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코리아 21.03.15 08:01
종교적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대한 시비
1. '종교라는 것'의 문제
1999년!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다면서 시작되었던 서력기원의 숫자가 그야말로 네자리를 한꺼번에 바꾸기 직전의 만수(滿數)에 도달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시기가 4-7년의 오차가 있었다는 점이 후대에 밝혀졌으니 착오정정을 했었다면 올해가 이미 2003년으로부터 2006년 사이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버렸을 수도 있었던 '2000년'이라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두고 새삼스레 호들갑을 떨어야 할 이유는 도무지 없을 터인즉, 그냥 흐르는 대로의 세월을 살아가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놈의 컴퓨터 때문에 Y2K라는 예측불허의 대혼란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는 마당이고 보면, 알량한 숫자놀음에 울고 웃으며 또한 허물고 세우는 것이 인간인지라, 여전히 1999와 2000 사이에는 왠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이를 둘러싸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가 가공할 정도의 가속적인 추진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말세설을 유포하는 희대의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 겁먹고서 이들을 따라 나서는 무리들이 속출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자에 주목한다면, 마침 수세기전 프랑스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마지막 시간'도 다가오는 이 때에, 전세계적으로 소위 '말세'를 부추기는 일부 종교집단들이 이 때를 놓칠세라 혹세무민에 골몰하고 있다. 세상이 끝날 것인데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둘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으며, 그래서 이러한 '환란을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마음과 몸까지 갖다 바치도록 뭇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판단이 몽롱해진 세인들은 대책 없이 마구 쏠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며,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마치 폭풍전야의 정적처럼 오히려 조용한 듯한 한국의 종교현황이 차라리 더욱 염려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부질없는 기우일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임에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연관하여 신앙인의 자세를 가다듬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도 주요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러한 문제를 좀더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차원에서 미국의 경우를 참고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미국의 기독교는 우리 나라에 개신교를 전해 주었다는 연관성을 지닐 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관여되어 있어서 종교들 사이의 진위시비(眞僞是非)의 한 전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미국에서의 신종교 현황과 기독교의 대응
최근에 간행된 {미국종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에 의하면 1995년 현재 미국 안에는 1,700여 개의 종파가 있으며, 이중 800개 이상이 '비기독교적인' 종파인데, 특이할 만한 것은 이들 중의 대부분이 신종교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신종교들이 기독교의 주류와는 달리 매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주목을 요한다. 전 인구의 13%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소위 신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s)에 가입하거나 참여하고 있다는 1995년도 갤럽의 사회조사도 나와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미국의 주류 기독교 진영에서 최대교단이라는 남침례교가 연 0.2%로 최고의 성장률을 보인 것에 비해서 이 신종교운동들 중에서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1997년 한해 동안 미국 안에서 32만 명의 증가로 1.9%의 성장률을 보였는가 하면, '여호와의 증인'은 1998년에 무려 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흥종교들은 이제 미국 사회와 문화에서 그 영향력을 점차로 확대해 가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많은 대학들에서 개설되는 동양학 관련 분야들이 동양 종교들에 바탕한 새로운 종교 집단 형성을 부추기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한 대중 음악과 문학, 영화들에서 이제는 상업적으로도 매력적인 형태로 범신론적 세계관을 유포시키고 있다. 그 탁월한 사례가 소위 '뉴우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라는 것인데 이 운동은 1998년도 현재 $10억 규모의 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이 운동은 여러 분파를 지니고 있지만 특히 동양의 형이상학적-범신론적 사고의 영향을 받은 절충주의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기존 종교가 조장하는 죄와 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구호와 함께 한마디로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사상'("feel-goodism")이라고 하겠으며, 이를 위해서 우주적인 연대성과 도덕적 상대주의를 표방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인간을 신성적 존재로 간주하는 이 운동의 기본적 인간관에서 비롯된다: "나는 오로지 나의 사고에 의해서만 영향받을 뿐이다. 구원이 온 세상에 퍼지기 위해서는 오로지 이것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사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결국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동양종교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범신론은 동양의 자연관에서는 자연신론을 가리키지만 전통적으로 유신론적인 서양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신론, 또는 신의 무인격성을 의미할 것인즉, 특히 기독교의 신관에서 인격성이라는 요소를 종교적 장애로 느끼거나 현실적으로 거부하려는 현대의 대중적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 주체적이고 중심적인 인간에 대해서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신이 또 다른 인격적인 존재로 인간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 정서적으로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 초월적 신이 인격적이라면 어찌하여 이 세계의 현실은 이토록 무인격적이고 심지어 비인격적으로 굴러가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괴감으로 인하여 결국 신의 인격성이란 신뢰할 수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공포란 대체로 죄의 고발이나 그 대가로서의 벌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유신론적 기독교가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라는 미명 아래 신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에만 집중한 나머지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 교리적 억압성을 한층 견고하게 다져 왔던 역사에 대해서 항거하겠다는 것이다. 뉴우 에이지 운동이 전통적 기독교가 표방하는 도덕적 절대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분리는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본래적 신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의한 것이므로 그러한 깨달음을 증진함으로써 신-인 분리를 극복할 수 있으며 이 새로운 빛이 동터오기 때문에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New Age)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소위 기독교의 주류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조목마다의 반박을 통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서 그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는 것은 차라리 구태의연하기에 생략하지만 그들은 타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회피하거나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유는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기독교도들이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도들보다 신흥종교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 동기가 주로 호교론적인 목적에 입각한 논쟁을 벌이려는 목적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복음주의자들은 신흥종교들의 교리와 신조가 소위 정통 기독교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다수의 백인이 중심적으로 소위 정통적인 기독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정통' 기독교 진영이 동양과 같은 외부나 기타 소수민족으로부터 유래된 신흥종교운동들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태도로 주저함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통'과 '이단'을 준별하는 근거가 그 소속 구성원수의 많고 적음의 차이에서 주어지는가?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일부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의 종교적인 다름을 전제하면서 정신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예를 들면 반 뷰렌(Abigail Van Buren)과 같은 종교비평가는 타종교인들의 종교에서 '오류들'을 찾아내려는 것은 종교적 교만의 극치라고 꼬집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들은 미국과 같은 다원적인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할 때 여러 종교들은 마땅히 종교간의 대화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들의 종교적 정통성, 즉 이들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타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인가? 카톨릭교회의 사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카톨릭교회에서는 1986년에 신흥종교운동들에 대한 바티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신흥종교는 그 구조에 있어서 권위주의적이며, 세뇌와 심리조절을 통해서 죄의식과 공포를 주입시키고 배양하는 술책을 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카톨릭교회가 보기에 신흥종교들은 대화에 대해서 폐쇄적이며, 교파연합운동에 대해서도 심각한 장애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 와서 아린쩨(Arinze) 추기경에 의해 제안된 새로운 정책을 통해서 신흥종교와의 대화를 향한 태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추동인은 카톨릭 교회 자체에서의 선교를 위한 새로운 정책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신흥종교들의 생리를 파악함으로써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 이들과의 대화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또 다른 동인은 카톨릭교회 자체 안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예견과 진단을 위한 자료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신흥종교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 중의 87%가 그전에 기존 기독교회에 소속되었었거나 연관되었던 적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 교회로부터 신흥종교운동으로 이전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로서는 소속감, 초월욕구, 그리고 활동참여열망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기존교회를 통해서는 종교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신흥종교운동들을 통해서 그러한 불만을 해소하려 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기존 교회들의 입장에서 자성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간략한 사례 분석과 물음들을 전제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현황 중 특히 근래에 사회적으로 주목과 비판을 받았던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의 물음을 다듬어 가보자.
3. 최근 한국에서의 종교적 문제들에 대한 물음
지난 3월말 경에는 통일교를 흉내낸 '국제크리스찬연합'에 관한 고발적 기사가 언론에 등장하더니 5월 중순에는 자기절대화에 터한 집단타락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 준 '만민중앙성결교회'의 구성원들이 마침 TV 방송국 안에서 벌인 난동이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사건의 규모가 이쯤 되다보니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이외에도 내부고발자가 없이는 좀처럼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날 우리 나라의 종교적 현실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건들의 전모를 여기에서 모두 분석할 수도 없고 상술할 수도 없되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되물어야 할 몇 가지 물음들을 검토해 보자.
우선 첫째로, 사람들이 도대체 왜 '사이비종교'에 미치는가?
많은 종교비판가들은 기성종교가 이로부터 소외된 영혼들을 감싸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이비종교'란 무엇인가? 신흥종교가 그 자체로서 사이비종교로 간주될 수는 없겠지만 신흥종교의 태동과 그 연유를 살핌으로써 '사이비종교'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종교의 성립은 기존종교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내포하는 태생적 동기를 지니고 있어서 지배적 주류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가치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사기집단이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성종교로부터 도태된 많은 사람들이 신종교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면서 종교적 성취감을 체험하게 되고 이를 근간으로 기성종교를 악마의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을 이루고 결국 반사회적 횡포를 저지르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신종교가 결코 그 자체로서 무조건 '사이비종교'라고 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현상의 타당성 여부에 관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서라도 도대체 이러한 현상이 왜 발생하는가? 다시 말하면 도대체 사람들이 왜 '사이비종교'에 빠지는가? 그러나 이 물음과 함께 우리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은 위의 분석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자기확인이라는 종교적 대전제가 어느 종교에서 이루어지는가 라는 문제가 결국 관건이며 따라서 기성종교인이라고 해서 이러한 전락가능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비종교'의 범람은 전적으로 기성종교의 책임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첫째 물음에 대한 잠정적 대답이라고 할 때, '사이비종교'는 남의 일이니 나와 무관하다고 발뺌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소위 '정통' 종교, 즉 기성종교의 책임을 드러내는 확연한 증거일 따름이다.
둘째로, 그렇다면 소위 '정통' 종파의 '정통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객관성을 표방하기 위해 특정종교의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서 종교적 진위시비를 하려고 해도 "종교 그 자체로서는 진위판정이 불가하다"는 입장과 함께 결국 반인간성이나 비윤리성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기준으로 준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소위 '사이비종교'나 '이단'이라고 지칭되는 종교집단들이 비윤리적이고 반인간적인 만행을 일삼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 문제를 다룬 한 주간지의 기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지난해 발간된 '한국 신종교 실태 조사보고서'(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에는 34개 계열의 332개 교단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자생적인 신흥종파가 12개 계열의 133개 교단이라고 한다. 물론 신흥종파 혹은 신종교라 해서 사이비종교나 이단으로 불릴 수는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기성종교이건 신흥종교이건간에)의 비윤리성 혹은 사기적 행태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다시 말하면 소위 '정통'이라는 동네는 과연 타당하고 올바른가? 그런데 이 물음은 최소한 두 단계로 나누어 다루어져야 한다. 우선 소위 '정통' 종파는 혹시 사회적-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요소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물음으로 새겨져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설령 사회적-윤리적 타당성에서 결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종파의 '정통성'의 근거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정통성'이 사회적-법적 타당성을 포함할 수는 있어도 이에 귀속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적인 정당성이 종교적 진리성을 보장하거나 보증할 수 없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받았던 사건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기에 소위 '정통'이라는 종파에서는 그들의 종교적 정통성을 그들이 지닌 최소한의 윤리성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에 의존하고 있지나 않은가라는 자성적인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존은 결국 종교적 신앙을 윤리적 신념으로 환원시키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소위 '정통'과 '이단'이라는 판별은 도대체 어떻게 주어지며 과연 그 자체로서 타당한가?
누구든지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사이비종교'라고 분류되는 종파는 과연 이에 속한 구성원들에게도 '사이비'일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또는 '이단'이라는 판단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의 두 물음을 함께 아우르는 이와 같은 세번째 물음은 좀 더 밀도 있는 분석을 요하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4. '옳음의 옳음'과 '그름의 그름'에 대한 '옳고 그름'
소위 '정통'과 소위 '이단'의 판별 근거는 무엇인가? 소위 '정통'이란 '옳음'이고 소위 '이단'이란 '그름'이라면 여기에서 '옳음'과 '그름'이라는 판단이 가해지는 근거는 당연히 '절대적 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얘기를 간단히 하자면, 그러한 '절대적 참'을 언제나 내가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내가 그 안에 속해 있다는 방식으로 '참과 나의 한 묶음'이라는 신화가 우리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말하자면 '옳음 또는 그름'이라는 판단은 그러한 판단주체와의 관계에서 '같음 또는 다름'의 여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어서 판단자인 나 자신과 '같음'이면 '옳음'이고 나 자신으로부터 '다름'이면 곧 '그름'으로 간주된다. 종교를 포함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처럼 '같음과 옳음'을 함께 묶고 또한 '다름과 그름'을 한데 엮는 방식이 진위판단의 준거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같음'을 근거로 '옳음'을 주장하고 '다름'을 이유로 '그름'이라고 판정하는 단원주의적 사고방식은 거슬러 가자면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서의 참'이라는 유구한 전통적 진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있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이 있음이라면 그것이 곧 '참'이라는 낭만적 환상에 터한 진리관이다. 이것이 낭만적인 것은 '있는 만큼 앎'에서 '있는 만큼'이나 '아는 만큼 있음'에서 '아는 만큼'이 결국 자의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자는 '있음'을 기준으로 '앎'을 개진하고 후자는 이와 대조적인 방향을 취하는 환원주의적 방식을 불가피하게 전개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환원주의의 피폐는 종교적 신앙의 실제에서는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우선 자기와의 '같음'을 근거로 '옳음'을 주장하는 소위 '정통' 교파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기와 '다름'으로써 '그름'일 수밖에 없다는 소위 '이단'과의 구별성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소위 '이단'으로 내몰린 종파들에서도 그러한 차별이야말로 오히려 그들 자신의 '옳음'에 대한 반대편으로부터의 증거라는 역공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소위 '정통-이단' 사이의 구별이란 이미 지적되었듯이 '같음-다름' 사이의 그것으로부터 연유된 것이어서 사실상 아전인수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같음'과 '다름'은 그 생리구조상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대체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같음'에게는 있을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것이며, '같음'이 몰아내려는 '다름'은 바로 그 '다름' 자체에 대해서는 '같음'이어서 결국 소위 '정통-이단' 간의 싸움은 양보를 불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름을 배제하는 같음에 입각한 옳음을 주장하는 소위 '정통'은 바로 다름의 배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의 같음을 '순수'라는 포장으로 갈고 닦기에 여념이 없게 된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순수'이지 자기와 다른 타자들의 '순수'라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생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국 '독선(獨善)'으로 치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순수'에 대한 배타적 전승은 역사의식의 결여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탁월한 사례를 1920년대에서부터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서에 대한 절대적 권위주의에 입각해서 도덕적 성실성, 개종경험의 강조, 특정교리의 문자적 고수, 그리고 애국심 고취라는 요소들을 특성으로 지니면서 제도화의 역사를 거쳐 1941년에는 미국기독교회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라는 교단연합체를 발족시켰다. '순수'에 대한 이들의 집념은 싸움, 깃발, 전진, 피, 최후의 승리 등과 같은 군사적이고 호전적인 은유들로 포장된다. 물론 삶의 규범도 금주, 금연, 복장 규정 등과 같은 엄격한 반세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 와서는 이처럼 '순수'를 표방하는 독선적인 근본주의 운동은 기존의 교회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비교회적인 운동(non-ecclesiastical movement)으로 퍼져 나아갔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말세론에 즈음한 신흥종교운동들의 부흥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어 갔다. 이 중에는 도덕적 다중(Moral Majority)을 비롯한 각종 선교단체(UBF, CCC)와 같은 온건한 운동들이 있는가 하면, 극우적인 다윗파나 미시간 민병대, 그리고 백인민병대 등 과격한 근본주의적 행태 등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근본주의라는 극단적인 사례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스스로 '정통'이라는 자기주장은 사실상 자기의 '독선'을 은폐하고 방어하기 위한 자기확인의 발언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순수'를 표방하는 정통은 지적인 정직성을 종교적 봉헌의 장애로 간주하며, 자기와 같음을 스스로 옳다고 하는 동어반복의 굴레 안에서 물음의 제기가능성을 배제한 채 '이미 해답된 물음'을 살아가는 것을 진지한 종교적 자세로 간주하는 위선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모든 종교가 그 자체의 절대적 순수를 주장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종교적 순수성'이라는 이름이 인간에 대한 억압이나 최면적인 환상을 무릅쓰고서라도 종교 자체의 절대화를 야기하는 것이 무릇 모든 종교의 제도화적 생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본회퍼가 외쳤던 '비종교화'나 오늘날 종교비판에서 주장되는 '종교적 인간의 탈종교화' 등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종파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름'으로, 즉 '이단'으로 내몰리는 종파들은 모든 종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광기가 부각되면서 '광신(狂信)'으로 치닫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실상 종교는 이미 그 자체의 비일상성으로 인하여 '이상(異常)스러움'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으되, 이러한 '이상스러움'이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오히려 정당하고 당위적이며 진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일상적 이상스러움이 일상적 삶 안에서 그 삶의 일상성을 저주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방향으로까지 치닫는 자기절대화의 속성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광기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들에게서 광기가 공통적이라고 분석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는 그 안에서 보면 '순수'이고 밖에서 보면 '광기'라는 철저하게 대조적인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순교'라는 행위도 그 종교 안에서 볼 때에는 순수하다 못해서 숭고한 종교적 행위이지만 그 종교의 밖에서 본다면 '광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종교가 지배적인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제 '이단'으로 간주되면 거기에서의 '순교'를 포함한 '충성'은 여지없이 '광신'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소위 '이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이단'으로 간주되는 부류들의 자기주장이 아니라 소위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지배적인 종파로부터 부여된 저주의 언어이다. 말하자면 '정통'이 자기에 대한 자기발언이라고 한다면 '이단'이란 타자에 대한 발언이거나 타자로부터의 발언이다. 한마디로 종교의 역사는 '정통되기'와 '이단 만들기' 사이의 각축장이었다.
이제 이러한 대비적인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형적으로 대조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같음'과 '다름'의 반립관계는 자기에 대해서는 '옳음'을,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는 '그름'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대하는 경향으로 쏠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소수적 타자를 다르다는 이유로 그릇된 것으로 내모는 태도는 지배적 자기를 언제나 '옳음'으로 간주하는 독선으로 치닫게 되며, 이와 대조적으로 소수적 타자는 그들에게 부과된 '그름'에 대하여 거부하는 몸짓인 광기를 발하게 되고 이는 광신으로 전락함으로써 다수의 눈에는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작태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든지 그들의 종파나 교파가 과연 '그름'이고 마는가? 그랬다면 그들이 '광신적 순교'를 불사할 만큼 이에 종사했을 리가 만무했을 터인즉, 이러한 '정통-이단'이라는 판단은 서로 뒤집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즉, 그 누군가 자기들을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광신적인 타자'의 눈에는 그들 자신이 '독선적인 자기'로 비칠 뿐이며 그러한 '독선적인 자기'란 결국 또 다른 '광신적인 타자'일 뿐이라는 말이다.
둘째로, 위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이기도 한데, 무릇 종교적 신앙이란 '독선적인 자기'로부터 '광신적인 타자'에 이르기까지 양극단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엄밀하게 말한다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이치가 여기에도 해당되니 사실상 '독선적인 자기'와 '광신적인 타자'는 하나라고 할만큼 종교적 신앙은 양극단을 함께 묶어내는 오묘함을 그 생리로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를 스스로 '독선적'이라고 간주하거나 타자로부터 가해오는 '광신적'이라는 비판을 스스로 받아들이고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눈에 타자는 여전히 '광신적'이고 그러한 타자의 눈에 자기는 여지없이 '독선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종교적 시시비비, 즉 '옳음(是)을 옳음(是)이라 하고 그름(非)을 그름(非)이라 하는 판단'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 당연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즉, '옳음을 옳음이라 하고 그름을 그름이라 하는 판단'에서 앞의 '옳음'과 뒤의 '옳음'이 같다면 (또한 앞의 '그름'과 뒤의 '그름'이 같다면) 단순한 동어반복이어서 '자기들만의 언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며, 만일 앞의 '옳음'과 뒤의 '옳음'이 서로 다르다면 적어도 뒤의 '옳음'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의 '옳음'이라는 예판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주어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제는 더 이상 소위 '정통'으로 표방되는 '옳음'과 '이단'으로 간주되는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 판단자 자신과의 '같음'이나 '다름'의 여부에서 주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태는 '참'의 기준이 결국 자기라는 것인데 이러한 자기절대화는 종교적 신앙의 뿌리깊은 유혹이며 깨어나기 어려운 착각이기는 하지만 신과 같은 종교적 초월자의 절대성을 신앙의 절대성이라는 어불성설로 둔갑시키는 범주오류에 기인한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러한 타자억압적 자기폐쇄성을 귀결시켜 왔던 '같음-옳음'의 묶음과 '다름-그름'의 고리를 풀어헤치고 '같음과 다름'의 구분구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돌이켜 보건대 종래의 '정통-이단' 논의는 실로 '정통(是)의 정통성(是)' 여부나 '이단(非)의 이단성(非)' 여부만을 논의해 왔던 자기동일성의 족쇄를 전통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시시비비의 논리적 허구성과 현실적 부당성을 폭로하고 앞서 논했듯이 '같음-다름'의 구도에 입각해서 '옳음-그름'을 판단해 왔던 종래의 폐습을 척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재구성은 실재에서의 '같음' 의식과 현실에서의 '다름' 인식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이 가리키는 '같음과 다름의 경계 불확정성'에 대한 확인을 통해서 시도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결코 모든 것이 다 같다는 무차별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것이나 마구 옳다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를 선동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기의 '같음'을 기준으로 '다름'을 판정하려는 작태는 어떤 경우에도 '그름'일 수밖에 없다는 '옳음'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옳음'이란 같음-다름 사이의 허물어진 경계에 대한 직시를 통한 해방 추구의 자세를 가리킨다면 여전히 '다름'을 배제하고 자기의 '같음'만을 고수하려는 타자억압적 자기동일화라는 자기보존본능적 생리는 '그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준별이 그나마 종교가 외치는 해방을 꿈꿀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소위 '정통'이나 소위 '이단'을 막론하고 공히 자성적 비판의 과제를 지닌다는 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덧붙여져야 한다.
정재현 교수 (성공회대학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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