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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외로운 남자였다. 일 때문에 바빴고, 그래서 가족과 멀어졌다. 그나마 간만에 가족을 만나려 하면 항상 테러리스트들이 훼방을 놓았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별거중인 아내와 딸을 만나러 L.A에 갔더니 하필 그날은 테러리스 트들이 인질들을 볼모로 돈을 요구하던 날이었고, 공항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던 날은 또 하필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을 장악했다. 더 큰 문제는 불의를 보고 도망가지 않는 그의 성격이다. 적당하게 빠져나와 가족들과 해후하지 못하고, 그는 기어이 웃통을 벗고 땟국물 낀 러닝셔츠차림으로 테러리 스트들과 맞섰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고를 누가 인정해 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매번 마지막에는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아내와 딸의 눈물세례를 받았으나, 이도 잠시 뿐 이었다. 12년이 지난 후, 다시 나타난 존 맥클레인의 모습 또한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이제는 가족뿐만 아니라 직장과 사회로부터도 소외된 50대 대머리 아저씨다. |
<다이하드 4.0>의 첫 부분. 존 맥클레인은 딸이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있는 현장을 덮친다. 맥클레인이 남자친구를 범인 다루듯 다그치자 딸은 진저리를 친다. 12년 전만 해도 쉴새 없는 입담으로 관객들을 유쾌하게 만들던 그가 50대가 되면서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된 것이다. 너무나 뻔한 설정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아빠와 딸의 관계는 이처럼 너무나 뻔하다. 심지어 그의 딸은 아빠가 아닌 엄마의 성을 따르고 있다. 잘 나가는 아빠였으면 또 모르겠지만, 한때 영웅이었던 맥클레인은 현재 뉴욕경찰청의 퇴물형사다. 그럼에도 일은 여전히 가족을 내팽겨쳐야 할만큼 고달프다. 이런 그에게 미션이 떨어진다. 미국의 네트워크를 교란시키려는 천재해커를 무찔러라. 그럼 너는 영웅이 되고 딸과도 화해할수 있으리라. <다이하드 4.0>은 한때 SBS에서 방영된 <특명, 아빠의 도전!>을 떠올리게 한다. 방송사에서 쥐어준 미션을 연습한 후,스튜디오에 나와 성공하면 가족들 모두가 원하는 선물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도 가족들은 ‘괜찮아!’를 연호하며 아빠를 위로했지만 TV를 지켜보는 모든 아빠의 마음은 씁쓸했다. 프로그램의 공익적인 목적은 아빠의 도전을 통한 가족의 화합이었겠지만, 그를 바라보는 아빠들의 목적은 대리만족이었다. 가족들에게 선물을 안기고 가족의 영웅이 되는 아빠라니. 가족이 원하는 모든 선물을 해줄 수 있는 아빠는 대한민국에서 1%에 불과하지만,가족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 1% 안에 들어야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1% 안에 들어도 가족의 사랑을 잡기란 쉽지 않다. 극중 악당인 토마스 가브리엘이 맥클레인에게 하는 대사인 “당신은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 형사야”란 말은 모든 중년아빠들의 눈물을 자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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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클레인의 억울함은 돈 벌어서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모든 아빠들의 억울함과 통한다.“영웅이 돼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총에 맞으면 상관은 토닥거리면서 뻔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고,이혼도 당하고, 아 내는 성을 바꾸고, 애들하고는 남처럼 서먹해지고 매일 혼자밥을 먹게 되지.” 애초에 가족의 사랑과 일의 성공은 양립하기 힘든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맥클레인이 현실의 아빠보다 나은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일것이다. 그는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테러범들과 엮여서 이 생고생을 한다”며 툴툴거리지만 그래도 그는 그런 생고생을 통해 돈이나 선물로도 주지 못한 감동을 가족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맥클레인에게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고 구를 수 있는 체력과 배짱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약, 현실의 아빠들이었다면 어떨까.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에 뛰어들기 보다는 “내가 죽으면 자식들은 어떡하지”란 걱정에 몸부터 사리지 않을까. 자신에게 걸린 생명보험수당으로 남은 가족들이 편히 살 수 있을지부터 걱정할 것이다. 어쩔수 없이 현실의 아날로그 아빠들에게 새로운 도전이란 언제 나 유보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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