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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성공사례 한국스파이렉스사코 박인순,동북아허브 인천공항,삼성 SDS 주혜경,웰스파고-

 

성공사례 한국스파이렉스사코 박인순,동북아허브 인천공항,삼성 SDS 주혜경,웰스파고-리처드코바세비치
한국 스파이렉스 사코 박인순 사장
 
'감동'휘날리는 신바람 경영
 
즐겁게 일하고 화끈하게 논다
직원 감동으로 고객 감동 이끌어내는 독특한 경영철학 '절정경영'
파티에 초대 받은 사람처럼 출근길이 즐거운 곳, 엔돌핀이 샘솟는 회사, 절정경영을 외치는 독특한 회사. 한국 스파이렉스 사코(이후 한사코)가 그런 회사이다. 이 회사의 사장 박인순씨. 한사코는 1978년 창립한 증기 및 유체분야의 마켓리더다. 영국계 회사로 이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회사다. 직원이 감동해야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철학으로 일터에 신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절정경영’으로 여러 기업의 벤치 마킹 사례가 되고 있다.
박인순 사장은 1978년 한사코의 창립 멤버로 시작, 입사 8년째인 1984년 한국 법인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20년간 ‘절정경영’ 이라는 독특한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증기에너지 절약분야의 불모지였던 한국시장을 개척, 한사코를 일본보다 앞선 사코 그룹 내 4위의 회사로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최우수 경영대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사무실은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사무실의 배치, 인테리어, 직원들의 표정을 보면 웬만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말로만 절정경영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도 들었는데 서초동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의심이 사라졌다. 첫 인상은 특별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표정이 밝았고 웃음이 넘쳤다. 뿐 아니라 사무실 곳곳에 걸려있는 그림, 사명과 가치, 직원들끼리 찍은 사진, 한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음반들이 ‘신바람 경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했다.
박 사장은 의사인 아버지와 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부모님은 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려 애썼고 장사해서 돈 버는 것 보다 지식습득을 통해 성공하길 원했다.
원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의사가 되려다 의대 시험에 낙방한 그는 재수 후 공대로 진로를 바꿔 연세대 화공과에 들어갔다. 별로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오히려 의대시험 낙방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공학에 흥미를 느끼지도 못한 채 신시내티 대학에서 화공학 석사까지만 한 후 MBA를 하며 인생의 방향을 전환했다.
기술 집약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지금 되돌이켜 보면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얘기한다. 그의 동생은 예 치과로 의료계의 기린아가 된 박인출 씨.
 
- 마라톤에서 배운 인생과 경영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라톤이었다. 마라톤을 하며 처음 2~3km에서는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일정 거리 이상을 뛰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행복해지는 절정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이 상태를 ‘runner’s high’라고 한단다. 용산고등학교 재학시절 그는 운동선수가 아니었지만 교내 단축 마라톤대회에서 운동을 전공으로 하던 친구들을 제치고 2년 연속 1등을 한 기록도 세웠다. 대학 재학시절에도 교내 축제의 일환으로 벌어진 마라톤 대회서는 1등을 차지했다. 마라톤에 인연을 맺고 즐긴 그는 마라톤을 통해 인생과 경영을 배웠다. 그의 경영철학인 ‘절정경영’ 역시 마라톤에서 얻은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절정경영의 핵심은 이왕 일할 것 즐거운 마음으로 일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생산성도 오르고 성과도 나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감동을 주면, 감동한 직원은 고객을 감동시킬 것이고, 감동한 고객은 또 다시 이 회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한사코의 전 직원은 출근하美뗌?모두 모여 20분 정도 차를 마시는 Coffee Meeting을 갖는다. 차 한잔의 여유도 즐기며, 업무도 확인하며, 하루를 편안하고 여유 있게 시작하자는 이유에서다.
박 사장은 스스로를 파티의 호스트로 자처하며 직원들에게 최대한의 감동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인지 한사코에는 장기 근속자가 많다. 회사를 그만 둘 일이 없는 것이다. 25년 역사에 163명이 근무하는 이 회사에는 10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50여명이나 된다. 남녀차별이 없고 능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여자 부서장도 많다. 여자 직원 중 66%가 기혼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이 회사의 철학은 “재미있게 일하고, 화끈하게 놀자 (work hard, play hard)”이다.
 
- 자기개발 위해 평생학습 실현
박 사장은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제 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1987년 한사코에 근무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미국의 5대 기업 중 한 기업이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한국 지사장 자리를 제안했다. 두 배의 연봉, 최고경영자 과정 지원, 스톡옵션 등등… 그는 이때 처음 스톡옵션이란 말을 들었다. 엄청난 대우를 내세운 유혹이었다. 흔들린 그는 3개월의 여유를 요청하며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본사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다음날 소식을 들은 상사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자신을 스카우트 하려는 회사의 파격적인 조건과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고민하던 상사 또한 상당히 개선된 대우를 제안하며 그를 붙잡았고 갈등하던 그는 한사코에 남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계약한 회사에 다시 번복을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 때도 그는 모든 상황을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를 스카우트 하려던 회사는 그의 번복에도 불구하고 충성심과 정직함에 존경을 표했다. 일생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솔직함과 신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 “몸값은 월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한 몸값이다” 라는 사실도 체득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난히 자기개발에 힘 써 책을 많이 읽는다. 특히 세계 500대 기업의 CEO에 관한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절정경영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의 사무실은 온통 책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서가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책들은 책상 위며 바닥에 까지 널려있다.
그는 평생 공부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1973년 브리지포드 대학에서 MBA를 한 후, 84년 하와이대학 최고경영자과정, 87년 하바드대 최고경영자 과정, 95년 IMD 최고경영자과정 (SSE), 96년 스탠포드대학 성장기업CEO 과정, 2003년 미시간대 마케팅 전략과정 등을 마쳤다.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평생을 학습하는 사람, 그는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글로벌 CEO로 활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 기술교육 통한 시장확대 전략 적중
그는 도전적이며 창의적이다. 증기 및 유체시장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시장에 그가 처음으로 했던 것은 회사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었다. 처음엔 “스파이렉스 사코요? 무슨 스파이 회사인가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브랜드 인지도도 시장점유율도 최악이었다. 이 상황에서 독특한 마케팅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기술교육을 통한 시장확대 전략이 그것이었다. 증기 및 유체에 관한 교육, 이를 통한 에너지 절감 방법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의 이름을 알리고 고객과의 신뢰를 구축했다.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필요한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중요시 한다. KCMC(글로벌 사장들의 모임)와 능률협회 조찬회에 열심히 나간다. 용산고 동창회 부회장과 연세대 화공과 동창회장도 맡고 있으며 관련 업계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나간다. 회사 직원들과의 모임도 중시한다. 사석에서의 별명이 ‘젊은 오빠’ 일 정도 직원들과 친분도 두텁다.
그는 26년은 한국사람으로 살았지만 나머지는 외국인처럼 살았다. 10년 이상 유학을 하고 외국인 회사에서 지냈다. 그래서 하드웨어(겉)는 한국인이지만 소프트웨어(속)는 외국인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는 공사의 구분이 확실하다. 일과 시간에, 공적으로 만나서는 단호하고 냉정하다. 하지만 일과가 끝나고 사석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잘 노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냉정한 낭만주의자’라고도 불린다.
 
- 후학 양성·여행 등으로 제2의 인생 설계
그의 부인은 미술을 전공했다. 그 연유로 회사에는 명화들이 많이 걸려 있다. 큰 딸은 보석디자인을 전공한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고, 작은 딸은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후 변호사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서서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는 후계자에게 조附?일을 넘겨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다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계획이다. 우선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하지 못했던 여행을 하는 것이 1순위다. 벌써 가야 할 곳 50곳을 정해 놓았다. 다음으로는 후학을 양성하는 일. 평생 배운 경영 노하우를 학생들에게도 나누어 줄 생각인데 현재 서울과학종합대학 겸임교수로 몇 군데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공부벌레보다는 다양한 취미와 경험을 가진 사람, 끊임없이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 강압적인 리더십 보다는 부드럽고 친구처럼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 박인순 사장을 만나고 나오며 리더십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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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위에 세운 신화
 
- 동북아 허브공항 프로젝트 -
 
단군 이래 최대 공사로 불리우며 8년 4개월간 진행된 바다 위 대역사!
2001년 3월 29일.. 동북아 최대 규모의 인천국제공항이 문을 열었다.
연간 운항 24만회, 여객 3천만명, 화물 270만톤의 처리 능력을 갖춘 인천국제공항은
기존 공항의 개념에서 탈피해 항공과 정보통신, 물류, 레저 시설 등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기능의 공항이다. 21세기 동북아 지역 중심 공항을 표방하는 인천국제공항은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보여주는 창이 되고 있다.
 
▶ 나라의 미래, 세계적인 규모의 공항을 건설하라!
88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화 국제화 바람이 불면서 국내 항공 수요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1958년 국제공항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김포공항은 이미 항공수송 능력이 초과된 채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더 이상의 확장도 불가능한 상황.. 대안이 필요했다. 당시 해외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개념의 공항들이 건설 중에 있었다. 이름하여 허브 공항(Hub & Spoke)으로 주변 소규모 공항들의 여객 및 화물이 환승할 수 있는 기착지가 되는 공항이다. 세계 물류 및 관광객들의 주요 운송 수단으로 항공 산업이 부상함에 따라 중추 공항의 선점은 국가의 성패와도 직결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장차 동북아 시대를 이끌어갈 세계적인 규모의 신공항 건설은 곧, 국가의 미래를 짓는 일이었다.
 
▶ 1700만평 해상 매립의 대역사! 바다 위에 세워진 새로운 신화
전국적으로 신공항 부지 선정 작업이 진행되고 1990년 6월 인천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바다가 최종 선정됐다. 비행거리 3시간 이내에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가 43개나 있어 동북아 교통의 중심축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부지 면적만 1700만평, 여의도 면적의 18배 크기인 이 바다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강도가 약하고 압축되기 쉬운 연약 지반을 개량하는 것도 문제였다. 92년 11월, 총 *개의 업체가 참여한 대역사가 시작됐다. 간조와 만조 등 물 때마다 겪어야 하는 방조제 토사 유실, 초당 4m의 유속과 싸워가며 물길을 막아 바다를 메우는 작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았다. 엄청난 토사량과 유속을 감소시켜줄 돌이 필요했다. 그러나 천혜의 자연조건이 이 난제들을 해결해주는 열쇠가 됐다. 비행기의 항행에 장애물이 되는 인근 지역, 두 개의 산을 절토하는 과정에서 양질의 돌과 흙을 얻었고, 이것을 방조제 조성과 부지 매립에 이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공사 비용까지 절감돼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대의 트럭이 동원돼 흙과 돌을 퍼 나르며 한켜 한켜 바다 위에 신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된 첨단 건설 기술의 집약체
1700만평의 땅을 매립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가 필요했다. 양질의 모래를 얻기 위해 바다 밖 10킬로미터 해상에서부터 준설선 *대가 연결된 모래 공수작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연약지반 개량을 위해 땅을 다지는 작업이 진행됐다. 작업은 철저한 계획아래 이뤄졌다. 적합한 공법을 찾기 위해 먼저 4개의 공법에 대해 시험 시공을 실시해 샌드드레인 공법과 페이퍼 드레인 공법을 병행 시공했다. 그리고 향후 20년 동안의 지반 침하량까지 예상해 헴머 다짐 공법과 프리로딩 공법을 통해 미리 지반을 강체 침하시켰다.
철저한 계획성은 여객터미널과 교통센터 건설로 이어졌다. 건물의 설계가 끝나고 시공에 들어가기 전, 먼저 3차원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설계상의 문제점을 보완했다. 그리고 수정된 설계 내용을 바탕으로 100분의 1 크기의 축소 모형을 제작해, 다시 한 번 문제점을 확인하고 보완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리프트 업 공법과 트러스트 슬라이드 공법으로 공기 단축과 작업의 안전성을 확보했다.
 
▶ 세계로 가는 새로운 문이 열리다
인천국제공항에는 탑승에서 발권까지 전자동으로 이뤄지는 새로운 통합 시스템이 도입됐다. 그리고 개항 6개월 전부터 시험 운영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점들을 보완해나갔다. 그리고 2001년 2월.. 2만8천명이 동원된 대대적인 시험 운영을 무사히 치름으로써 성공적인 개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러나 처음으로 도입된 통합 시스템이 안정화되지 않아 수하물 처리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항 개항의 성패는 곧 국가의 위신을 판가름하는 일.. 결국 개항을 일주일 앞두고 수하물 처리 시스템과 수작업을 병행하는 준자동 모드로 시스템을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예정된 날짜에 개항을 강행하기로 한다. 한편 공항이전팀에서는 김포공항의 항공기 운행이 끝나는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대대적인 이사작전을 벌인다. 드디어 2001년 3월 29일, 4시 46분.. 방콕발 아시아나항공 OZ3423편이 무사히 활주로에 안착함으로써 장장 8년 4개월간의 대역사가 일단락됐다.
 
▶ 동북아 중추 허브 공항으로의 도약
현재 인천국제공항은 활주로 1개와 탑승동 1개, 여객계류장과 화물터미널 등을 추가 건설하는 2단계 건설을 진행중이다. 오는 2008년 공사가 마무리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운항회수 41만회, 여객처리능력 4천4백만명, 화물처리능력 450만톤의 동북아 중추 허브 공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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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SDS 이사 주혜경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삼성, 그리고 삼성 유일의 전문직 여자 이사 주 혜경. 그녀의 정식 직함은 국내 최대의 시스템 통합 회사인 삼성데이타시스템의 정보기술 아카데미 교육개발센터장. 정보기술 교육 전문가이다. 삼성데이타시스템에 과장 직급으로 스카웃된 지 6년 만에 이사로 발탁, 화제를 모았다. 이미 30년 전에 컴퓨터를 다룬 인물로, 우리나라 정보화의 최첨단에서 특히 프로그램 교육 부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실력 외에도 평범한 주부와 아내로 건실한 가정을 꾸려냈다. 전문직 여성의 성공, 그녀가 헤쳐 간 성공의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 성공 비결 1 : 어려워야 재밌다
73년 300:1을 뚫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프로그래머 공채시험에 합격한 주 혜경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프로젝트에 매달린다. 결혼한 두 아이의 엄마라는 바쁜 처지에도 불구 28살에 이미 팀장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컴퓨터라는 말조차 정착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영문학과 출신임에도 예의 그 열성을 발휘, 전산분야의 선구자가 된다. 이후 KA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전산교육실장으로 전산분야 브레인의 교육에 최 일선에서 일한다. 어려워야 재밌고 힘이 난다는 주 혜경. 결국 그녀는 능력 하나로 89년 삼성 데이타시스템에 스카웃된다.
 
☞ 성공 비결 2 : 외강내유
온통 남자만으로 구성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그녀가 당당히 입지를 확보하기까지 어려운 일도 많았다. 음담패설을 일삼는 동료나 젊은 여자라고 깔보는 공무원까지. 그러나 주 혜경은 그들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만의 당찬 패기와 실력으로 본때를 보여줬다. 절제 있는 말투를 쓰기위해 홀로 화장실에서 연습할 정도로 그녀가 기울인 노력은 각별했는데. 결국 그녀의 외강내유한 자세는 남자 세계에 그녀 자신만의 확고한 위치를 잡을 수 있게 했고 이제 누구도 그녀가 여자이기에 안 된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 성공 비결 3 : 선택에 책임진다
남편과의 첫 만남은 서울대 캠퍼스. 항상 현실 비판적이고 고고하던 모습에 흠뻑 반했던 것인데. 혜경의 적극적인 구애로 맺어진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남편 공부 뒷바라지에 아이들 교육까지. 한 살림을 온전히 책임져야 했다. 신혼 초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까지 되었던 남편은 지금은 카톨릭대 역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제 할일 바쁜 자녀들과 삐삐로, 메일로 연락하며 후배들과의 모임까지 착실히 챙기는 그녀. 자신이 선택한 일에는 항상 책임을 지는 그녀의 모습이다
 
☞ 성공 비결 4 :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
일류대학을 나온 수재였지만 어린시절 그녀는 늦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반 전체에서 구구단을 제일 마지막으로 외울 정도. 그러나 웬만큼 힘든 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우직하고 느긋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자 공부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시절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통증을 너무 잘 참은 나머지 의사들이 병명을 추측할 수 없게 되는 헤프닝까지 벌이기도 했는데. 삼성에 스카웃되고도 뚜벅뚜벅 제 페이스대로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6년 만에 이사가 되었다. 그녀는 지금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으로 또 다른 활동 중이며, 학부모 정보감시단의 핵심 일원으로, 정보사회의 최전선에서 어린 학생들을 각종 음란한 사이트로부터 보호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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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스파고의 CEO 리처드 코바세비치
리처드 코바세비치는 다른 대형 은행들이 줏대없고 소심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만한 발언이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Bernard Condon 기자
경영난에 허덕이던 미네소타주의 소규모 은행을 오늘날 웰스파고(Wells Fargo)로 일궈낸 인물이 냉혹한 협상 전문가 리처드 코바세비치(Richard Kovacevich∙60)다. 웰스의 CEO 코바세비치가 경쟁업체들에 대해 또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가 480억 달러에 인수한 플릿보스턴(FleetBoston)에 대해 코바세비치는 “인수가격이 너무 높았다”고 지적했다. JP모건체이스(JP Morgan Chase)가 570억 달러에 뱅크원(Bank one)을 인수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규모의 경제’를 믿지 않는다. 몸집을 부풀린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더 나빠질 수 있다.”
 
1993년 코바세비치는 노웨스트(Norwest)의 CEO로 취임한 뒤 5년 사이 77개 소형 은행을 인수했다. 98년 덩치가 큰 웰스를 인수하면서 지급한 350억 달러는 떨어진 시장가치에 9%의 프리미엄만 얹은 것이다. BOA의 경우 플릿 인수 당시 프리미엄을 40%나 지급했다.
코바세비치는 청개구리 금융인이다. 80년대 후반 애널리스트들이 주택담보대출 서비스에서 손을 털어야 한다고 역설했을 때 그는 되레 투자를 확대했다. 현재 웰스의 주택담보대출 서비스 규모는 7,490억 달러로 이 부문에서 워싱턴 뮤추얼(Washington Mutual)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90년대 후반 경쟁업체들이 대세에 따라 지점을 감축할 당시 그는 오히려 늘렸다. 경쟁업체들이 BOA의 몽고메리 시큐리티스(Montgomery Securities)와 플릿의 로버트슨 스티븐스(Robertson Stephens) 등 터무니없이 비싼 투자은행 사업부를 인수하기 위해 앞다퉈 나섰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헤지펀드 세컨드 커브 캐피털(Second Curve Capital)의 CEO 토머스 브라운(Thomas Brown)은 “거꾸로 행동하되 결국 옳았다고 판명된 사례에서 코바세비치를 따라갈 인물이 없다”고 전했다.
 
실적은 어떨까. 웰스는 지난해 매출 280억 달러에 순이익 62억 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35억 달러다. 자산규모는 4,200억 달러로 네 경쟁업체보다 작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수익성은 더 높다. 웰스는 미국의 5대 은행 가운데 자산이익률(1.7%)과 순이자마진(5%)이 가장 높다. 지난해 웰스는 신용평가업체 무디스로부터 좀체 받기 어려운 채무신용평가 등급 Aaa를 받았다. Aaa 등급을 받은 은행은 웰스뿐이다.
코바세비치는 대형 은행들이 서로 모방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투자전문가와 컨설턴트들로부터 자사의 움직임에 대해 형식적인 승인을 받아내 일이 잘못됐을 경우 빠져나갈 구멍도 만든다. 코바세비치가 일반 행원들에게 사려 깊고 평범한 CEO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몇몇 동료나 경쟁자들 눈에는 무모하고 거만하게 비친다. 코바세비치는 걱정할 것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이다.. 사랑 받는 게 목표가 아니다. 레이더에 잡히는 사람도 아닐 뿐더러 세간의 이목을 끄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월마트나 홈데포(Home Depot)가 시장을 장악하기 전까지 그들 업체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올해 상반기 300개 정도의 은행이 기업인수에 1,250억 달러를 지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동기 대비 6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에 대해 거침없는 성격의 코바세비치는 암울한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 그가 또 한 번 대어를 낚으려 든다면 나름대로 조건이 붙는다. 값이 싸야 하는 것이다. 환상이 깨지고 주가는 추락한 뒤일 듯싶다. 올해 리파이낸싱 열기가 식으면서 기존 주택담보대출 서비스를 제외한 신규 대출은 당연히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웰스는 경기회복이 가속화할 경우 기업대출에 더 주력할 수 있다. 웰스는 지난 3년 동안 퇴직연금, 주주에 대한 서비스, 대출 등 기업금융에서 연평균 이익증가율 14%를 기록했다. 다른 6개 경쟁업체는 4%에 불과했다.
지점망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웰스가 지점 망으로 당좌예금∙펀드∙증권거래계좌 등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다면 지점망은 금맥이나 마찬가지다.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웰스의 지점은 3,000개로 23개 주에 분포해 있다. 자산 규모가 웰스의 3배인 시티그룹(Citigroup)은 1,000개도 안 된다. 웰스의 인력은 14만6,000명이다. 효율성 운운하는 전문가들은 자산에 비해 직원이 너무 많다고 말할 듯싶다. 그러나 코바세비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매출 대비 제반비용, 즉 비용비율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주시하는 것은 매출이지 비용이 아니다. 그에게는 판매가 관건이다. 소매금융에서 수익성의 핵심은 기존 고객에게 될 수 있으면 많은 상품을 파는 것이다. 웰스의 경우 현재 고객2,300만 명 가운데서 잠재적인 최고 우량고객 수천 명을 골라내야 한다. 이어 수백 개 상품으로 우량고객에게 다가서면서 과거 인수한 은행들의 고객∙커미션∙신용도 공유해야 한다. 이는 우량 은행이라도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은행들은 숱한 인수∙합병에다 끊임없이 시너지 효과를 추구하지만 고객당 판매하는 상품이 보통 두 가지다. 기껏해야 당좌예금과 개인은퇴연금계정에 불과한 것이다. 웰스의 고객은 평균적으로 네 가지 상품을 구매한다. 코바세비치는 이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고객당 판매 상품이 네 개면 한 고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연간 순이익은 275달러다. 6개를 판매할 경우 460달러가 된다. 그러나 고객으로 하여금 금융상품을 하나 더 구매하게 하는데 6년이 걸렸다. 이런 속도라면 코바세비치의 목표는 오는 2028년에야 달성할 수 있다. 물론 웰스가 교차판매에서 훨씬 능숙한 요령을 발휘할 경우 시점은 좀 앞당겨질 것이다.
대형 은행 웰스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코바세비치는 약간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3억5,000만 달러 상당의 웰스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입는 옷들은 10년이 넘은 것이다. 그는 6년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로 출장 갈 때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하곤 했다. 웰스를 인수하고 난 뒤 회사 전용기가 제공됐다.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인구 3,000명에 불과한 워싱턴주 에눔클로에서 성장했다. 야구에서 뛰어난 투수의 자질을 보인 데다 수리에도 밝았다.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부하고 스탠퍼드 대학에 야구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67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 졸업 당시 동점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코바세비치는 애초 완구업체에 들어갔다. 그러다 75년 은행지주회사 시티코프(Citicorp)에 입사해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뉴욕 지점망을 총괄하게 됐다. 마지못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에눔클로 야구팀 응원단장도 맡았다. 에눔클로는 소도시 야구팀에 불과했지만 워싱턴주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코바세비치는 그것이 충천한 선수들 사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만 앉아 있지 않고 지점 직원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단합대회도 이끌었다. 소매금융 총책 승진에서 탈락한 코바세비치는 86년 규모상 시티코프의 15%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소재 노웨스트에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노웨스트는 자산규모 200억 달러로 7개 주에 238개 지점을 거느리고 있었다.
 
코바세비치는 지점마다 자체 손익계산서를 나눠주고 소매점포처럼 1일 매출점검에 나섰다. 현재 대다수 대형 은행이 이를 따르고 있다. 코비세비치는 주택담보대출이 별 돈벌이가 되지 못했던 당시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계속 판매했다. 그는 주택담보대출이 고객으로 하여금 은행과 개인적 유대관계를 맺게 하는 ‘핵심 상품’ 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른 상품 판매도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홈데포는 건전지 판매로 적자가 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고객이 건전지를 사러 나왔다 잔디깎이까지 구매할 수 있지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 사업이 손익분기점에만 머물러있다 해도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자산일지 모른다. 93년 코바세비치는 노웨스트의 CEO로 취임한 뒤 싹쓸이 인수에 나섰다. 인수한 77개 은행 대부분의 자산규모는 10억 달러가 채 안 됐다. 코바세비치는 투자전문가로부터 조언도 받지 않았다. 노웨스트는 98년 16개 주에 걸쳐 3,830개 지점을 갖췄다. 같은 해 11월 피라미 낚시는 그만두고 자산규모 930억 달러인 대어 웰스파고를 낚았다.
 
코바세비치는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웰스 인수 의향을 발표한 뒤 100명의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에게 거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손을 든 사람은 없었다. 웰스 지분 8%를 보유하고 있던 투자업체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의 워런 버핏(Warren Buffet) 회장도 거래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코바세비치에게 웰스와 노웨스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반대했다고 털어놨다.
웰스의 주가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퍼스트 인터스테이트(First Interstate) 인수 이후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실패한 인수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당시 웰스와 노웨스트의 지점은 겨우 2개 주에서 중복돼 있었다. 코바세비치는 대형 상업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두 은행이 융합하는 데 최소 3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비용은 10%줄이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에서는 3건의 또 다른 대형 은행 인수가 진행 중이었다. 네이션스 뱅크(NationsBank)의 휴 매콜(Hugh McColl), 뱅크원의 존 매코이(John McCoy), 퍼스트 유니언(First Union)의 에드워드 크러치필드(Edward Crutchfield) 등 스타급 협상 전문가들은 2년 안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비용도 45% 절감하겠다고 약속했다.
 
승리는 코바세비치의 몫이었다. 그보다 유명한 세 기업인수 전문가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크러치필드는 결국 일찌감치 물러나고 말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웰스는 약속을 지켰다. 다른 은행 인수 후 수익 목표치를 달성한 것은 웰스뿐이었다. 한편 버핏은 2002년 이래 웰스 주식을 300만주 더 매입했다. 같은 해 5월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 주총에서 그는 웰스를 ‘놀라운 실적의 예외적인 은행’이라고 추켜세웠다.
 
코바세비치는 노웨스트를 오랜 전통의 웰스로 편입시키면서 금전적 인센티브를 주는 한편 얼빠진 어릿광대 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당좌예금 신규 개설 고객을 주택담보대출로 연결하는 등 교차판매 실적에 따라 지점장에게 매달 보너스도 지급한다. 직원들이 새로운 판매 기법을 개발해 동료와 공유하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실적이 우수한 사원에게는 라스베이거스나 하와이 여행을 보내준다. 지점들이 ‘최고 팀워크’를 조성할 수 있도록 파티도 연다. 최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나흘 일정의 연례 판매회의가 개최됐다. 당시 코바세비치는 ‘교차 판매왕’ 1,250명 앞에서 자루걸레를 뒤집어 쓰고 비틀스 노래에 맞춰 립싱크하는 쇼까지 연출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직원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어쨌든 직원들도 환호성을 질러대며 즐거워 했다. 코바세비치는 “어릿광대 역이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묘안을 짜내기 위해 끙끙거리는 것보다 회사에 더 크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에서 프라이빗뱅킹을 담당하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소재 웰스 지점 총책으로 일하고 있는 셸리 프리먼(Shelley Freeman)은 이렇게 전했다. “웰스에 입사하면서 어릿광대 기질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다. 직원에게 그들과 똑 같은 인간으로 비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웰스는 지난 3년 사이 입사한 신규 세일즈 인력 수천 명을 수십개 교육센터로 보낸다. 교육센터에서는 850명에 이르는 동료 직원이 3주 동안 판매 기법을 전수한다. 세일즈 직원들은 실적대로 임금의 2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받는 게 보통이다.
웰스는 지난 5년 동안 판매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18개 보험중개업체, 3개 신탁회사, 3개 자산관리업체 그리고 스트롱 파이낸셜(Strong Financial)도 인수했다. 스트롱은 그 누구도 인수하기를 꺼린 뮤추얼펀드다. 이들 업체는 여러 방식으로 웰스에 통합했다. 웰스는 지점장들에게도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내도록 권하고 있다.
4년 전 콜로라도주 덴버의 한 마케팅 책임자가 ‘웰스 파고 팩(Wells Fargo Pack)’을 제안했다. 한꺼번에 5개 상품을 구입하는 고객에게 저렴한 수수료가 돌아가는 프로그램이다. ‘마트리쿨라 콘술라르(matricula consular∙영사증명서)’ 프로그램은 2년 전 시작됐다. 텍사스주 오스틴의 한 지점장이 정식 서류가 없는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에게 멕시코 영사관에서 발급한 ID 카드만으로 계좌를 열어준 것이다. 현재 시티그룹 등 100여 개 은행에서 마트리쿨라 콘술라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네브래스카주의 한 매니저는 ‘세일즈 로드 맵(sales road map)’을 개발했다. 고객과 즉흥적인 듯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언제 다른 주제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커닝 페이퍼다. 예를 들어 리파이낸싱 등 이해하기 쉬운 상품부터 소개한 뒤 뮤추얼펀드 같은 복잡한 상품으로 넘어가라는 식이다.
 
코바세비치는 아이디어 전략의 진정한 이점은 직원들에게 주인의식과 열심히 일하면 보상 받는다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기업이 왜 그런 방법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밝혔다.
최근 웰스의 고객 에드워드 윙거가 부도처리된 수표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소재 한 지점으로 찾아갔다. 그는 금융상품 3개를 구매한 고객이었다. 담당자 탕팜은 당좌대월을 승인해주고 그의 직업을 물었다. 윙거는 얼마 전 임상실험 사업을 매각했다고 밝혔다. 팜은 정리절차를 웰스에 맡기라고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았다. 윙거는 팜의 책상 뒤에 있는 한 건축 서적으로 자꾸 눈길을 돌렸다. 팜은 이때다 싶어 건축 디자인으로 화제를 돌렸다. 팜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윙거가 최근 다른 은행에서 대출받아 두 번째 집을 샀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화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팜의 상품 선전이 비로소 시작됐다. 윙거는 리파이낸싱에 동의했다.
 
며칠 뒤 윙거는 웰스에서 주택담보대출∙신용카드∙개인신용대출 서비스를 받았다. 이후 저축계좌, 사업자금 대출 심지어 신탁 등 다른 상품도 구매했다. 세 가지 상품에서 시작해 11개 상품을 구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앞으로 12번째 상품도 구매할 가능성이 크다. 윙거는 “팜이 진정한 관심을 표명해준 데다 그의 제안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라며 “고객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어느 날 아침, 팜의 지점에서 지점장 브라이언 머피가 ‘아침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아침 작전회의도 경쟁업체들이 그대로 모방한 금융업계의 또 다른 관행이다. 직원들은 개점 전 20분 동안 그날 목표를 서로 들려주며 격려한다. 스피커폰으로 대화하던 머피와 그의 상사가 행원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로 띄워주기에 바빴다. “아싸!”, “와!” 지점은 웃음바다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