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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영재교육

“우리나라, 에디슨 과학에만 너무 빠져 있다”

                                                                                         사이언스 타임즈
원로물리학자 김정욱 교수가 던지는 苦言 (4)
수학이라는 수의 학문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신묘막측(神妙莫測)하게 풀어나가는 물리학.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물리학은 과학의 최고봉으로 일컫는다. 물리학 속에는 아름다운 우주와 자연의 신비가 있고 인생이 있다. 하늘의 혁명 코페르니쿠스가 나왔다.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탄생했다. 새로운 과학시대를 열고 있는 현대과학 양자역학도 그렇다. 우주탐사도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다. 핵폭탄과 수소폭탄을 비롯해 대량살상 무기도 아름다운 물리학에서 나왔다. 기초과학이 이처럼 중요하다. 21세기의 화두는 창조(creativity)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국제경쟁력에서 과학교육이 나갈 길을 짚어보기 위해 원로 물리학자 김정욱 교수를 특별히 초대했다.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학문활동을 하고 있는 김 교수는 미국의 명문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40년간 물리학을 가르쳤다. 고등과학원의 초대 및 2대 원장을 지낸 그는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역사를 지켜본 증인이다. ‘원로 물리학자 김정욱 교수’를 통해 김 교수가 던지는 쓴 소리와 그의 인생 이야기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 [편집자 註]


“자연의 이치를 알려면 먼저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아야”

▲ 김정욱 교수는 에디슨 과학에만 너무 빠져 있는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현실을 아쉬워 했다.  ⓒ
김정욱 교수는 기초과학자다. 물리학이라는 자연과학과 더불어 일생을 살아 왔다. 그는 과학에 대한 철학이 있다. “자연과 친하라”. 그렇게 특별한 철학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연현상에 대한 경이로움이나 지적 호기심 없이는 훌륭한 기초과학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자연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호흡할 때 비로소 훌륭한 기초과학이 나온다.

왜냐하면 기초과학(basic science)은 자연(nature)에서 출발한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과학자는 자연을 사랑하는 순수함(purity)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기초과학인 훌륭한 순수과학(pure science)이 탄생할 수 있다.

기초를 의미하는 기본(basic), 순수(pure), 자연(nature)은 같은 선상의 이야기다. 그래서 기초과학자는 거짓말이라곤 전혀 하지 못하는 순수한 자연과 친해야 한다. 자연과 친하지 않으면서 기초 과학자라고 뻐기는 사람은 김 교수에게는 별로 달가운 동료가 아니다. 자연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과학이라는 학문세계에 빠져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체의 호기심에 빠지는 일은 과학자의 훌륭한 조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조차 사랑할 수 있고, 떨어지는 낙엽조차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훌륭한 과학과 위대한 과학자가 탄생한다. 자연 속에서 과학을 배워라. 자연 속의 과학자가 돼라. 김 교수의 종교에 가까운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 속에서 한국이 과감히 내놓을 수 있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김정욱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 ‘지적인 방황’은 창조를 생산하는 산고(産苦)의 과정”

물리(物理)는 말뜻 그대로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다. 물리학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묘(神妙)하고 불측(不測)하게 전개되는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고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학문에 입문한 학자에게 자연과 우주에 대한 사랑과 지적 호기심은 필수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그가 즐겨 쓰는 ‘지적인 방황(intellectual wandering)’도 그렇다. 자연과 친숙해지는 한 과정이며 중요한 학문과정의 일부다. 창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방황이 필요하다. 방황은 창조를 잉태하고 있다. 새로운 창조를 낳기 위해서는 산고(産苦)의 아픔이 뒤따라야 한다. 그 아픔이 바로 김 교수가 지적하는 지적인 방황이다.

김 교수는 기초가 모든 것의 원천이 되듯이 과학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김 교수만의 독특한 아집이 아니다. 현실이 그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다. “훌륭한 공과대학은 기초과학이 훌륭한 대학입니다. 미국의 MIT나 칼텍(Caltech)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대입니다.

그러나 그 대학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소 다릅니다. 기초과학이 아주 우수한 대학들입니다. 수학, 물리학, 우주론 등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합니다. 이들 대학의 자존심은 기초 과학에 달려 있습니다. 유명 공대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경쟁의 대상은 바로 기초과학입니다. 기초과학 연구를 놓고 어디가 우수한지 경쟁하는 것이죠.

▲ 미국의 과학기술 요람 MIT. MIT가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인정받는 것은 기초과학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
경쟁에 대한 결과는 주로 노벨상이 말을 해줍니다. 유명 공대들이 노벨 과학상을 휩쓸잖아요? 알다시피 노벨 과학상은 모두 기초과학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리학상도 그렇고, 화학상도 그렇습니다. 생리의학상도 마찬 가지입니다. 무엇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 주창한 사람이나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사람이 받는 게 노벨상입니다.

왜냐하면,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들기까지 방법의 이치와 이론을 제공하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탕을 제공하는 게 기초과학입니다. 그래서 기초과학이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한 학문입니다. 과학기술의 경쟁력도 그렇고, 미래를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학입니다.

“아직도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은 낮아”

그런데 이러한 중요성에 비해 그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10년 전 제가 고등과학원 원장으로 왔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지요. 정부의 지원도 그렇고, 인식도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약합니다. 심지어 공과대학에 몸 담고 있는 교수들조차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또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기초과학인 물리학이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응용물리학으로 기울고 있다는 겁니다. 아주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그게 일시적인 현상만으로 끝나길 바랍니다.

지금도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분위기가 ‘당장 나타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나타나는 과학’은 몇 십 년 전에는 통했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40년 동안 몸을 담고 있던 존스홉킨스 대학은 의과대학으로 명성이 아주 높은 대학입니다. 최고 수준이죠. 그래서 노벨 생리의학상과 같은 노벨상 수상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기초과학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왜냐하면 기초과학 없이는 훌륭한 과학기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대학이 기초과학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응용과학이나 공학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상당한 수준이 아니라 최고 수준이죠.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수한 기초과학에서 우수한 응용과학이 탄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교육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창의력과 지식은 다릅니다. 완전히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학교와 과외학원, 그리고 집만을 넘나들면서 배운 지식의 축적은 창의력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아마도 공부는 못하지만 별을 보고, 헤엄치고, 들판을 쫓아 다니는 어린 학생에게 더 창의력이 있을 겁니다. 주입과 베끼기는 창의력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아닙니다.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다”

가장 중요한 창의력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너무 부족합니다. 모두들 21세기의 가장 큰 경쟁력은 창의력이라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도 창의력이 있는 학생들의 수는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고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식의 축적만이 필요하고 창의력을 갖춘 학생은 발붙이기가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 전등을 발명한 것은 에디슨이다. 그러나 전등의 발명을 가능케 한 것은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다.  ⓒ
교육정책이 그래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릴 때나 학교 때 꿈을 갖지 못하는 사회가 돼 버렸습니다. 자연 현상을 직접 목격하고, 천문대 같은 곳에 가서 망원경으로 지칠 때까지 관찰해 보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그리고 웬만하면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런 속에서 창의성이 나오는 거 아닐까요?

기초과학은 말 그대로 모든 과학의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거죠. 저도 거기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군대에 입소하는 사람들이 왜 논산 훈련소에서 힘겹게 훈련을 받겠습니까? 고된 군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기초체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저 기초를 위한 기초과학만을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컴퓨터도 중요하고, 휴대폰도 다 중요합니다. 좋은 제품 만들어서 많이 팔고 그래서 돈 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응용과학은 기본이 충실하고 잘 훈련된 건강한 기초과학에서 나온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기초과학 교수가 응용과학 학생들을 가르쳐”

저의 경험입니다. 사실 미국의 유명한 공대에서는 과학시간에 응용과학 교수들이 아니라 기초과학 교수들이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초과학자들이 공학자들을 가르치는 것이죠. 물론 공학 교수가 공학을 가르칩니다. 공학자들에게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기초과학은 주로 기초과학자가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칼텍에서는 1학년 학생 모두 물리학과에서 물리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응용이란 응용을 다시 응용할 때도 나오겠지만 역시 기초에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나라 공과대학 교수들도 그렇다는 걸 많이 압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고, 또 현실적으로 그것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류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학 하면 에디슨을 너무 많이 생각합니다. 특히 학생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발견(discovery)이 아니라 발명(invention)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많죠. 다시 말해서 물리학이나 수학, 생물학, 화학과 같은 기초과학을 생각하지 않고 에디슨의 백열전등, 전화, TV, 축음기 등을 생각하고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김 교수는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관련 맥스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 주었다. “19세기 전자기이론을 완성한 영국의 맥스웰이 연구를 더 하려니까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구비 때문에 재무장관을 만나서 전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한참 듣고 있던 장관이 뭐가 뭔지를 전혀 알 수 없어서 ‘아 그게 무엇인데 우리가 지원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촛불과 가스밖에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자 맥스웰은 ‘장관님, 제가 연구한 이론은 나중에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세금을 걷어 들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계기가 될 겁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할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지원해 주세요’ 하고 다시 애원했다고 합니다. 응용과학만 했다면 초와 가스등의 품질이 좋아지고 발전했겠지만 전기 사용은 상당히 늦어졌겠지요?

발견은 기초과학의 일이고, 발명은 응용과학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발견 뒤에야 비로서 발명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발명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코페르니쿠스도 그렇고, 케플러, 갈릴레오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공대는 기초과학이 우수한 공대”

▲ 기초과학은 자연과학이다. 자연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기초과학은 탄생하기 마련이다. 김정욱 교수의 철학이다.  ⓒ
그들은 이미 자연계에 그저 존재하고 있던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자연의 신비한 법칙과 현상을 발견한 거죠. 자연은 아주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기초과학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찾아내면 그 이론을 응용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죠.

에디슨은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응용과학자라고 해서 뭐가 어떻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에디슨의 응용이 중요했고 먹혀 들어갔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창조를 요구하는 21세기는 에디슨의 과학이 아니라 기초과학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란 기초에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수학도 그렇고 물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풀다가 답이 안 나올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풀 궁리를 해야 합니다.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서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초지식이 튼튼해야 하는 거죠.”

과학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과 구름은, 없으면 안달이 날 정도로 필요한 휴대폰과 컴퓨터와 무관한 게 아니다. 자연계의 현상이 그렇고 기초과학과 응용과학도 그렇다. “기초를 터득한 다음 응용하라!”는 만고의 진리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이다. 기초과학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기초과학에 대해 좀 더 장기적이고 깊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다.(계속)


김형근 편집위원은 부산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코리아헤럴드와 중앙일보에서 국제부, 사회부, 산업부, 문화부 등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활동했다. 2004년 사이언스타임즈에 발을 디뎠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찾은 200여 명이 넘는 과학자와 석학들과 직접 인터뷰 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만 30명이 넘는다. 미래학에도 관심이 많아 (사)유엔미래포럼의 미래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20여 명이 넘는 세계적인 미래학자들과 직접 만나 토론했다. 저서로는 ‘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를 정리한 <1%영어로 99%과학을 상상하다(효형출판)>가 있다.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2007.10.11 ⓒScienc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