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한국전쟁 당시 71명의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포항전투에서 16세의 나이에 숨진 고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 요약본이다.
'포화속으로'는 이 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전쟁의 처참함, 동족간 전쟁의 이유에 대한 의문, 휴머니즘적 반전의식... 이 편지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이미 세계 모든 전쟁영화를 통해 무수히 반복된 주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 진정성 때문이다. 중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쟁의 한 복판에 내던져진 고독한 실존이 저벅저벅 가슴 속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포화속으로'는 이 편지의 진정성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진정성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건 아니다. 분명 영화는 그런 부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다. 강박만 있고 역사의식의 한계는 명확하니, 어떻게 되겠는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처참함은 표현해야 겠는데 스타일리쉬한 화면은 포기할 수 없고, 북도 같은 인간으로 그려야겠는데 장르물 영웅담도 버릴순 없고, 휴머니즘도 중요하지만 애국주의도 넣고 싶고... 영화는 이 양날의 칼을 쥐고 모두 소유하려고 허둥거리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최악의 길로 간다. 양날의 칼까지 담을만큼 그릇이 되는 것도 아니면서.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잔뜩 안고 이도 저도 아닌 자세를 취하는 이 영화, '골빈 마초 마마보이 꽃미남'을 연상시킨다.
▲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획기적 전투씬. 캬... 멋있다. 그림 좋다. 슬픈건 모르겠고 영상미는 끝내준다.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감독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건 스타일리쉬한 전투씬이 아니었을까. 한국전쟁이니 이념이니 역사니 실존적 고뇌니... 이런 것들 평소 관심 없다가 그냥 딱 헐리우드 전쟁영화 감상을 통해 축적된 전쟁에 대한 이미지에 의존해, 그림좋은 대작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연출을 맡게 된 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끝내주는 전투 씬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과히 한국 전쟁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주얼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될수는 없지 않은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단지 기술이 아니라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신기원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포화속으로'는 멋진 영상은 계속 펼쳐지지만 창의적이지는 않다. 더욱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의 비극적 처참함을 전달하기 위한 '리얼'에 초점을 맞춘 결과라면, '포화속으로'는 뮤직비디오같은 예쁜 그림을 찍어내기에 바쁘다는 점이다. 과잉으로 느껴지는 음악도 일조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다리가 폭파하는 와중에 피난민들과 화염을 뒤로하고 김승우가 혼자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대목이다. 현실 전투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일 뿐 아니라, 그 암담한 현실을 가지고 한가하게 겉멋내고 있는게 한심하다. 그러니 무슨 캐릭터에 동화가 되겠는가. 어쩌라고? 지금 네가 폼 잡을 때냐? 뮤직비디오 찍냐? 이런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장면 이 영화에 쫙 깔렸다.
▲ 다리가 폭파하는 와중에 피난민들과 화염을 뒤로하고 김승우가 혼자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장면. 지금 폼 잡을 때냐? 뮤직비디오 찍냐?
몰입을 방해하는 뮤직비디오형 영상미, 솔직히 말하면 '포화속으로'의 단점도 아니다. 블록버스터니까... 그냥 선과 악 단순한 대립에 그림 좋으면 된거다. 북한군이 뿔 달린 괴물이 아니었다는 다 낡아빠진 깨달음은 슬쩍 흘리면서, 결국 그들을 적으로 대상화시키는 것 이상으로는 발전시키지 못하는 역사의식의 한계나, 전쟁은 왜 해야 하나 회의적 고민을 하면서도 영웅적으로 싸우자고 고취시키는 빈약한 세계관은 비난할 거리에 끼지도 못한다. 그런 비난은 너무 사치다.
이 영화는 세계관의 빈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영화로서 기본적인 것을 갖추지 못하는 차원이다. 드라마도 없고 캐릭터도 없다. 파편적인 이미지만 가득할 뿐이다. B급 전형적 캐릭터라 할지라도, 캐릭터의 맛을 잘 살리는 것이 이 같은 장르물의 진정한 오락거리다. 그런데 맛은 커녕 캐릭터 자체가 희미하다. 최승현이 분한 모범적이고 진지한 오장범, 권상우가 연기한 모자 삐딱하게 쓰고 규율을 무시하는 구갑조의 캐릭터나 이 둘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방식은 진부함의 극치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길게 욕할 마음 없다. 말했듯이 그건 사치다. 김승우가 분한 휴머니스트 국군 장교 강석대는 없어도 상관없는 캐릭터인데다 차승원이 맡은 북한군 대장 박무랑은 자기 모순이 가득하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71명의 학도병의 영웅담을 그리는 이 영화가 학도병들을 공들여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연도 없고 뚜렷한 성격도 없고 특기도 없다. 얼굴 클로우즈업만 하면 인물 심리묘사하는 줄 아는... 그런 초딩틱한 연출로 영화는 진행된다. 몇몇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가 누구인지 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이래놓고 우리보고 같이 울어달라고?
▲ 학도병들 중 대표 인물들도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없다. 권상우는 '노는 애'라지만 넌 왜 모자를 삐딱하게 썼는데? 전쟁이 장난이냐!
포항여중 전투는 흥미로운 점이 많은 소재다.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50발이라는 무기로 학도병 71명이 북한의 유격부대와 싸웠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11시간 반 동안 총 4차례의 교전으로 북한군 60여명, 학도병 48명이 숨졌다. 도대체 어떻게 정식 훈련도 받지 않은 소수의 인원이 그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웠단 말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구갑조의 람보 같은 행동이나 다수 학도병들의 자살폭탄테러적인 영웅적 면모들은 오히려 그 전투의 처참함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다.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M1소총보다 한 뼘 큰 정도의 10대 소년들은 실탄이 떨어지자 적이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든지 터져서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음... 이 증언 한줄이 2시간짜리 영화보다 당시 처참함을 더 와닿게 한다.
최승현은 기반이 허술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 외 인물은 연기를 논하는 것 조차 무의미하다. 연기를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가치관이 이런 영화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출연 배우들에게 실망이다. 멋진 뮤직비디오 2시간 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아 참,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명대사가 있다. 권상우가 맡은 구갑조가 학도병으로 첫 입대할 때 장교의 한 마디. "학생 맞아? 학생치곤 늙어보이는데?"
▲ 박진희는 왜 나왔을까? 단역일 뿐만 아니라, 이 장면 이 인물 자체가 불필요하다. 차라리 이런 무의미한 장면 넣는 시간에 학도병 한명의 사연이라도 더 설명하지 .
마지막으로 이 영화 리뷰에서 사치라고 생각되는 세계관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71명 어린 목숨의 희생은 전쟁의 비극이다. 이념적 사상을 외치며 죽는 영화속 어린 북한군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면, 남한의 학도병들도 박무랑의 대사처럼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위한 총알받이"라는 시각이 가능하다. 학도병들은 10대 특유의 영웅주의와 집단주의, 또 남한의 반공교육, 그리고 남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의 한 복판에 놓여진 운명적 상황에 내몰려 희생자가 됐다는 것이 현대적 역사관이다. 민간인 사상자들과 더불어 무엇이 그들을 희생시켰는지 뼈아픈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영화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런 화두를 슬쩍 깔아놓는 얕은 수를 쓰면서 결론적으로는 그들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몰아간다. 항복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으로 전투에 임하는 무리한 설정은 운명적 상황의 희생자임을 축소시키고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관객에게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을 말하는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이들처럼 국가를 위해 싸우라고 고취시키는 꼴이다. 희생을 미화하는 것은, 또 희생을 하라는 것 아닌가. 세상의 모든 희생은 비극이고 그 희생을 강요한 보이지 않는 권력에 분노해야 할 문제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라는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를 생각하면, 이건 학도병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배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강화하는 영리한 헐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포화속으로'는 불편한 이데올로기를 설득하는 것마저 벅찬, 엉성한 영화라는 점이다.
'취미기타 > 낚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1장 붕어낚시의 매력 (0) | 2010.10.12 |
---|---|
이외수의 고수 (0) | 2010.09.18 |
[스크랩] 올라타기 (0) | 2010.05.31 |
[스크랩] 보령 수부저수지 (0) | 2010.04.14 |
[스크랩] 인평지 (0) | 2010.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