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 쿠마가와 마루(the Kumagawa Maru)를 타고 가다 기소가와(木會川) 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만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불태웠다. 목포로 향하는 배에는 그의 번역조사 조한규와 아펜젤러가 동행시킨 여학생 한 명, 광산기술자 미국인 보울비(J. F. Bowlby), 그리고 2, 3명의 일본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한밤중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항해하던 배는 마주 오던 배와 충돌하게 되었다. 곧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와 아펜젤러는 갑판으로 올라왔다.“아펜젤러는 매우 흥분하여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배에서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안전보다도 동행했던 조사와 여학생, 이 두 명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그 현장에서 구출된, 아펜젤러를 지켜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그가 생명을 잃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한국인 비서와 자기 보호 아래 있던 어린 한국 소녀를 불러 깨우기 위해 그들에게로 갔기 때문이었다”라고 전한다.
친구를 살리려다 갑판에 오를 수 있는 황금 같은 1, 2분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복음을 가지고 온 아펜젤러는 마지막 순간까지“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자처럼 당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 위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열정의 이 감리교인은 남을 위해 섬기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비록 44세의 일기로, 한국선교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1902년 5월, 세상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17년 동안의 한국선교를 이렇게 정리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나는 한국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시오"라고 유언했다.
아펜젤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선을 사랑한 최초로 우리나라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인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