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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공병호 칼럼

'7년 전쟁'의 교훈

 
'그들이 육로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순신
 658 2009-05-13
   '이순신'하면 진부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진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주제를
이순신이야말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대대적인 '경제 건설 프로젝트'의 지도자로서 재해석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은 어떻게 임진왜란과 같이 기습 전쟁이 빠져들게 되었을까?라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 전역에서는
    전선 건조와 징집령으로 대소란이 있었다.
나고야에 침공 기지를 건설하였고 부산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대마도에서
15만 명의 군대와 수천 척의 병선이 수일동안 대기하였다.
그런데도 조선 땅에서는 아무도 이를 몰랐다.

2. 일본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훤히 알고 있었다.
    이즈음 조선 땅에는 수천 명의 일본 거류민이 체류하고 있었고,
일본의 어선들은 수시로 조선의 바다로 몰려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3. 왜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조선 시대 일본인의 입국과 교역을 위해 설치했던 장소로,
상관이자 영사관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면 된다.
특히 부산포와 제포, 염포 등 삼포에 왜관을 설치하고는 항거(상주)왜인을
거주도록 해 주었다.
항거왜인은 조선인과 별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장사나 어로행위에 종사하였다.
심지어 불법으로 땅을 사들여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이즈음 조선 땅에 왜인의 숫자는 최대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4. 조선 땅에 왜관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조선 상관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이 양국 간의
심각한 정보 불균형을 불러왔고, 이는 7년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5. 당나라 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방처럼 일본의 혼슈나 규슈, 대마도 등지에
   조선인들이 수백 명씩 거주하는 상관이 존재하고 있었더라면
소규모 기습은 몰라도 7년 전쟁과 같은 '대규모 기습 공격'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6. 이때 중국은 일본에 대해 조선보다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복건성 사람으로 일본 땅에 살고 있던 허의후라는 인물이
친분이 있던 상인을 통해 중국측에 정보를 전달하였다.
또 일본을 드다들더 진신이라는 상인도 일본의 관백이 명나라를 침공하려
하는 데 조선을 선봉으로 삼으려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7. 조선이 일본 본토까지는 아니었지만 대마도만이라도 잘 챙겼더라면
    일방적인 피습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대마도는 7년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치권을 지닌 섬으로써
조선과 일본의 중립지대에 가까웠다.
만약 조선이 대마도에 주재하는 관리를 두고 있었더라면 대마도의 종씨 측이
일본의 앞장이가 되어 조선 땅을 침공하는 일을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8. 더 양보하여 조선이 일본의 침공사실을 육지에 도달하기 이전에만
   인지했더라도, 그리하여 부산 앞 바다에서 해상전을 벌였더라면 일본군의
상륙을 완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하더라도 적의 예봉이 크게 둔화되었을 것이다.

9. 조선은 바다를 버린 나라였다.
    자기 손으로 바다 건너편 사람들과 통교하기를 포기한 조선이었기에
일본 열도에서 일어나는 대소란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도 가질 수 없었다.
조선왕조를 해양 포기의 대가를 톡특히 감수해야 하였다.
최대의 국란 7년 전쟁은 바다를 버린 데 따른 1차 시련이었을 뿐이고,
마침내는 바다를 건너온 자본주의의 물결에 휘말려 국권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10. 조선이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방향을 남으로 틀어 해양진출을 시도했어야 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안이 해상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본주의를 국가 지도이념으로 내건 조선의 지도부는 해상 무역이나
어업 등을 말업으로 치부하여 억압하였다.

-출처: 장한식,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행복한 나무, pp.29-33

'그들이 육로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순신
   김종관님, 안녕하십니까?  
  '이순신'하면 진부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진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주제를
이순신이야말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대대적인 '경제 건설 프로젝트'의 지도자로서 재해석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은 어떻게 임진왜란과 같이 기습 전쟁이 빠져들게 되었을까?라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 전역에서는
전선 건조와 징집령으로 대소란이 있었다.
나고야에 침공 기지를 건설하였고 부산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대마도에서
15만 명의 군대와 수천 척의 병선이 수일동안 대기하였다.
그런데도 조선 땅에서는 아무도 이를 몰랐다.

#2. 일본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훤히 알고 있었다.
이즈음 조선 땅에는 수천 명의 일본 거류민이 체류하고 있었고,
일본의 어선들은 수시로 조선의 바다로 몰려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3. 왜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조선 시대 일본인의 입국과 교역을 위해 설치했던 장소로,
상관이자 영사관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면 된다.
특히 부산포와 제포, 염포 등 삼포에 왜관을 설치하고는 항거(상주)왜인을
거주도록 해 주었다.
항거왜인은 조선인과 별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장사나 어로행위에 종사하였다.
심지어 불법으로 땅을 사들여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이즈음 조선 땅에 왜인의 숫자는 최대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4. 조선 땅에 왜관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조선 상관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이 양국 간의
심각한 정보 불균형을 불러왔고, 이는 7년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5. 당나라 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방처럼 일본의 혼슈나 규슈, 대마도 등지에
조선인들이 수백 명씩 거주하는 상관이 존재하고 있었더라면
소규모 기습은 몰라도 7년 전쟁과 같은 '대규모 기습 공격'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6. 이때 중국은 일본에 대해 조선보다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복건성 사람으로 일본 땅에 살고 있던 허의후라는 인물이
친분이 있던 상인을 통해 중국측에 정보를 전달하였다.
또 일본을 드다들더 진신이라는 상인도 일본의 관백이 명나라를 침공하려
하는 데 조선을 선봉으로 삼으려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7. 조선이 일본 본토까지는 아니었지만 대마도만이라도 잘 챙겼더라면
일방적인 피습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대마도는 7년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치권을 지닌 섬으로써
조선과 일본의 중립지대에 가까웠다.
만약 조선이 대마도에 주재하는 관리를 두고 있었더라면 대마도의 종씨 측이
일본의 앞장이가 되어 조선 땅을 침공하는 일을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8. 더 양보하여 조선이 일본의 침공사실을 육지에 도달하기 이전에만
인지했더라도, 그리하여 부산 앞 바다에서 해상전을 벌였더라면 일본군의
상륙을 완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하더라도 적의 예봉이 크게 둔화되었을 것이다.

#9. 조선은 바다를 버린 나라였다.
자기 손으로 바다 건너편 사람들과 통교하기를 포기한 조선이었기에
일본 열도에서 일어나는 대소란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도 가질 수 없었다.
조선왕조를 해양 포기의 대가를 톡특히 감수해야 하였다.
최대의 국란 7년 전쟁은 바다를 버린 데 따른 1차 시련이었을 뿐이고,
마침내는 바다를 건너온 자본주의의 물결에 휘말려 국권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10. 조선이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방향을 남으로 틀어 해양진출을 시도했어야 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안이 해상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본주의를 국가 지도이념으로 내건 조선의 지도부는 해상 무역이나
어업 등을 말업으로 치부하여 억압하였다.
-출처: 장한식,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행복한 나무, pp.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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