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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기타/책 읽기

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

  • 탁주같은 문체로 그린 신선 고을들
  • 이호신 글·그림 | 학고재 | 447쪽 | 1만5800원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2007.09.14 22:23
    • “쏘아 놓은 화살처럼, 급한 물살처럼 빠른 세월에 홀로 화첩과 그림붓 챙겨 떠나는 나그네는 쓸쓸한 만큼 은혜롭다. …살가운 정은 변함없이 뜨겁고, 소박한 삶일수록 나눔과 사랑이 샘물처럼 고여 있는 사실을 실감하기에, 나는 그 증언의 붓길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탁주처럼 몸을 휘감는 문체와 손에 잡힐 듯한 풍광을 담아내는 탁월한 붓 솜씨뿐이 아니다. 이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다시 놓기 힘든 것은, 도대체 우리 땅 곳곳에 아직도 이렇듯 끈끈한 인연과 정감 넘치는 사람들의 사연이 살아 있는 줄 미처 몰랐다는 놀라움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도시화의 물결이 미치지 않은 그 그림 같은 마을 속에, 바랑 하나 달랑 메고 연고도 없는 마을을 찾아 인연을 맺으려는 나그네에게 더운밥 잠자리 선뜻 내 주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호가 현석(玄石), ‘검은 돌’인 저자는 한국화가다. 20여 년 전부터 우리 국토를 순례하며 화폭에 담아 온 그는 그림과 답사기를 함께 실은 ‘길에서 쓴 그림일기’(현암사),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숱한 가람의 진경을 수묵화로 담아 낸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해들누리)를 냈다. “존재가 살아 숨쉬는 터전과 그 숨결을 붓끝으로 심화하는 것이 화가인 나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던 그의 발걸음은 이국 땅으로도 이어져, 지난해에는 ‘나는 인도를 보았는가’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 ▲ 저자가 수묵담채화로 담아 낸 전남 곡성 가정마을의 전경. /학고재 제공

    • 이 책은 지난 2002년부터 5년 동안 월간 ‘사람과 산’과 ‘산’에 기고했던 글과 그림을 실었다. 저자는 전국 곳곳의 문화유산과 자연생태, 사찰을 탐사하고 순례하며 돌아다녔던 지난 날들이 결국은 우리 ‘마을’을 다시 보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공동체 마을이야말로 한 지역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며,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삶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순례(巡禮)는, 관광지나 휴양지를 찾아 고속도로를 달리며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인 산하와 마을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간다. 마을에 갈 때는 가능한 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 그리고 반드시 마을에서 먹고 자며, 주민들과 함께 지낸다.

      전남 곡성 지리산 가정마을로 들어서며 그는 말한다. 겨우내 몸을 푼 섬진강은 은빛 비늘로 여울지고, 산자락의 동선은 어깨춤을 추다가 제 그림자로 강을 애무한다. …가정마을은 섬진강을 끼고 1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고달면으로 접어들어 이른바 심청마을에서 건너편 두가교를 건너면 나온다. 마을 산은 지리산 자락이 포개져 섬진강으로 흘러내리는 곳에 있다…. 이어 그는 정월대보름 달집을 태우는 행사를 위한 준비와, 어제 당산제를 지낸 예성초등학교 이야기를 한다. 그 학교는 이미 폐교가 됐다. 지리산을 바라보며 교가를 부르던 아이들은 저 섬진강 물 따라 흘러가고 말았는가.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 그곳에 살고 있었다. 소망을 담은 달집태우기, 남녀가 모여 풍물을 치는 가운데 불꽃을 피운 달집은 흐르는 강물 위로, 하늘로 타오르는 장엄한 축제였다. 오영식 이장의 아내 유점례씨는 장구의 명인이었다. 오곡밥과 나물 반찬을 차린 밥상을 놓고 부엌으로 간 아내에게 이장은 “자네도 이리 오소”라며 정겹게 부른다. 3남매를 둔 이장 내외는 막내딸은 일본에 유학 보내고, 두 아들마저 객지로 보냈기에 내외만이 호젓이 살고 있다. 부인은 남편을 어떻게 부릅니까? “시골인께로 ‘어이’ 한당께.” 그것은 속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정다운 목소리였다. 산과 물, 철길과 도로가 함께 달려오는 천혜의 터전인 마을 정경을 담아 낸 수묵담채화는 그저 높은 곳에 올라가 그린 풍경화가 아니었다. 이런 마을 구석구석의 정교한 속살들을 일일이 스케치한 뒤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 낸 종합기록화다.

      약초를 키우며 자연생태민속촌을 가꿔 낸 삼척 신선고을, 도기 문화의 전통을 오롯이 이어가고 있는 영암 구림마을, 필봉농악을 지키고 필봉굿을 되살려 낸 임실 필봉마을, 조상이 남긴 터전을 선비마을과 농촌체험마을로 계승하는 대전 무수천하마을, 쪽빛 하늘에는 낮달이 걸리고 소나무숲은 함박눈을 맞은 채로 있는 우리나라 대표 소나무마을 울진 쌍전마을…. 이렇게 책에 실린 마을들이 모두 30곳이다.

      저자는 말한다. “어느 마을에도 유토피아는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아름다움과 안타까운 현실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곳을 다시 찾아가도 책이 전하는 그 모습 그대로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책 곳곳에서도 마을들이 겪고 있던 급격한 변화를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