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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공병호 칼럼

"나쁜 사마리아인" 서평

                                

                                                                                               2008. 1. 20  월간조선     공병호

 

생각이나 사상 그리고 신념이 행동을 낳는다. 때문에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글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을 빈곤의 늪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대부분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의 글로부터 비롯되었다. 최근 서점가에는 케임브리지대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는 장하준 씨의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지난 해 10월에 선을 보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사회과학서들 가운데 독자들과 편집자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았던 책이다.

우연히 이 책을 읽으면서 풍부한 사례, 방대한 자료, 정교한 논리, 화려한 문체, 그리고 작가의 현 위치 때문에 대다수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주장이 가진 오류나 허점을 쉽게 눈치 채기는 거의 불가능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던 적이 있다. 마침 연말에 도착한 한 기업의 고위 임원 연하장에서 올해 인상 깊게 읽었던 책 두 권 가운데 하나가 장 교수의 책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어둔 것을 보고 누군가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 전에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이 책을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떤 가라고 조언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연초 조선일보의 첫 신문에는 장 교수의 칼럼 ‘진짜 실용주의’ 대통령이 되려면...‘이란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그 중에는 ’작은정부론‘이 고정관념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었다.

“앞으로 출범할 이명박 당선자 팀은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실용주의자라면 정부의 크기는 문제 삼아선 안 된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정부가 무슨 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추진하느냐 하는 것이지, 그 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 작은 정부가 좋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필요하다면 정부 부처를 늘릴 수도 있고 공무원 수를 늘리며 보수도 올릴 수 있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주장은 개방과 무역정책에 대한 장 교수의 독특한 의견 즉, 개방과 한미FTA에 대한 유보적인 생각이다. 특히 개방의 확대가 한국 기업의 도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는 주장을 보고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진정한 실용주의라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유무역이 좋다고 이야기해도,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수준이 비슷한 나라끼리 자유무역을 하면, 시장이 확대되고 서로 경쟁을 통해 자극이 되어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서로 득을 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우리보다 생산성이 3배가량 높은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과 자유무역을 하면, 시장의 확대와 경쟁의 자극을 통해 생산성이 향상되기 전에 우리 기업들이 도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득보다는 실이 더 클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주장만으로도 장 교수의 생각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있다. 장 교수의 책을 짧은 지면에 걸쳐서 모두 다루기는 쉽지 않지만 대개 저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결론 장에서 총 정리하게 마련이다. 이 글은 그의 책 중에서 결론 부문에 해당하는 에필로그에서 거론된 중심 주장들에 대한 논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 교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세상이 더욱 황폐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는 기존의 주류경제학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작은 정부론이나 자유무역 그리고 민영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정책이 계속 실시된다면 30년이 지난 시점에는 대부분의 중, 후진국은 비극적인 상황 즉 자국 산업의 몰락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장에 대항하라’는 것이다. 이는 시장의 문을 닫고 각국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신자유주의는 경제 발전을 어렵게 만들고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능력의 획득을 까다롭게 하는 것”이다. 시장에 대항해서 궐기를 촉구하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유시장은 이미 잘 하고 있는 것에 충실할 것은 지시한다. 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가난한 나라들에게 현재 하고 있는 생산성이 낮은 활동을 계속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런 생산성 낮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나라들이 가난한 원인이다. 만일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 나라들은 시장에 대항하여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보다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시장에 대항하여 보다 어렵고 좀 더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부문에 진입해야 한다.”

물론 벌어들인 것을 소비해 버리기 보다는 저축을 하고 이를 통해서 투자를 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개인이든 국가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장 교수와 필자는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누가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점에 이르면 장 교수의 생각과 필자의 의견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예를 들어, 장 교수는 미국인들은 19세기에 자유무역을 실시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1960년대에 세계은행의 반대를 무릎써고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도요타는 30년 넘게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오늘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 사람들 즉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자유무역이나 작은 정부라는 주장을 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선진국들이 특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문호를 걸어 잠근 상태에서 특정 산업을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오늘날 후진국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늘날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 보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차별적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과 똑 같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상품을 누가 사 주어야 하는가. 당연이 그것은 선진국이 사 주어야 한다. 만드는 것은 문을 잠그고 하고 파는 것은 상대방의 문이 열린 상태를 이용해야 하는 것을 정리해 보면 선진국들이 일방적인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두고 장 교수는 책의 말미에 선진국의 도덕적 의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컨대 장 교수는 자유무역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 같은 것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으로 오늘날과 같이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진국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선진국들은 마땅히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장 교수는 “자유무역을 하게 되면 가난한 나라들은 당장 자신 보다 한 수 위인 외국 생산 업체들과 경쟁해야 한다. 결국 가난한 나라의 회사들은 새로운 능력을 제대로 익혀 보기도 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예를 들어, 한국의 교육산업을 보자.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 거의 50년을 해 왔는데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필자의 단상에 떠오르는 사례만 하더라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국가의 정교한 계획에 의존하였던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은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특정 산업에서 1, 2개의 내셔널 챔피언과 같은 기업을 육성하려는 유럽의 산업정책들도 대부분 실패하였다. 국가의 깊숙한 개입에 의한 산업의 성장 정책은 동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면 오히려 실패사례가 많다는 생각한다. 결국 장 교수의 주장은 오랫동안 유행해 왔던 경제개발론의 유치산업보호론을 다시 리바이벌하는 셈이다.

여기서 크게 장 교수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산업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정부의 관료들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한국의 성공 사례를 예를 들기를 좋아하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한국은 아주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본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관료들의 개입을 통해서 성공한 나라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다섯 마리 용과 같은 극히 드문 사례에 속하지 않는 가. 게다가 한국은 대외개방정책과 맞물려고 동시에 관료의 개입이 있었더라고 실상 그 내용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는 점이다. 외관은 관료 주도였지만 실상은 기업인 주도의 성장 정책이었다.

경제 개발 단계에서 관료들의 역할에 관한 것은 이미 사회주의를 둘러싼 지식 논쟁 즉 ‘과학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 사이의 구분이라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검증된 사례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관료들 능력을 어떻게 보는 가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을 정확히 안다면 위의 신문 칼럼 처럼 작은 정부론 그 자체를 도그마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장 교수의 글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로 ‘개명된 이기주의’에 대한 호소이다. 선진국들이 진짜로 선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약한 나라에게 유리한 경기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약한 나라에게 유리하도록 ‘경기장을 기울게 만드는 것’이 공정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해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보다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국가가 선진적인 나라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지적소유권 보호를 완화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또 부자 나라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가난한 나라들에게 기술을 이전해 줌으로써 이들을 도울 수도 있는데, 이는 가난한 나라의경제 성장을 돕기도 하지만, 지구 온난화 방지라는 각별한 필요에 좀 더 부합된다는 추가적인 이득도 거둘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대목은 보통의 독자들에게 무척 심정적인 동조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본다. 한마디로 선진국들이 부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자국 시장은 활짝 열어제치고 그들이 후진국에 진출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마음이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게다가 선진국들 역시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심각한 경제문제를 갖고 있다. 실업률의 해결이나 재정적자 문제들은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라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성장할 때는 좋은 시절이었으니까 후진국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희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을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올바르지도 않다.

거래란 결국 주고받은 관계이다. 주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 선진국이 잘 사니까 일방적으로 시장, 기술, 특허 등을 후진국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는 지적 유희로는 즐거운 일 일수 있지만 실현 불가능하고 정의롭거나 올바른 주장이라 할 수 없다. 학자들은 시혜를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실상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원래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에 휠씬 큰 무게 중심이 실리지 않는가.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 우리는 불공정한 무역을 하였다. 당시 상황은 선진국들이 일방적으로 시장을 제공하는 환경이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을 걸어 잠그고 보조금과 각종 지원책을 사용해서 운 좋게도 여러 분야에서 자국 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당시에 선진국들은 형편이 넉넉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불공정 무역의 대상이 되는데 그다지 큰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 역시 공정한 무역에 이루어져 한다는 의식이 강하고 이미 제도적으로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WTO나 자유무역협정 등이 이미 하나의 환경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국의 당시의 상황은 최대한 이용한 특별한 국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를 지금 일반화하기는 힘들고 현실화 될 수도 없는 아이디어다.

장 교수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지만 실행되기 어려운 주장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선진국들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나라들이 어떤 산업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후진국들은 어떤 나라들인지 그리고 그들의 산업 가운데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정하기 어렵다. 결국 자유무역을 통해서 시장의 규모를 전체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정책이 선진국이나 후진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다. 장 교수의 논리라면 중국이나 인도도 후진국이니까 나라의 문을 닿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무역을 통해서 최대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들이다. 돈과 공장 그리고 자본이 각국에 물려들고 있고 그 과정에서 모방에서부터 시작된 기업들은 글로벌 컴퍼니로 변화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 오토바이를 만드는 일본의 혼다가 진출하는 것을 막고 순수 중국 기업을 육성하는 정책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장 교수의 논리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혼다가 진출하고 관련 기술들이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중국 자체 기업들로 이전됨으로써 중국업체 하이난 선디로(新大州)와 합작한 신다로혼다라는 기업이 등장하고 이 기업이 2007년에 중국에서 117만대의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비슷한 이야기는 인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인도의 합작사인 히어로혼다는 2007년 한 해만 하더라도 398만대를 파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자유무역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전을 통해서 후진국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게 된다. 오토바이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약진은 자유무역의 효과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장 교수는 세상을 참으로 따뜻하게 낭만적으로 세상은 본다.

“가난한 나라들이 자국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면 경기자들 간의 수준 격차가 좁아지게 되고, 그 결과 경기장을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이 더 이상 불필요해지는 알이 보다 쉽게 앞당겨질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머리에서나 구축될 수 있는 낭만의 세계이다. 현실의 경제 주체들은 그가 개인이건 기업이건 나라건 간에 격차를 확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장이다. 격차 확대를 향한 욕망과 행동이 표출되는 곳이 시장이고 이를 통해서 문명은 끊임없이 나아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현실은 현실이고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물론 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지식인이 선진국의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는데 대해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그의 주장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무역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고, 은연중에 경제적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작은 정부이나 민영화는 잘못된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이라고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식인의 제대로 된 책무가 아니라고 본다. 끝으로 장 교수의 주장에는 개인이나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선진국과 후진국이란 도식이 대결구도로 등장한다. 분석의 틀로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 경제활동은 개인이나 기업이 한다. 선진국의 개인이나 기업이 후진국의 어떤 나라나 누구를 위해 어떤 양보를 해야 한다고 보는 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책의 단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후속 작업들이 주류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들에게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 드물게 영어 서적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장하준 교수의 활발한 활동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온 주류 경제학의 검증된 이론이나 주장을 선진국의 이익을 위한 이론이라고 폄하하는 부분이나 그런 주장을 펼치는 지식인들 모두가 자기 생각 없이 선진국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란 주장에 대해 좀 더 사려 깊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장 교수의 주장들이 우리 사회의 지적 기반을 만들어 내는데 끼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하게 된다. 이는 ‘생각이 가난하면 삶도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는 평소의 믿음 때문이다. ‘가난한 생각’이 한국 사회에 확산되는 것에 장 교수처럼 뛰어난 머리와 혜박한 지식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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