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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공병호 칼럼

조종사의 세계

 1038 2012-09-21
연구를 지속시키는 것은 열정이며, 그 열정에 부채질을 하는 것은 자존심과 자부심이다.
   생리학 교수로 계신 한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자신이 군의관 생활을 했던 청원군에 소재한 항공의학적성훈련원 
생활을 회상하면서 적은 글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1. 나는 당직 근무를 하는 조종사에게 그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비상 출동 대기조에 있었다고 답하였다.
참고로 출동 대기조는 수상한 선박이나 비행기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출동
할 수 있도록 밤에 부대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나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로부터 진정한 무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웠다. 
2. 조종사들은 죽음을 옆에 두고 산다.
비행장 근처 관사는 비행기 소음이 끊어지면 관사 전체가 불안에 떤다.
그건 또 누가 죽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행사고 소식이 들리고
관사 정문에 지프차가 나타나면 관사 주민들의 호흡을 멎는다.
차가 천천히 돌아 어느 관사를 향하면
다른 관사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차가 닿은
관사 주민들은 새파랗게 질린다.
3. 차는 서너 개의 입구 중 하나 앞에 멈춘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장교가 5층 관사의 어느 집 대문을 두드리기까지
사람들은 긴장을 풀지 못한다.
옛날 F5 제공호나 F4 팬텀이 나오기 전에 F86 세이버가 공군의
주력기였을 때 이러한 풍경은 드물지 않았다고 했다.
4. 그래서인지 조종사 가족의 삶은 특별하다.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지 않음은 물론이고
일상의 대화중에도 '떨어진다'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부부싸움을 하고 싶어도 비행을 앞두고서는 절대 금물이다.
심지어 꿈자리가 사나우면 부인들은 대대장실에
직접 비행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전화를 걸 수 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조종사의 몸 상태를 불문하고
비행을 하지 못하게 한다.
첨단과학으로 운영되는 부대라도 어쩔 수 없다.
5. 조종사들은 술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는 것도 금물이다.
먹기 싫어도 아침은 꼭 먹어야 한다.
어디 멀리 놀러 가지도 못한다.
항상 부대 근처에 있어야 한다.
공군은 이런 조종사을 위해 부대 내에 위락시설을 갖춘다.
골프 연습장이나 골프장이 바로 그것이다.
6. 수영장, 볼링장, 탁구장도 마찬가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부대 내 골프장을 비난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 내 시각을 바꿨다. 
그들은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
7. 의사들도 전문가들이고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
나는 조종사들을 통해 전문가가 무엇인지 배웠다.
환자도 안 보고 연구만 하는 나는 어떤 전문가인가?
과연 나는 목숨을 걸고 연구를 해봤는가?
대답은 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아실 것이다.
나는 조종사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 전문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출처: 안승철, (내 인생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궁리, pp.16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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