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과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은 과연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관계성을 가져야만 하는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찰해 보는 것은 성경신학을 하는 분들에게나, 조직신학을 하는 분들에게나, 또 그 모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서 목회와 설교에 반영해 보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다 유익할 것이다.
이 두 분과의 관계는 성경신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흔히 성경신학이라는 용어와 학문 분과의 창시자로 인정되는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 1753-1826)나1 그를 따르는 합리주의적 성경신학자들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를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은 과거의 신학이 교의학의 틀에 매여 있었음을 비판하면서 그런 교의학의 틀에서 벗어나 성경의 내용을 기술하는 기술적인 작업(descriptive project)을 하는 것을 성경신학적 작업이라고 한다. 가블러 자신의 말을 다시 한번 더 소개해 본다:
성경신학은 역사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거룩한 저자들이 거룩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 바를 전해 준다. 이와 반대로 교의신학은 교훈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특정한 신학자가 자신의 능력, 시간, 시대, 장소, 교단 혹은 학파와 다른 유사한 요건들을 따라 거룩한 것에 대해 철학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2
여기서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종교사(宗敎史)를 추출하는 작업이 성경신학적인 작업으로 나타났고, 이것의 변형이 전승사, 편집사 등을 찾는 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합리주의적 성경신학관을 가진 분들은 결국 교의학으로서의 조직신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에서의 성경신학의 궁극적 목적은 교의학으로부터 자유로운 신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그들이 말하는 성경신학적 작업에 몰두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과연 옳고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이 이 논문에서 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질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 이전에 위에서 언급한 합리주의적 성경신학과는 대립되는 입장에서 성경신학을 한다고 하는 이들이나, 그런 교육을 받은 이들 사이에서 비슷한 목소리가 있다는 한국적인 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흔히 교의학이나 조직신학을 성경신학과 대립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교의학이나 조직신학에서 벗어나 성경신학을 해야 하고, 앞으로는 모든 것이 성경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작업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이것이 과연 옳은 발상이고, 과연 바람직한 용어의 사용인가를 묻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가블러 등과 같이 합리주의적인 성경신학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교의학[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대립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합리주의적 성경신학과는 대조되는 그야말로 "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Reformed biblical theology)을 한다면,3 우리는 결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대립적인 것으로나 경쟁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상호 경쟁적인 것으로나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2. 용어 정리와 이 문제에 대한 선행 연구
먼저 우리가 추구하는 성경신학이 "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보기로 하자. 이 용어는 리쳐드 개핀이 보스의 성경신학과 그와 같은 입장에서 성경신학적인 작업하는 것을 가리켜 사용한 용어이다. 개핀은 보스를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the father of a Reformed biblical theology)라고 부른다.4 개혁주의 성경신학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나타내 보이는 성경신학일 것이다. (1) 계시의 무오성에 대한 인정, (2) 계시의 기본 사역의 객관성을 인정함, (3) 성경의 만전 영감 교리(the doctrine of 'plenary inspiration')를 받아들임. 이 세 가지 요소는 보스가 성경신학의 중요한 원칙들 또는 지도적 원칙들(guiding principles)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5 그러므로 오늘날도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 세 가지 원칙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개핀은 보스의 이런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 문자적 자기 계시로서의 성경의 절대적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고, 그러나 우리가 하는 작업이 진정 "특별 계시의 역사에 대한 탐구"인 성경신학이려면 그 성경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6 성경의 문자적 계시성에 대한 인정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행위 계시만을 강조하는 경향과 의미만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한 좋은 교정제가 될 것이며, 성경 계시의 구속사적 성격에 대한 의식은 성경에 대한 무시간적 이해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이를 다시 성경의 통일성과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으며, 성경의 신성과 인간성(humanity of Scripture)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의 통일성은 성경이 하나의 포괄적인 의미, 통일된 의미(one pervasive sense - a unified meaning)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7 그러므로 어느 한 부분의 의미는 전체의 통일된 가르침 안에 그 위치를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를 찾기 힘들다는 오늘날의 (개혁주의 성경신학이 아닌) 성경신학계의 동향에8 반대되는 것이요, 그에 대한 좋은 교정제와 반론이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핀은 아예 이를 하나로 묶어서 "성경의 통일성과 신적 저작성"(the unity and the divine authorship of the Scripture)이라고 표현한다.9 그리고 성경의 역사성은 성경 계시가 점진적으로 주어진 계시를 성문화한 것이라는 것을, 따라서 성경의 인간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10
이런 개혁주의 성경신학은 보스나 페인이 잘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주해하는 "주경 신학"(exegetical theology)의 하위 분과들(subdivisions) 중의 하나이다. 주경 신학의 하위 분과들은 (1) 성경의 실제적 내용에 대한 연구, (2)총론, (3) 정경학, 그리고 (4) 성경신학, 즉 "성경의 성문화(成文化) 배후에 있는,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계시된 자료의 성문화와 더불어 온, 시간과 공간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실제적인 자기 계시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는 것이다.11 그러므로 이런 성경신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이들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보스 등이 말하는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도록 유의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성서학(biblical studies)이나 주경 신학을 하는 것을 성경신학을 한다고 표현하는 일이 많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어 사용에 있어서 철저성을 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보스의 성경신학적 작업에 깊이 관심하는 우리 학회와 이런 입장을 유지하는 이들은 이런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12
이런 입장에서 성경신학을 하거나 조직신학을 하는 이들 중에서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과연 어떤 태도를 표명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게할더스 보스의 가장 분명한 말을 생각해 보자.
사실 성경신학도 조직신학과 마찬가지로 자료를 변형하여 사용한다. 차이점이라고는 그 변형의 원칙에 있을 뿐이다. 성경신학의 경우에는 '역사적'이라면, 조직신학의 경우엔 '논리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들 모두가 필요한 것이며, 그 어느 하나의 우월성을 주장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13
그러므로 보스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둘 다 필요한 것이며, 그 어느 하나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또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보스가 하고 있는 다음의 말을 들어 보라:
성경에 의존함의 정도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또 하나가 성경을 변형하여 사용하고, 하나는 아무 수식 없이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성경 가운데 보존된 진리를 변용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이 변용의 원칙에 있다. 성경신학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구조를, 조직신학에서는 논리적인 구조를 그 원칙으로 한다. 성경신학이 발전의 선(line)을 끌어낸다면, 조직신학은 그 원(circle)을 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점진성의 선상에 있어서는 그 가운데 조직화의 과정의 시작이 지적될 수 있는 몇 가지 점이 이미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14
그러므로 보스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모두가 성경적 신학이며(is), 성경적 신학이어야만(should be) 한다는 것을, 따라서 성경신학 못지 않게 조직신학도 성경에 철저히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둘은 단지 그 방법론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머레이도 보스를 따르면서 정확히 같은 말을 한다.15 보스와 머레이의 이런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페인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같은 사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좋은 조직신학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성경의] 사실들을, 성경신학이 그렇게 하듯이 그것이 계시된 순서대로가 아니라, 주제적에 따라 종합하는 방식으로(in a topical synthesis) 배열하는 것이다.16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하는 분들은 성경신학만이 아니라 조직신학도 모두 성경적이어야 한다, 즉 성경에 대한 바른 주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성경 신학이 성경 주해에 근거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계시의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는 데에는 별 반론이 없을 것이다.17 조직신학 역시도 주해의 결과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3. 조직신학과 주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른 조직신학은 항상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어야만 한다. "성경 주해는 모든 신학함의 기초"이기 때문이다.18 머레이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직신학이 주해에서 멀어지면 반드시 생명력이 없어지고,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19 왜냐하면 "주해가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관련하게 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20 그러므로 바른 조직신학의 방법은 성경을 바르게 주해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신학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서 신학을 하는 방법은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신학적 진술을 할 때 주해의 과정을 드러내면서 작업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주해에 근거하되 그 결과만을 사용해서 조직신학적 진술에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철저히 이 중 어느 한 유형에 속해 있는 신학은 없다. 단지 어떤 것의 비중이 많은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1) 주해의 과정을 드러내는 조직신학
Ex. John Murray, Anthony Hoekema
(2) 주해의 결과를 사용하는 조직신학
Ex. Louis Berkhof, Wayne Grudem
그러므로 주해의 결과를 위주로 조직신학적 진술을 한 벌코프 등을 주해를 하지 않고 성경 구절을 증빙 구절로 사용한 방법(proof-text method)을 사용하였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반틸의 조직신학적 진술을 살펴 보라.21 아마도 그 내용에 깊이 유의하지 않으면 반틸이야말로 주해의 결과 중심으로 조직신학적 작업을 한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 내용을 생각하면 반틸이 보스의 사상에 근거하여 작업하려고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벌코프의 신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신학의 진술 방법은 주해의 결과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의 내용은 분명히 보스적 성경신학의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혜 언약에 대한 벌코프의 진술을 보라. 또한 행위언약에 대한 벌코프의 이해는 보스의 구속적 특별계시에 대한 논의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벌코프의 이해를 생각해 보라. 우리들이 이점을 많이 유의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를 다시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신약적인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 또는 과거 신학자들의 표현을 따라서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은 신약 성경이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天國]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22 이렇게 말한 벌코프는 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성격을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그것은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p. 407); (2) 그것은 영적인 왕국이다(pp. 407-408); (3) 그것은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나라이다(p. 409). 특히 그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 벌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있는 현재적이며 계속해서 발전하는 영적인 실재이며, 그런 것으로서 끊임없이 넓게 영향을 미쳐 가는 것이다"(p. 409). 그러므로 벌코프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고 삶이 진행되는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계속 발전해 가는 영적인 실재이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가 가시적이고 엄위에 찬 통치로 가운데서 그 극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p. 409). (4) 그것은 비록 교회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p. 409). 이런 하나님 나라 이해가 보스에 의해 제시된 천국 이해를 어떻게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성경에 대한 주해에 근거하여 신학을 진술한 것이다. 단지 그의 교과서적인 저술 방식이 주로 주해의 결과를 중심으로 신학을 진술하게 했지만 말이다.
4.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이제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여러 점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조직신학에 좀더 바르고 온전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 성경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측면만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계시사(啓示史)에 유의하는 조직신학,
즉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을 인정하는 조직신학
무엇보다 먼저 성경신학이 계시의 점진성과 유기적 성장을 연구하는 학문 분과라는23 점을 유념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성경신학에서 조직신학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을 수 있다. 특별 계시는 한번에 완결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기적 점진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계시는 역사적으로 점진적인 방식으로 온다."24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성경의 자료를 가지고 신학을 할 때, 그 자료가 어느 계시의 시대에 주어진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신학화 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계시의 과정을 살피는 성경신학은, 머레이가 말하는 대로,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조직신학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indispensable) 것이다.25 본고에서는 세 가지 현저한 예를 들어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며 신학적 진술을 하는 것이 계시의 점진성에 유의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예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특별 계시가 종결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그 종결된 계시에 비추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적 하나님으로 계셨음을 말할 수 있다.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시므로 구약시대에도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일체이심에 대한 계시는 모든 계시가 그러하듯이 유기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진 것이다. 신약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자신이 하나님이기도 하심을 분명히 하시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성령의 동등하신 하나님이심을 명확히 체험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분명히 할 수 있었고, 그것에 근거해서 후에 교부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신약의 명확한 계시가 주어진 이후의 상황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26 구약의 초기에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아주 명백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심에 대한 언급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시의 점진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계시의 점진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틸 교수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27 그러므로 구약의 계시를 생각할 때에는 이런 점을 유의하면서 그 자료를 가지고 신학화하려고 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1:26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창 1:26) 말씀하셨을 때, 이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명확히 계시하기 위해서 언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우리'에 대해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들은28 마치 이 구절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지나치게 말한 듯이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몇몇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무리하게 주장한 이들은 사실 드물다.29 조심성 있는 신학자들은 그렇게 무리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 말씀이 후대의 계시와 부조화되지 않는 것임을 지적했었다. 예를 들어서,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계시의 일정한 진전이 있음이 아주 분명해진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 계시는 구약에서 시작한다. 분명히 우리는, 신적 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무시하던 교부들이나 후기의 어떤 신학자들이 잘못 주장한 바와 같이, 구약에서 온전한 삼위일체 계시를 찾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소시니안 신학자들, 알미니안 신학자들 그리고 후에 제믈러(J. S. Semler), 헤르더(J. G. Herder), 되덜라인(Doderlein), 브레트쉬나이더(K. G. Bretschneider), 호프만(J. C. K. von Hoffmann)이 구약에는 전혀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고 가르친 것도 잘못된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사실에 관해 희미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점진적으로 계시된 가르침 중의 첫 부분이다.30
또한 벌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창 1:26과 11:7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로 언급하실 때에 하나님 안에 위격적 구별의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이 구절들도 삼위일체를 지시하지는 않고 위격의 복수성(a plurality of persons)만을 지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온전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선취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31
그러므로 벌코프는 그렇게 무리하게 삼위일체의 계시를 창세기 1:26 등에서 찾는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 반틸도 이 구절은 언급하지 않고, 좀 더 분명하게 위격의 구별을 시사하는 구절들을 언급한 후에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2 후크마도 "우리는 비록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복수로'('a plurality') 존재하고 계심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창 1:26]에서 단순히 힌트되고 있는 내용이 신약에서 삼위일체 교리로 더 발전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33 그는 이때 칼빈, 알더스, 루폴드 등의 주석가와 선배 조직신학자 벌코프의 논의에 근거해서 자신의 논의를 제시한다. 결국 후크마도 계시의 점진성을 생각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논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학자인 애즈버리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빌 아놀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입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창세기를 찾아보려고 해서는 안되지만, 이 구절[창 1:26]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창세기에서 시사와 암시로만 나타났던 것은 "때가 찰 때"(갈 4:4)에 주어질 원숙한 계시를 기다렸어야 했던 것이다.34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는 카일과 월필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35 또한 현대 학자들 가운데서 이를 하나님 안의 복수성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이들로 Clines와 Hasel을 들 수 있다.36 클라인즈는 이 구절의 "우리"는 2절에 언급된 창조에서 하나님의 동반자가 된 '하나님의 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이 구절에는 '신성 안에 이중성"(duality within the Godhead)이 언급된 것이라고 한다.37
그런가 하면 데렉 키드너는 이 복수형을 엘로힘의 복수형과 같이 "충만의 복수"(the plural of fullness)로 보면서 "구약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이 충만함은 요 14:23(그리고 14:17)에서의 '우리'(we and our)에서 삼위일체로 전개될 것이었다"고 말한다.38 그러므로 키드너도 계시의 점진성을 유의하면서 진술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주석의 서론에서 그가 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해 준다: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이라는 말이 오순절에서 온전히 계시되기를 기다리는 구약적 표현이었던 것과 같이, 주님 자신에 대한 칭호인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라는 용어도 선재하시는 성자이신 '아버지께서 ... 세상에 보내신 자'의 빛에서만 그 충분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39
빅토 해밀턴도 이 "우리"에 대한 여러 입장을 설명한 후에 결국은 계시의 점진성을 인정하는 이와 거의 비슷한 입장을 표한다.40 이렇게 조심스럽게 진술하지 않는 라이트너 같은 이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야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강한 증거가 발견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41 구약 전체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들이 있으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통일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볼 때,42 그에게도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점진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고 분명하게 나타나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의 조직신학이 성경신학의 교훈을 충분히 받았는 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예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가 성경에 매우 중요한 부분의 한 부분이므로, 구약의 많은 부분은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거나, 간접적인 예언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아주 명확하게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어서 분명히 그리스도 모형론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런 건전한 모형론적 관계의 대표적인 경우는 구약의 희생 제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그 자체로는 속죄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그러나 그 희생 제사들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히 10:3) 결국 그 죄를 사하는 "한 영원한 제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희생 제사와 십자가 사건의 모형론적인 관계는 부인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그 모형론이 과연 언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하는 이들이라면 구약 시대에 희생 제사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 속에 벌써 이런 모형론적인 연관성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고 해야만 한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에 구약의 희생 제사 제도의 빛에서 그 사건을 해석하려는 인간적 시도가 나온 것이고, 그것이 상당히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형론은 우리들의 해석에서 온 해석적인 기제(mechanism)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약에 신약적인 복음이 내재하고 있음을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터에서는 과거의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의 이른 바 "구약 시대는 율법 시대요, 신약은 은혜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신학화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계시의 유기성을 잊은 실수가 여기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는 바르게 온전한 유형론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우리들이 흔히들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릇된 모형론이 있기도 하다. 이런 그릇된 모형론의 예들은 다양하다. 특히 구약의 희생 제사가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모형론적 관계성을 생각하면서 그 원칙을 그릇되게 너무 넓게 적용한 예들이 많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대개 후기 시대에 속하는 계시의 자료를 이른 시기에 무리하게 주입시키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다. 이는, 머레이가 잘 지적하듯이,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do violence to revelation itself)이기43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 이런 그릇된 모형론이 동원된 일이 많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가죽옷이 있으려면 동물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 제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동물을 희생시키시고, 그 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쉐퍼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독단적 교리로 삼지 않도록 유의하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분의 도래를 고대하는 구약 희생제사 제도의 시작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44 또한 클라인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한 장애에 대한 이 치유는(3:10 참조)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배려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동물 희생제사 행위이다. 그러나 자명한 것은 희생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것의 치유적 결과이다."45 이런 해석의 하나로 이 사건과 희생 제사를 연관시키는 해석이 그 본래의 의미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스키너와 육축 중에서 동물 희생을 드리는 것의 도입에 대한 야위스트의 이론을 여기서 찾는 로버트슨 스미뜨의 해석도 생각할 수 있다.46 또한 특별히 희생 제사와 연관시키지는 않지만 여기서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이로 피츠버그 신학교의 도날드 고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입혀 주시는 것 자체가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47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경신학이 하는 일을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성경 신학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이른 시기에 과연 희생제에 대한 모형론적 계시가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동물을 희생시켜, 희생제의 원리를 가르치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아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이는 키드너이다.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면서 "여기서 구속을 미리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이고 본 주제에서 벗어 나는 것이다"고 말한다.48 보스도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이 행위[즉, 입히시는 행위, covering]에 대해서 사용된 용어가 희생제에 의해서 죄를 속하는 것에 대해서 율법에 사용된 전문적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는 율법에서 죄를 속하는 데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입히다'(to clothe)는 의미의 단어이기 때문이다."고 한다.49 즉, 여기 입히신 것을 율법에서 죄를 속한다(to make atonement)는 의미로 사용된 '카파르'(??????)가 아니라, '입히다'는 뜻의 '라바쉬'(??????)의 히필 형인 '얄비쉠'(??????????)임에 유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스는 여기서 희생제 제정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죽옷을 입히신 행위는 오히려 죄를 지어 하나님의 면전과 하나님의 거주지인 에덴에서 쫓겨 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들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에게 섭리적인 보호를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딜만은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속적인 돌보심을 나타낸다"고 한다.50 키드너도 비슷한 해석을 제시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궁극적 필요보다는 직접적인 필요를 만족시키시는 것이다.... 가죽옷은 사람의 죄로 인해 필요하게 된 도덕적, 물리적 - 모든 복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51 그래서 폰 라트는 여기서 "우리는 창조자가 처음으로 보존자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52
물론 이를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존재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듯이, 죄 있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벗은 채로 있을 수 없고 무엇인가로 가리고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즉 이를 인간의 죄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53 칼빈이 이런 해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54 그는 가죽옷이 우리에게 더 수치스럽고 낮은 모습을 갖게끔 했다는 생각에서 이런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상당히 심리적이며 자의적이고, 이로부터 발전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무엇인가를 가리고 가야함을 상기시킨다는 웬함이나 샤일하머의 해석은 이 단어가 후에 제사장들이 특별한 옷을 입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된(출 28:42 등) 단어라는 점에 대한 고려에서 온 좀 역행적인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 옷을 입하신 행위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보심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55
둘째로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문제를 해석하면서도 흔히 이런 잘못된 모형론이 동원되곤 하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흔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히브리서 9:22 하반절 말씀에 근거해서 가인의 제물은 그가 농사한 곡식 중에서 드린 것이므로 피흘림이 없는 제사였고, 아벨은 어린양을 잡아 드렸으므로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그 피 때문에 받으셨다고들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결국 아벨의 제사를 후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모형(type)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모형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이유가 피 있는 제물을 드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성경 자체 내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모형론적인 관계를 시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잘못된 모형론적인 해석을 보급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스코필드 주석 성경일 것이다. 이 책은 창세기 3:21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신적인 방식에 대한 거부였다... 속죄하는 피가 뿌려진(히 9:22) [아벨의] 희생 제사는 그의 죄 고백이며 동시에 대리물의 개입에 대한(히 11:4) 그의 신앙의 표현이었던 것이다."56 이런 입장은 세대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모형론적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하고, 비평주의적 입장을 지닌 이들은 모형론적 해석에 대해서는 좀 자제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주 비평주의적 입장의 스키너는 결국 아벨의 제물만을 열납하신 것은 드려진 제물의 종류라고 보는 것이 희생제에 대한 원시적인 셈족의 개념과 더 잘 맞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57 스키너는 이것이 본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희생제의 시작 또는 도입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본다.58 물론 스키너는 이 본문과 그리스도 사건의 모형론적 관계를 깊이 논의하지는 않는다. 폰 라트도 이를 첫 제사로 보면서 이 기사 가운데는 별 설명 없이 "피 제사가 야웨에게 더 기쁨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59 물론 그는 여기서 그 어떤 모형론적인 해석은 시도하지 않고 그 근거를 출애굽기 33:19과 연관되는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일 뿐이라고 한다.
이와 연관되나 좀 다른 입장을 지닌 이는 월터 부르게만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의적(恣意的)인 자유를 강조하면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더 선호하신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60 해밀턴은 때로는 가인의 제사의 문제점이 있음을 시사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부르게만과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후에 신약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61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서는 아벨과 가인의 제사 사건을 해석하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유무가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을 열납하신 근거라고 하는 것이다.62 키드너는 "피가 없으므로 가인의 제물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고 말한다.63 또한 클라인도 "아벨의 제사에도 속죄적 목적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64 그러므로 키드너나 클라인도 여기서 피 제사의 의미보다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믿음과 동기, 성향 또는 영적인 위치가 중요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65 이런 해석을 하는 이들은 가인과 아벨이 어떤 믿음과 어떤 동기를 가졌느냐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아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히브리서의 말씀을 따르는 해석과는 달리 가인의 제물은 흠이 있는 제물이고 정성이 부족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유대인들의 해석이 있다.66 이와 비슷하게 카일은 아벨은 정선된 것을 가져 왔지만, 가인은 첫 열매가 아닌 것을 선택할 정도의 마음과 태도밖에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67 고든 웬함도 가인의 제물에 비해서 아벨의 제물은 후일의 율법의 제사 규정이 시사하는 바와 비슷하게 정선된 것(the choicest animals from his flock, 'firstlings' and 'their fat portions')이었다는 견해를 가장 일반적인 견해라고 소개하면서 이에 따르고 있다.68
그러나 이 본문 자체에서는 (1) 가인과 아벨의 제물 모두를 "희생제"(??????)로 언급하지 않고, "제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2) 농부인 가인이 땅의 소산을 바친 것은 목자인 아벨이 "그의 양떼 중에서 첫 열매"를 바친 것만큼이나 그의 직업에 적절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69 그러므로 우리는 스키너와 함께 가인의 "잘못이 하나님을 위해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다"고70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해석을 따라서 주어진 계시의 시대의 한도 내에서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71
여기까지의 논의를 따라 오다 보면, 이제 우리는 구약 가운데서 모형론적 의미를 지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로 거의 모든 사람이 모형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을 간단히 언급해 보자.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여리고 성의 라합의 창문에 드리운 붉은 줄에 대한 해석이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때부터 여기 언급된 줄의 색이 붉은 색이라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모형화하는 것으로, 그래서 여기서 붉은 줄을 늘여 뜨린 것이 라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의해 구원받았음에 대한 모형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건전한 해석자들은 이런 모형론적인 해석은 전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72 이런 예를 또 하나 들자면 야곱이 붉은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창 25:29-34)에서 그 붉은 것이라는 색 때문에 그리스도의 붉은 피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것도 역시 이런 잘못된 모형론에 속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상당히 건전한 개혁신학자의 논의 가운데 가끔 이상한 상징과 모형론의 추구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73
잘못된 모형론에 대한 이 논의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같이 생각해 볼 문제를 하나만 제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고 한 것을 해석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교부들은 이 사건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연결시키는 모형론적 해석을 즐겨 하였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 사건에서 이삭이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실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type)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서 소위의 대속의 원리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교부들은 그들 시대의 일반적이었던 알레고리적 해석에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으로부터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에 묵묵하게 순종하여 죽는 데까지 나아갔던 성자 하나님에 대한 그림자를 찾았었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이런 식의 해석에 아주 반대하는 키드너도 다음과 같은 시사를 주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바침에서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할 수 있다.... 이 한 사건에서 이 조용한 희생자는 선택된 '씨'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즉 그 선택된 '씨'가 희생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74 카일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만일에 모리아 산이 이삭의 희생 제사의 장소, 그리고 그 대신에 산양을 제사로 드린 장소로 선정된 것이 구약의 희생 제사 제도의 의의와 의도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모형론적인(typical) 것이라면, 이 모형은 이미 미래에 나타날 원형, 즉 천부의 영원한 사랑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을 수행했을 때를 지시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를 이삭이 영적으로만 받았던 진짜 죽음에로 넘겨주셨을 때, 우리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원한 생명으로 그와 함께 일어날 때를 (롬 8:32; 6:5 등) 지시했다.75
그러나 여기서 과연 이삭과 그리스도 사이에,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 그런 모형론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반문해 보았으면 한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이 본문에 대한 모형론적인 해석은 무리하게 본문의 의미를 확장시킨 알레고리에 가까운 해석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 문제를 열려진 과제로 성경신학회의 회원들 앞에 제기한다.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계시의 의미와 계시사를 중요시한다면 본문을 무리하게 확대하여 해석하고 하는 일들은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작업에서 성경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바른 모형론적인 관계를 잘 이끌어 내려고 해야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리하게 곡해하는 잘못된 모형론은 피하면서 신학적 진술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조직신학이 성경신학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 가운데서 계시사에 유의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2) 구속사에 근거한 신학: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의 구성과 언약 신학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도움은 조직신학 구성에 있어서 구속사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보스나 그를 따르는 개핀은 "구속사적 전망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든지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필수불가결한 지평"이라고 이해한다.76 계시가 역사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지는 이유는 구속이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실현에 있어서 획기적(ephocal)이기 때문이다.77 따라서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은 곧 구속사에 유의하는 태도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사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신학을 해야 하는데, 구속사에 유의하는 신학은 한편으로는 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리쳐드 린츠가 앞으로 나타날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을 지시하면서 아주 강하게 주장한 요점이다.78
이렇게 까지 구조 전체를 고치지는 않을지라도 조직신학이 구속사의 진전을 유의하면서 작업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은 언약의 진전을 중심으로 신학을 구성해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초기부터 성경신학의 도움을 받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핀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성경의 계시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구속사적 또는 언약적이기 때문이다.79 그러므로 초기부터 언약 개념과 언약 사상을 중심으로 신학적 작업을 해 보려고 하던 개혁파 신학은 코케이우스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서부터 시작하여 계속 선구적인 성경신학을 진전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80 이는 보스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측면을 염두에 둔 개혁파의 언약 교리는 계시사를 구성하려는 첫 시도였고, 오늘날 성경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선구로 옳게 간주될 수 있다."81 이런 의미에서 개핀은 보스적인 성경신학은 개혁주의의 원리인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가장 열매 있고 철저하게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82
(3) 종말신학의 구성
이렇게 구속사에 유의하면 이제 신학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활동이 신약 성경이 종말이라고 부르는 시대 안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신학 활동도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83 보스는 그의 성경신학 마지막 문장에서 "교회가 종말론적 세계에 포함된다"고 하면서, "그 종말론적 세계는 향하여 가는 사물의 질서일 뿐이 아니라, 이미 획득된 사물의 질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아주 명백한 진술을 한다.84 즉, 종말이 이미 실현된 측면이 있으며, 극치에 이를 측면이 있음을 언명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이라는 말은 "신약 시대"라는 의미의 종말이고,85 보스가 "반(半)종말론적"(semi-eschatological)이란 용어를 쓰고 적용할 때의 종말이다.86 즉,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모든 활동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특히 그의 부활과 그의 재림 사이라는 구속사적 맥락87 안에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디 '종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 사용에서나, 우리의 신학 구조에서나, 우리의 개인적 교회적 활동에서 이런 신약적 종말론의 진정한 의미가 잘 드러나야 할 것이다.
5. 나가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의미를 분명히 생각해 보고, 이런 논의의 터에서 조직신학이 개혁주의 성경신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고, 과연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신학은 다른 모든 신학 분과와 함께 성경신학도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성경 주해에 근거해야 한다. 또한 (1) 성경신학이 밝혀 보여 주려고 하는 특별 계시의 역사에 유의하면서 신학적 작업을 해야 하고, (2) 성경 계시가 밝혀 주는 구속사에 유의해서 그 신학의 틀을 구속사를 중심으로 새로 구성하거나, 종합적 방식을 유지해도 구속사적 진전에 유의하여 언약의 역사적 발전을 주의 깊게 추적해 나가며, (3) 우리가 속한 구속사의 시기인 "종말"의 의미에 충실한 작업을 해야만 한다. 부디 우리의 조직신학이 이런 성경신학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역시 주해에 근거해서 성경으로부터 계시의 선, 즉 계시의 역사를 이끌어 내는 성경신학도 조직신학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었으며, 또 얻어야 한다는 것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제시한 보스가 조직신학을 가르쳤었고, 조직신학 책을 쓰기도 했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의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적 가르침에 깊이 뿌리 박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성경신학』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잘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보스는 너무 교의적이었다고 하면서, 이를 개혁주의 성경신학이 극복해야 할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것이 우리가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이 아닐까? 따라서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도 상당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신학적 작업과 조직신학적 작업의 관계는 마치 하나의 해석학적인 순환을 해 나가는 것과 같다. 일단은 주어진 이해[전제, 암묵리의 조직신학]를 가지고 성경에로 나아가서 그 계시의 흐름을 통해 가르침을 받으면(성경신학적 작업), 그 후에 그 가르침 받은 것에 터해서 더 풍성해진 이해를 정리하게 되고(조직신학적인 작업), 이제 이렇게 더 풍성해진 이해를 가지고 또 성경 본문과 씨름하되 그 본문의 계시성에 유의하므로 성경신학적인 작업을 하면서 다시 또 그 결과를 조직화하는 끊임없는 나선형적인 순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보다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리의 점진적 발전이 그 언제 그쳐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조직신학은 결코 완결된 학문(a finished science)이 아니며, 그 과업이 완성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머레이의 말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88 그러므로 좋은 조직신학과 좋은 성경신학은 상호 의존적인 것이지, 상호 배타적이거나 경쟁적인 것일 수 없는 것이다.89 만일 그런 관계에 있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성경신학도, 바른 조직신학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서로 잘 조화되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정상에 이른 조직신학과 정상에 이른 성경신학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합하여 우리의 신학 전체와 교회를 살찌울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Loren T. Stuckenbruck, "Johann Phillip Gabler and the Delineation of Biblical Theolog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2 (1999): 139-57 등을 보라.
2 J. P. Gabler, "Oratio de justo discrimine theologicae biblicae et dogmaticae regundisque recte utriusque finibus," in Kleinere theologische Schriften, ed. T. A. Gabler and J. G. Gabler (Ulm; Stettin, 1831), II, 183-84, cited in Gerhard F. Hasel, Old Testament Theology: Basic Issues in the Current Debate,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1), 김정우 옮김, 『구약신학: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서울: 엠마오, 1993), p. 28.
3 보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하는 성경신학, 즉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그와는 다른 입장에서의 성경 신학에 대한 좋은 비교와 논의로 John Murray, "Systematic Theology,"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4: Studies in Theology (Edinburgj: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2), pp. 11-15를 보라. 머레이는 이 논문에서 다음 네 가지 요점을 제시한다: (1) 성경 자체의 성경관을 버리고,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적 전제를 가지고 하 는 신학적 작업은 성경 신학이기를 그치며(ceases to be biblical theology, p. 12),
(2) 계시의 통일성, 성경의 통일성을 버리고, 다양성을 너머 이질성을 말하는 신학은 성겨 신학의 근본적 전제를 버린 것이고,
(3) 말씀 게시는 무시하고 행동으로서의 계시만을 말하는 신학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며,
(4) 성경 역사, 특히 족장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버려 버릴 수 있는 신학은 성경 신학이 아니 다(p. 15).
4 Richard B. Gaffin, Jr., "Introduction," to Vos'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ed. Richard B. Gaffin, Jr.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80), p. xiv.
5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8), pp. 11-14=이승구 옮김,『성경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p. 28-30. 이하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Vos, Biblical Theology, p. x = p. y의 형태로 하기로 한다.
6 Gaffin, "Introduction," p. xvii.
7 Gaffin, "Introduction," p. xviii. 이 점에 대한 또 하나의 좋은 강조로 Murray, "Systematic Theology," pp. 20f.를 보라.
8 Cf. Hasel, Old Testament Theology: Basic Issues In the Current Debate, pp. 169-202.
9 Gaffin, "Introduction," p. xix.
10 Gaffin, "Introduction," pp. xviii-xix. See also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20.
11 Vos, Biblical Theology, p. 5=p. 21.
12 이런 점에 유의하며 지적하고 있는 글로 다음을 보라. 졸고,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설교", in 『한국개혁신학』 4 (1998), 그리고 허주, "개혁주의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바라 본 성령 이해와 그에 따른 신학적 함축들," 『고려 신학』 제 2 집 (1999), pp. 508-17.
13 Vos, Biblical Theology, pp. 30f.
14 Vos, Biblical Theology, pp. 15f. = p. 32.
15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9.
16J. Barton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er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 House, 1962), p. 22.
17 물론 주해의 구체적인 과정에서 주해가 성경 신학, 즉 이 계시가 어느 시기에 주어진 계시인가를 생각하는 일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때로는 성경신학이 주해에 대해 규정적인(regulative) 역할을 하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cf.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19; Vos, Biblical Theology, p. 15=p. 32). 그리고, 본 논문이 밝히고자 하는 것처럼, 이런 관계, 즉 상호 도움을 주며, 서로에게 규정적인 관계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18 이승구,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1995), p. 7. See also Gaffin, "Introduction," p. xix: "... theology itself ought to be essentially exegetical" and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17.
19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17.
20 Ibid., p. 17.
21 여러 다른 저작 중에서 특히 다음을 보라.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이승구 옮김, 『개혁주의 신학 서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2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amans, 1949), p. 407.
23 Vos, Biblical Theology, pp. 5, 14, 17 = pp. 21, 31, 33.
24 Gaffin, "Introduction," p. xvi: "... revelation comes in a historically progressive fashion."
25 Murray, "Systematic Theology," pp. 15, 16.
26 이런 점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로 졸고,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in 차영배 외,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서울: 태학사, 1999), pp. 398-99를 보라.
27 Cornelius Van Til,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졸역,『개혁주의 신학 서론』(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p. 366.
28 이에 대해서 주어진 다른 해석들로 다음 같은 것들을 언급할 수 있다. (1) 다신론의 반영이라고 보는 견해(Gunkel) (2) 장엄의 복수(the plural of majesty, the royal 'we')로 보는 견해(Keil, Dillmann, Driver, Vriesen) (3) 하나님께서 하늘 궁전에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Philo, Skinner, G. von Rad, Zimmerli, Kline, Mettinger, Gispen, Day, Donald E. Gowan, p. 27), (4) 하나님의 자기 의논의 복수(the plural of self-deliberation or the deliberative 'we')로 보는 견해(P. Jouon, Cassuto, Schmidt, C. Westermann, Steck, Gross, Dion). 이에 대한 논의로 한국성경신학회의 1차 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졸고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설교", in 『한국개혁신학』 4 (1998), pp. 362-70을 보라.
이 중에서 (1)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2)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른 시기에는 장엄의 복수가 나타나지 않으며, 명사의 장엄의 복수는 있지만 동사나 대명사와 함께 나타나는 장엄의 복수가 없다는 히브리 문법학자들의 반대가 있으며, (3)은 이 '우리'에 천사들이 포함되면 사람이 천사의 형상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문제점을 피하면서 (2)와 (3)을 (4)와 함께 주장하고,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본문 가운데서 언급된 '위격의 복수성'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견해가 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2)와 '위격의 복수성'을 연결시키는 견해를 카일과 키드너가 제시한 바 있다. 또한 (4)와 '더 깊은 의미'(the sensus plenior)로서의 '위격의 복수성'을 연관시키는 논의를 Wenham이 제시한 바 있다(p. 28). 그리고 (2)와 '더 깊은 의미'(the sensus plenior)로서의 그리스도의 창조 관여를 연관시키는 논의를 김정우 교수가 제시하였다(김정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 성경의 증거," 차영배 외,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서울: 태학사, 1999], p. 54).
29 이런 무리함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이들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Agustine, On the Trinity, 1. 7. 14, 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Grand Rapids: Eerdmans, 1956), 김종흡 역, 『삼위일체론』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p. 44; Civitas Dei, 16.6;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 227; Donald G. Bloesch, Essentials of Evangelical Theology, vol. 1 (New York: Harper and Row, 1978), p. 48, n. 20.
30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trans. William Hendricksen (Grand Rapids: Eerdmans, 1951; Grand Rapids: Baker, 1977), 졸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 372.
31 Berkhof, p. 86.
32 Van Til, p. 367.
33 Anth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1986), p. 12.
34 Bill T. Arnold, Encountering the Book of Genesis (Grand Rapids: Baker, 1998), p. 28.
35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1, trans. James Martin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62; B. B. Warfie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68), pp. 30f.
36 D. J. A. Clines, "The Image of God in Man," Tyndale Bulletin 19 (1968): 53-103, esp. pp. 68-69; G. F. Hasel, "The Meaning of 'Let Us' in Gen 1:26,"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3 (1975): 58-66, esp., pp. 65f., cited in Wenham, p. 28.
37 Clines, p. 68.
38 Derek Kidner, Genesis,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1 (Leicester, England and Downers Grove, Ill.: IVP, 1967), p. 52: "... and this fullness, glimpsed in the Old Testament, was to be unfolded as trinity, in the further 'we' and 'our' of John 14:23 (with 14:17)."
39 Kidner, p. 34.
4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p. 134.
41 Robert P. Lightner, The God of the Bible (Grand Rapids: Baker, 1978), p. 74.
42 Lightner,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6), p. 47.
43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19.
44 Francis A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in A Christian View of the Bible as Truth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2), 문석호 옮김, 『기독교 성경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 94.
45 Meredith G. Kline, "Genesis," in New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70), p. 85.
46 John Skinner, Genesis,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1 (Second Edition, Edinburgh: T. & T. Clark, 1930), p. 87.
47 Donald E. Gowan, Genesis 1-11: From Eden to Babel, ITC (Grand Rapids: Eerdmans, 1988), p. 60.
48 Kidner, p. 72. 해밀턴도 비슷한 언급을 한다. Hamilton, p. 207: "It is probably reading too much into this verse to see in the coats of skin a hint of the use of animals and blood in the sacrificial system of the OT cultus."
49 Vos, Biblical Theology, pp. 156f. = p. 176.
50 Dillmann, Die Genesis. Von der dritten Auflage an erklart von A. Dillmann (6th ed. 1892), cited in Skinner, p. 87.
51 Kidner, p. 72.
52 Gerhard von Rad, Genesis, Old Testament Library, trans. John H. Marks, revised by John Bowden (London: SCM, 1972), p. 96. 이와 비슷한 입장을 나타내는 해석으로 Walter Brueggemann, Genesis,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p. 50도 보라: "The cursed ones are protected. The one who tests is the one who finally provides (3:21; cf. 22:1-14). With the sentence given, God does (3:21) for the couple what they cannot do for themselves (3:7)."
53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1 (Waco, Texas: Word Books, 1987), p. 85: "Just as man may not enjoy a direct vision of God, so God should not be approached by man unclothed"; John H. Sailhamer, "Genesi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 (Grand Rapids: Zondervan, 1990), p. 58.
54 John Calvin, Genesis, Calvin's Commentaries 1, trans. John King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Grand Rapids: Baker, 1993), p. 182.
55 이에 대한 카일의 해석은 상당히 절충적이라고 할 수 잇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을 다 시사하면서 매우 절충적인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 그래서 이 하나님의 행위는 희생 제사들의 토대(foundation)를 놓은 것이다. 비록 이 첫째 옷 입히심이 우리들의 궁극적 '옷 입음'(고후 5:4)을 예표하는(prefigure) 것도 아니고, 가죽옷이 의의 겉옷(the robe of righteousness)을 예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Keil, p. 106).
56 Scofield Reference Bible, pp. 10-11.
57 Skinner, p. 105. 그에 의하면 Fr. Tuch, Commentar uber die Genesis (2nd ed. 1871)에서도 이런 견해가 제시되었다고 한다(p. 105).
58 Skinner, p. 105: "....the whole manner of the narration suggests ... that the incident is conceived as the initiation of sacrifice - the first spontaneous expression of religious feeling in cultus."
59 von Rad, p. 104.
60 Brueggemann, p. 56: "Essential to the plot is the capricious freedom of Yahweh.... we must resist every effort to explain it.... Life is unfair. God is free."
61 Hamilton, p. 224.
62 히브리서를 따라서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로 Calvin, Driver, Dillmann Konig Kyle M. Yates, Kidner, Kline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해석에 반대하며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이유가 희생제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스키너는 제사 드리는 이들의 성향을 강조하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라고 말한다(p. 105).
63 Kidner, p. 75: "It is precarious to claim that the absence of blood disqualified Cain's gift."
64 Kline, "Genesis," p. 86.
65 See also Kyle M. Yates, "Genesis,"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go: Moody Press, 1962), p. 9.
66 Cf. Ibn Ezra; Philo, Sacrifices of Abel and Cain 13.52-53; 20.72, cited in Hamilton, p. 224.
67 Keil, pp. 110, 111.
68 Wenham, p. 104.
69 Sailhamer, pp. 61, 63. See also Keil, p. 110.
70 Skinner, p. 104. 스키너는 또한 가인의 제물이 히브리 제의에서 '첫 열매'(the first-fruits, ????????????: 출 23:16, 19; 34:22, 26; 민 13:20 등)를 드린 것과 유비적인 것이라고 한다(p. 104). 그러나 카일은 가인이 "첫열매"(????????????)를 가져오지 않은 것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신 문제가 있다고 한다(Keil, p. 110). 해밀턴은 가인의 제물은 ????????????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점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는 이 점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도 바르게 지적한다(Hamilton, p. 223).
71 본문 가운데서 언급된 세 가지 중요한 해석 외에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로 추론된 이상한 이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자연 가운데서 자라는 것을 인공적으로 경작한 것보다 선호하신다는 견해(Josephus), (2) 하나님께서는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이 보다는 세상과 접촉해 사는 유목민을 더 애호하신다는 견해(Gunkel), (4) 아벨의 제물이 더 향기로 왔다는 감각적 견해(S. Levin, "The More Savory Offering: A Key to the Problem of Gen. 4:3-5," JBL 98 (1979), p. 85) 이상은 Hamilton, p. 224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5) 인생사에 항상 있는 공평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기자의 대답이라는 견해(Gowan, p. 67).
72 이에 대한 논의로 졸고,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설교", pp. 371-72를 보라.
73 대표적인 예로 Vern Poythress, The Shadow of Christ in the Law of Moses (Brentwood, Tennessee: Wolgemuth & Hyatt, 1991). 이에 대한 논의로,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서평을 보라(『개혁신학 탐구』, pp. 391-95, 402).
74 Kidner, pp. 142f.
75 Keil, p. 253. 이렇게 논의하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말로 이를 자명한 듯이 전제하는 글로 Robert J. Sherman, "Toward a Trinitarian Theology of the Atonement," SJT 52 (1999), p. 363, n. 63도 보라.
76 Gaffin, "Introduction," p. xx.
77 Vos, Biblical Theology, p. 6=p. 22; Gaffin, "Introduction," p. xvi.
78 Richard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a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79 Gaffin, "Introduction," pp. xv, xvii.
80 이런 언약 신학에 대한 좋은 정리들로 John Murray, "Covenant Theology,"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4, pp. 216-40; The Covenant of Grace (London: Tyndale House, 1954);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p. 293-301; 그리고 졸고, "언약과 성경신학"과 "언약에의 이해", in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pp. 157-66을 보라.
81 Vos, "Hebrews, the Epistle of the Diatheke,"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4 (1916), p. 60= in Redemptive History, p. 232.
82 Gaffin, "Introduction," p. xviii.
83 이 점에 대한 논의로 졸고, "종말신학의 프롤레고메나," in 『개혁신학탐구』 (서울: 하나, 1999): 13-39를 보라. 또한 래드, 『마지막에 될 일들』 (서울: 엠마오, 1983)에 대한 "역자 후기"를 보라.
84 Vos, Biblical Theology, p. 402=p. 442.
85 Vos, Biblical Theology, pp. 303f.=p. 336;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18, n. 2.
86 Ibid., p. 401=p. 441. See also Vos, Pauline Eschatology (1930; Grand Rapids: Baker, 1979).
87 Cf. Gaffin, "Introduction," p. xix: "... the redemptive-historical context or epoch defined one the one side by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by his return on the other."
88 Murray, "Systematic Theology," p. 6. See also p. 7.
89 이런 바른 관계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D. A. Carso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The Possibility of Systematic Theology," in Scripture and Truth (Grand Rapids: Zondervan, 1983), pp. 91ff.를 보라.
이승구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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