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위원 조선일보 2007.09.18
- 양상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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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니 모래성이 보인다. 바로 우리 모습이다. 우리가 경제 규모로는 세계 13위가 됐다고 해도 그 성(城)은 모래로 쌓은 것이다. 거짓말과 겉포장이 판치는 사회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을뿐더러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운명이다.
지금 청와대 위아래부터가 온통 거짓말이다. 거짓말 홍수 속에 살아온 국민들에게 신정아와 변양균의 거짓말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인과 가짜 박사들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13년 전 검찰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사기 사건 건수에서 한국은 일본의 35배였다. 다른 종류의 거짓말인 뺑소니는 한국에선 당시 1년간 6855건이었는데, 우리보다 자동차가 14배 많은 일본에선 단 한 건도 없었다.
필자의 사건기자 시절 경찰서 조사계엔 늘 사건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산더미 중에 아무 서류나 꺼내 읽어 보면 거의 전부 사기 사건이었다. 70년대 청년 재벌을 꿈꾸다 망한 한 기업인은 회고록에서 “한국 사기꾼은 소련에서 핵무기도 빼올 수 있을 것”이라고 경험담을 토로했다. 신정아 사건은 지금도 우리 사회가 크게 달라진 것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신정아는 가짜 겉포장을 하고 살았다. 겉포장에 사활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력 없고 노력 안 해도 무슨 대학 졸업장 하나면 평생 남보다 유리한 게 우리 사회다. 밖에선 신정아를 욕하고, 집에 들어가선 아이들에게 간판 따라고 닦달하는 게 우리다. 우리나라가 성형 수술 왕국이 된 것도, 세계에서 화장품이 제일 많이 팔리는 나라 중 하나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스위크가 내는 세계여행 안내책자에서 한국의 특징을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고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자기를 어떻게 봐 주느냐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우리는 기본이 안 돼 있다. 기본이 없는 모래성이 어떻게 되는지는 스포츠가 가장 쉽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일본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졌다. 한국 선수들이 겉포장만 프로이고 실력은 일본 아마추어에도 미치지 못한 원인은 기본기의 차이였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실패한 선수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도 기본기 부족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17세 이하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 청소년팀은 사상 최대의 지원을 받고도 예선 탈락했다. 기본이 된 선수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대회 시작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스타라는 선수는 인터뷰에서 “한국 K리그는 느려서 영국 프리미어리그만 봐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어린 선수가 기본 없이 겉포장만 그럴듯한 우리 모습 그대로였다.
올해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기적의 우승을 차지해 국내 언론에도 소개된 사가키타 고교는 대회 참가 4081개교 중에서 들러리 중의 들러리였다. 전용구장도, 선수용 기숙사도, 우수 선수 장학금도 없었다. 야구 특기생이 올 리가 없었다. 주전 선수 평균 키가 170㎝도 안 됐고, 감독은 대학 야구 선수도 해 본 적이 없는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출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기적을 일으킨 비법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것도 없었다. 연습의 절반은 달리기 등 기초 체력 다지기와 기초 동작 훈련이었다. 학교 시험 때는 1주일간 연습도 안 했다. 비결이 뭐냐는 쏟아지는 질문에 국어 선생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시간을 잘 지킨다. 예의를 지킨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 인간으로서, 학생으로서, 운동선수로서 기본을 지키게 했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가키타 고교 같은 야구팀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감독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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