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오리의 어미로 살다간 ‘동물학의 아인슈타인’ | ||||||
생물학자, 새 지평을 열다(7) 콘라트 로렌츠 | ||||||
![]() 하루 종일 에이미의 뒤를 졸졸 따르며 자신의 행동을 따라하는 새끼 기러기들을 보며 에이미는 차츰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그러나 기러기가 성장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경찰이 찾아와 야생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은 불법이라고 통지했기 때문. 기러기를 떠나보내야 하는 에이미와 아빠는 기막힌 방법을 생각해냈다. 기러기들이 에이미만 따라다니는 점을 이용하여 에이미가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기러기들을 남쪽으로 데리고 가는 아이디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경비행기 운전법을 배우고 기러기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 끝에 드디어 에이미는 16마리의 기러기와 함께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을 가로지르며 남쪽으로의 여정에 오른다. 이 같은 줄거리를 지닌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서 새끼 기러기들이 에이미를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는 것은 바로 각인효과 때문이다. 알에서 막 부화한 새들이 처음 본 대상을 평생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효과는 영화에서처럼 비행술을 전수하는 데 이용될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새들의 개체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흰두루미는 4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인데, 모두 한 무리를 이루어 서식하고 있다. 만약 전염병이 돌거나 독극물에 중독되기라도 하면 이 새들은 멸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을 멸종에서 구하기 위해선 무리 중 일부를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시켜 별도의 무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실제로 미국흰두루미 복원팀은 지난 2004년 각인효과를 이용해 키운 두루미 13마리를 경비행기로 데리고 1천930㎞나 비행해 플로리다주 국립야생보호지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거위나 오리 같은 가금류를 비롯한 조류에서 특히 많이 나타나는 각인효과를 밝혀낸 이는 ‘동물학의 아인슈타인’이라고도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이다. 콘라트는 1903년 11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돌프 로렌츠는 ‘선천적 엉덩이 기형 치료법’을 개발하기도 한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문인들과 교류를 나누는 여유롭고 교양 있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아돌프는 늦둥이 아들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1922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보내 의학을 공부시켰다. 이듬해 빈 대학교로 옮긴 콘라트는 의학 공부를 계속해 1928년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의학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콘라트의 관심은 늘 동물의 관찰에 가 있었다. 그는 1927년 자신이 기르던 갈가마귀에 대한 관찰 일기를 ‘조류학회지’에 발표해 동물학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의사자격증을 취득하고도 개업하지 않고 동물학 공부를 계속한 그는 마침내 1933년 모교인 빈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의학 공부는 그에게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 바탕이 되었다. 스승인 페르디난트 호흐슈테터 밑에서 비교해부학을 배운 콘라트는 동물의 행동과 심리도 생리학과 해부학에서처럼 진화의 결과라는 비교행동학이란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것이다. 까마귀와 같은 새들의 사회성 행동을 연구하여 비교행동학의 기초를 닦은 콘라트는 1935년 오리와 거위 새끼의 학습 행동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어미 오리가 낳은 알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다르게 부화시켰다. 한 집단의 알은 어미가 부화시키고, 다른 집단의 알은 자신이 직접 부화시킨 것. 두 번째 집단에서 부화한 새끼 오리는 그를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오리와 거위 새끼들이 부화한 직후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그들을 낳아주었거나 기른 부모를 따라 배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새끼 오리의 결정적인 시간대는 부화 후 36시간 정도인데, 부화 후 13~16시간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즉, 결정적 시기 이전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결정적 시기 이후에는 주위 환경이 발달에 영향을 준다고 콘라트는 생각했다. 이처럼 새끼 오리가 어미 역할을 하는 개체를 따르는 추종 행동에 대해 그는 각인(imprint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새로 부화한 청둥오리 새끼 앞에서 어미 오리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면 새끼들이 그를 어미라고 여기고 따른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연구활동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결정적 시기에 얼굴 도장을 한번 찍는다고 해서 각인효과를 거둔 어미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끼 거위와 오리들의 어미 역할을 하기 위해 함께 호수 위를 떠다니고 숲속 길을 헤쳐 다니며 먹을 수 있는 먹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했다.
그러던 중 콘라트는 당시 동물생리학자인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틴버겐을 만난다. 그 후 둘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연구를 해 동물행동학의 영향력을 확산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내과의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포로가 된 콘라트는 1948년 풀려나서 조국으로 돌아와 알텐부르크 비교행동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며 연구를 재개했다. 이후 독일의 막스플랑크 행동생리학연구소장을 맡아 1973년까지 연구에 전념했다. 회색기러기가 알을 굴리는 습성을 대해 연구한 콘라트는 마침내 1973년 동물이 단독으로 행동할 때와 집단으로 행동할 때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에 관한 연구 공로로 니콜라스 틴버겐 및 독일의 칼 본 프리쉬와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동물행동학자에게 주어진 첫 번째 노벨상이었다. 그 후 그는 젊었을 때 독일 나치를 위해 쓴 가축과 인간을 비교하여 나치의 우생학적 인종주의의 논거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한 논문이 문제가 되어 유명세를 치루기도 했지만, 그는 그때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종 보존보다 개체 보존이 연구대상이 된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은 집단을 중시하는 독일 나치의 사회 개념과 비슷한 그의 비교동물학의 한계이기도 했다. 콘라트는 의사 전달에 능해 강연과 저서 등을 통해 평소 자신의 신념을 주저 없이 표현해 내는 데 익숙했다. 따라서 연구 과정 중에 일어난 일들과 단상을 정리한 ‘솔로몬의 반지’ ‘인간이 개를 만나다’ ‘공격성에 대하여’ ‘현대 문명이 범한 여덟 가지 죄악’ 같은 저서들로 그는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섰다. 말년에 그는 인간을 사회를 구성하는 동물의 하나로 생각하고 그의 생각을 인간 행동에 적응시키기도 했다. ‘공격성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사람의 싸움이나 전쟁과 같은 행동은 선천적이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 욕구에 대해 적절히 이해하고 준비함으로써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 동물을 기르며 살았던 알덴베르크의 저택에서 기거하며 회고록을 구술하던 그는 1989년 2월 빈의 병원으로 옮겨져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
/이성규 편집위원 yess01@hanmail.net | ||||||
2007.10.03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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