달려갈 거야..."
두 제자들은 사도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들과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가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주님을 그리 멀리 떠나지는 않지만, 잠시 믿음의 생활을 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음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않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 이들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은 감추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19-24절).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그러한 사람들은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기보다는 또는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엠마오로 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13-14). 그들은 서로 지난 몇 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든지, 아니면, 여인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누군가에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알고 있는 사실을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뿐, 다른 누군가에게 알리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루살렘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동행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15절)
이들의 육신적인 성향으로 인해 주님께서 함께 동행함에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휴거되었고(창 5:24), 창 6:9에서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며, 특별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동행했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까? 그들의 안목이 육신의 눈으로 돌이켜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아닌 육신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안목이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고전 2:14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어느 교회 목사처럼 영안이 열리면 교회 천정에 매달린 천사가 보이고, 목사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그런 거짓말이 아닙니다(그러한 사기는 들통나게 됩니다). 영적인 안목이란,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들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들은 주님께 일어났던 하나님의 일들(죽음과 부활)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순하게 육신적인 안목으로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거리를 가지게 되면, 영적인 분별력을 잃게 되고, 육신의 눈으로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인 일들을 육신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동행했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영적 소경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엠마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남의 허물만 보는 제자들(18절)
제자들은 육신적인 안목과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혼자만이 알지 못하시나이까?"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고 꾸짖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두 제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사실과 묻혔다는 사실만을 알 뿐 부활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마 28:11-15 찾아 읽을 것.
두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소식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엠마오로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안전을 위해 피하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육신적인 판단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꾸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아니었다고 해도, 누군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면, 그 사람은 부분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제자들은 꾸짖기보다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적인 모습은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들 중에 복음을 잘 못 알고 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꾸짖어야겠지만, 모르면서 열성만 가지고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바른 복음과 바른 진리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꾸짖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알고 있다면, 성경의 그 사실만을 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려 주었는데도 거부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 그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처음부터 꾸짖는다면,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제자들의 믿음 없음(21절)
또한 우리가 두 명의 제자들에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은 믿음 없음입니다.
21절 "...믿고 있었나이다."(trusted...had been) 과거형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었지만, 지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들은 주님께서 "선지자"였다는 것을 믿었었습니다(신 18:15).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것도 믿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두 제자들은 믿었었는데, 지금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자신들의 소망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서 믿음을 찾아볼라치면, 돋보기를 들고 찾아보아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적인 일들을 알지도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육신적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서도 믿음을 발견하기란 무척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 더디 믿는 제자들(25절)
육신적인 안목과 육신적인 판단과 믿음 없음으로 인해, 주님께 책망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서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25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성경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도 않고, 또한 믿는 속도가 너무나 더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던져준 "의심"이란 질문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하시더냐?"(창 3:1).
육신적이 되었다는 것은 마귀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이다.'라는 말의 정 반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반, 마귀가 반, 이렇게 반씩 나눠 갖기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로 가득 찬 사람은 성령 충만 할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마귀에게 점유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곳에 있게 되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작용을 중지하시고, 마귀가 즉시로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믿고 말씀에 권위에 복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육신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구약성경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이들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재림 이전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의 박해와 고난을 믿지 못한다면, 동일한 책망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크고 작은 박해와 고난들이 싫어서 엠마오(엠마오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로 피한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두 제자와 동일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성경에 있는 것들을 설명 듣는 제자들(27절)
오늘 본문의 두 제자들은 그래도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습니다. 클레오파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엠마오로 피해가고 있었음에도 주님께서는 동행하셨고, 더욱이 '성경에 있는 것들을...설명'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록 그리스도인이 육신적이며, 세상을 향해 달려 갈찌라도,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시며 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시는 분입니다.
만일 주님의 자비와 인내가 아니었다면, 두 제자들은 주님의 책망과 함께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10:16 [또 나에게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어 내가 그들도 데려와야 하리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 양떼에 한 목자만 있으리라.]
7.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제자들(29절)
그래도 오늘의 두 제자들은 주님께 함께 하시길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성경에 있는 것들을 설명하시자, 더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졌고, 그 말씀에 주목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육신적이고 세상 지향적이라고 해도, 이런 그리스도인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언제라고 부복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자신이 육신적이고 세상 지향적이라 해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말씀에 관심도 없고, 성경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그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마귀가 무엇 때문에 싸움을 걸어오겠습니까?
마귀는 말씀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성경을 믿고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면서도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을 향해 달려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믿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래도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주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8.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30-31절)
주님께서는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인 인간들에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을 주셨고, 포도주를 주셨고, 생명수를 주셨으며, 빛을 주셨고,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도 주님께로부터 빵을 받았고,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물질적인 것과 연관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사랑스런 아버지이십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엠마오의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하길 바랬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빵도 먹을 수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떠져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영적 분별력을 갖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드디어 제자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은 일어났던 과거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 자신들이 믿었었던 과거의 이야기일 뿐 현재 자신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눈이 떠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의 일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경을 열어 보여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그들은 지난 이야기가 아닌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육신적인 모습을 가질 때는, 지난 이야기만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현재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엠마오를 향해 갈 때는 지난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 말씀으로 인해 성령 충만해지면, 우리 역시 현재 일어나며 진행 중인 주님과의 일들을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의정부성경침례교회 모든 성도들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변화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9. 제자들로부터 사라지신 주님(31절)
주님께서 왜 제자들로부터 사라지셨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셨다면, 두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과 누가복음 9장에서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라고 하더라."(마 17: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집도 안식처도 본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영적인 분별력을 주신다 해도, 이 땅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소는 위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저택을 마련하려고 올라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베드로의 이상한 말을 따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들로 올라가신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데려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현재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장막을 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계속해서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들이 증인이 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셨다면, 두 명의 제자들은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10. 증인이 된 제자들(35절)
33절에서 주님이 떠나시자 그들은 "당장 그 시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이미 저녁 시간(29절)이었음에도 그들은 다음 날로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하고 들었던 사실을 정확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자신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간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변화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육신적인 모습으로 엠마오를 향해갔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는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변화시키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더 듣고자 주님과 함께하고자 했던 것이 없었다면, 이들의 변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들이 아무리 육신적인 모습으로 엠마오로 향해 갔더라도, 그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눈을 열어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육신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사랑과 바른 자세만은 버리지 마십시오. 말씀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바른 자세를 갖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그리고 주님의 사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엠마오를 향해 갔던 두 제자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의 변화 만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시간 말씀 앞에 바른 자세를 갖고, 말씀을 사모하며, 복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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