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
본문:창(9:1~7)
드디어 대홍수의 심판이 끝났습니다. 물이 모두 빠지고 땅은 정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과 방주안에 있던 모든 동물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은
날이었겠습니까? 비도 그치고 지겹던 방주의 생활도 끝났습니다. 방주는 꼭
필요한 곳이지만 영원히 머물러 있을 곳은 아닙니다. 광야도, 세상도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지만 영원히 머물러 있을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는 순간에 경험하고 목격한 것은
무섭도록 참혹한 폐허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려 1년동안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나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방주에서 1년만에 나온 노아가 부딪힌
현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장미빛을
가진 황홀한 곳이 아닙니다. 현실을 알면 알수록, 세상을 알면 알수록 현실과
세상은 참혹한 곳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대홍수의 심판은 생각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비참한 폐허였습니다. 이 기막힌 절망과
폐허속에서 노아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8장 20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기막힌 현실에서 노아가 선택한 일은 ‘제사’였습니다. 사람이 캄캄한
절망을 경험할 때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위한 예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더 이상 나갈 길을 잃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다니고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이런 상황은 다릅니다.
암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회사가 부도직전에 있을 때, 집을 잃고 길거리로
쫓겨났을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갑니다. 군대에 들어가서 하늘과 땅을 혼돈할 만큼
혼비백산하게 매를 맞고 일주일을 보낸뒤 첫주일을 맞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모아 교회에 데리고 갈 때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교회의 겉모습만 보아도 눈물이 납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았을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감동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는 그 전에
드렸던 예배와 너무나 다릅니다. 이 예배는 그전에 잘못 드렸던 예배에
대해서도 회개하게 합니다.
노아가 드린 예배가 이런 예배였습니다. 1년동안 세상은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방주밖으로 나온 그들은 폐허가 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외에는
생각할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정결한 짐승을 잡아 정성스럽게
제단을 쌓았습니다. 진실함과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노아가 드린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그저 왔다갔다하면서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진지한 만남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지만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이고,
교리적이고, 교파적이고, 의식적인 예배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신도 세상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드렸던 예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막힌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이 세상을 보십니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으로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나’를 변화시켜
예배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나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런 예배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민족은 피난시절에 울부짖으며 성경책을 안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어머니 품에 안겨서 피난 나온 세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렴풋이 그 전쟁 상황을 기억합니다. 저의 아버님은 예수믿는
가족의 장로였고 어머니는 집사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신앙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저희는 선교사댁의 한 움막에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한끼라도
먹을 수 있으면 행복했습니다. 저도 형님과 함께 떡을 팔아야 했습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글자
그대로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감격적인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가난했고, 순수했고, 진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보리고개를 넘기면서 가난을 경험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어려움 속에서 한국교회에 가장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깡통을 들고 주먹밥을 먹으며 천막을 치고 살아야 했던 그때 가장 크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고 교회로 물밀듯이 몰려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80년대를 넘어오면서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9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성장률이 제로퍼센트입니다.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과 사치와 오만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고 오만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IMF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는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실직자가 생기고 상황이 심각해지니까 사람들은 정신을
차립니다. 지금이야 말로 집중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할 때인 줄
믿습니다. 예배하면 회생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살게 됩니다. 가난과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다면 6~70년대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6.25와 같은
상황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으시고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치스러운 예배나 부요한 예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며 간절한 예배를 원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 기막힌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장 21절을 한번 더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장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노아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오십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예배를 드린다 할 지라도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 제사
그러나 생명을 걸고 진실하고 마음이 가난한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오십니다.
21절을 통해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땅을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내가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자를 바꿀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바꿉니다. 참된
예배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곳에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예배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기 바라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9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우리는 9장 1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육하는 복', '번성하는 복', '땅에 충만한 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저주받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하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때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교제하며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복받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복을 누리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 믿고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나라와
민족과 전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받기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복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의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 하신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다시 하시는 이유는 땅이 심판을 받아 노아와 그
가족들만 남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창조의 복을 잊지 않고 말씀
그대로 주실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내
약속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다. 안심하고 나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마귀때문에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은 계속됩니다.
완전한 복과 불완전한 복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에서 말씀하셨던 복과 9장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9장 2절을 보십시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창세기 1장의 말씀과 다른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들이 인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을 주어서 인간을
보호할 것이며 이 모든 짐승들은 인간이 길들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좋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을 때는 하나님과 동물의 세계는 서로 갈등이
없었습니다. 하나였습니다. 죽이거나 싸움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죄가 온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가족이었고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에 하나님과 인간은 갈라졌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사람과
자연은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절에서 발견하는 것은 짐승들이 인간을 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들이 인간을 해하지 못하도록 두려운 마음을 주어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입니다. 이것은 금이 간 복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복은 원래 완전한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받은
복은 불완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래서
노아의 복은 기다리는 복입니다. 언젠가 이날이 올 것입니다. 이 날에 대해
이사야는 이사야 11장에서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곧 이런 날이 올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지 않고 인간이 짐승들을 길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이날을
대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35장에도 이와 같은 약속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안에 참된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올
때부터 이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회복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에덴은 회복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이 험악한 세상에 우리가 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의 금이 간
복, 불완전한 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대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첫째, 하나님께서 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동물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번째의 약속은 이제 육식을 먹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육식을 먹음으로 인간은 건강해졌지만 불완전합니다.
3절을 보면 홍수이전에는 채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과 30절을 보면 인간과 동물의 양식은 채소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육식을 하지 않은 것은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죄가 없었을 때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음식은 채소였습니다.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먹는 것은 죄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채소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암을
고치거나 질병을 고치는 성분은 풀에 있습니다. 풀을 연구하면 인간의 건강을
찾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건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전에는 채소만으로도 인간의 식사가
가능했는데 저주를 받음으로 곡식만으로는 식사가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식이 허락된 이후부터 인간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생겼습니다. 채식을
먹을 때는 게걸스럽게 먹지 않습니다. 육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잔인해지고 음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먹는 것을 위해 살지 말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지만 제한을 두셨습니다. 고기를
피채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피채 먹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피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를 먹으면 인간은 잔인해집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고기에서 빼라는 말은 인간의 분노와 저주를 빼라는
말입니다. 육식을 하십시오. 그러나 육식을 게걸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채소를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먹는 것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음식을 검소하게 먹어야 합니다. 맛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쾌락주의입니다. 음식은 건강을 위해서
먹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음식을 남기면 안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음식을 분수에 지나치게 먹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은 나누어야 합니다. 음식을 화려하게 배불리 먹는데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소하게 먹어야 합니다. 저도 본의 아니게 비싼 음식을
대접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부담이 있습니다. 북한의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집니다. 혹시 여러분이 먹지 않아도 될 때는 적게
먹고 남은 것으로 헌금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비전헌금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건강을 주실 것이며 마음에 평안도 주실
것입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가야 할 중요한 법칙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은
살인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은 자살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입니다.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자살한 사람도 처형해야 하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에 처형할수 없을 뿐이지 사형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아시대에는 이미 인간의 몸 속에 죄와 살인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5~7절말씀에 동물과 동물사이에 피를 흘렸다는 말은 죽였다는 말입니다. 만일
A라는 동물이 B라는 동물을 죽이면 A라는 동물도 죽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약에서는 사형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수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막으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실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면
사람들은 살인을 굉장히 조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노아를 보호해 주었고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복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을 주고 너를 핍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런 복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의
복은 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복을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노아에게 주신 복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까지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땅끝까지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역사의 심판주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는 이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사랑도, 음식도 나누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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