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신화
스타벅스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
- 비전이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한 회사의 부사장이자 총 매니저, 연봉 7만5000달러, 회사에서 제공하는 승용차, 판공비, 1년에 네 차례의 스웨덴 방문을 포함한 무한정의 여행권. 하워드 슐츠가 스물 여덟 살의 나이에 이룩한 것이다.
그는 멋진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으며, 저녁이면 파티를 열곤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이 뭔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룩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미치게 만들 일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의 창업자가 아니다.
네 개의 매장을 갖고 있던 조그만 회사를 오늘날의 회사로 키운 것이다.
그가 맨 처음 스타벅스 매장을 찾아갔을 때, 자극적인 커피 향기에 사로잡혔다.
커피를 정성껏 추출하는 모습은 마치 종교 의식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피 하면 캔 커피를 연상할 때, 스타벅스는 원두 커피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처음 스타벅스 커피를 마셨을 때, 그는 마치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전까지 마셨던 커피는 커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다섯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하워드는 스타벅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였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물 같은 기내 커피를 치워버리고 가방에서 수마트라 커피 원두를 꺼내 그 그윽하고 자극적인 향기를 들이마셨다.
스타벅스 커피 사업에 대한 생각이 그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미치게 할 일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 이후 모든 것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스타벅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7만5000달러의 연봉과 다국적 기업의 부사장이라는 권위, 그리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승용차 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것은 4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조그만 소매업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사업가가 될 만큼 대담하지는 않았지만, 스타벅스라는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는 한 몫 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스타벅스에 다 쏟아 부을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워드는 스타벅스의 창업자 제리 볼드윈과 고든 보우커 그리고 이사회 멤버이자 파트너인 스티브 도노반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하워드는 스타벅스를 확장할 사업 구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하워드의 젊은 열정과 에너지에 매혹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워드는 자신이 스타벅스에서 일하게 될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날 회사측에서 자신을 영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나쁜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들은 하워드의 급진적인 확장 계획에 겁을 먹은 듯했다. 그들은 큰 변화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스타벅스에 미친 하워드는 거기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스타벅스와 커피에 대해 그리고 이 기회에 대해서 갖고 있는 모든 열정을 털어놓았다. 전화 통화가 길게 이어졌다. 회사측에서는 다시 결정해서 다음날 전화를 해주기로 했다. 하워드는 그 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24시간을 낭비한 데 사과드립니다. 우리는 전진할 겁니다. 함께 일합시다. 그럼 언제 올 수 있나요?"
초창기 몇 달 동안 하워드는 카운터 뒤에서 일하면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스타벅스 매장에서 보냈다. 하워드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실시하는 미각 테스트를 받았는데, 정확하게 맛을 구별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거절 제의를 받았던 날 하워드가 아무런 항변도 없이 그들의 결정을 그냥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거대한 스타벅스 조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워드의 삶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힘들게 노력하지 말고 인생의 쉬운 길로 가라는, 또 일반적인 상식을 좇아 살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거부하고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신과 자신의 꿈을 믿는다면, 스스로 해낼 수 있고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행운으로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
2일 오전 9시 서울 역삼동의 '스타벅스' 매장.
낯선 외국인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닝커피를 마시던 고객 한 명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선뜻 다가가 사인을 요청했다. 매장에 전시된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Pour Your Heart Into It)'란 책의 표지 인물임을 알아챈 것이다.
표지 인물은 전세계 스타벅스 매장을 운영하는 스타벅스 코퍼레이션의 하워드 슐츠(49) 회장이었다. 곧 이어 다른 고객들도 슐츠 회장의 사인을 받겠다며 몰려드는 바람에 매장에는 자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
11일 오후 한국에 도착하기 전 슐츠 회장은 스페인.네덜란드.스위스 등 유럽을 순회한 뒤 일본에서 이틀간 마라톤 회의를 열었다.
이어 한국에 도착한 지 24시간도 못돼 인천공항을 출발해 대만.홍콩 등 아시아지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처럼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슐츠 회장은 낯선 고객들의 사인 공세가 싫지 않은 듯 정성스레 써내려갔다.
-한국 방문 일정이 빠듯한데.
"한국에서 스타벅스 사업은 매우 순조롭다. 매장 수.매출.브랜드 인지도 등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특별한 논의사항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세계와 함께 설립한 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대표이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인사차 들른 것이다."
-매장을 계속 늘려가고 있는데, 한국에서 적정한 매장 수는.
"지난달 말 현재 56개인데, 연말까지 60개로 늘어날 것이다. 에스프레소 커피 시장이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 정도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3백개 정도면 적당하리라 본다."
-나스닥 재팬에 상장하는 등 상승가도를 달리던 일본의 스타벅스커피 재팬이 최근 휘청거리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상황이 좋지 않다. 이틀간 수많은 사람과 오랜 시간 회의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언론.증시도 많이 불안해하고 있다. 일본에는 현재 4백여개의 점포가 있는데 많은 투자비용과 경쟁 격화에 따라 수익성이 예년보다 낮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에서의 확장 정책을 고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시장상황을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일본인이 스타벅스 브랜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일본 경제가 점진적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것도 확장정책을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다. 불황일 때 점포를 늘려 시장을 선점해 놓으면 경제가 좋아졌을 때 다른 경쟁사보다 빠르게 시장을 석권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89년 시카고에서 처음 실패를 맛봤다. 시애틀.캐나다 밴쿠버 등 북미 서부 지역에서만 매장을 가지고 있었던 스타벅스는 89년 시카고를 시작으로 동부지역 공략에 나섰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매장의 실패를 교훈 삼아 1년 뒤 다시 도전했고 지금은 시카고의 거리 곳곳에 스타벅스가 들어서 있다. 일본 스타벅스도 시카고에서처럼 곧 일어설 것이다."
-스타벅스는 최근 10년간 순이익이 매년 7% 늘어났다. 앞으로도 이 같은 성공신화가 계속 되리라 보는가.
"매일 4개씩 새로운 점포가 생기고 하루 고객만도 2천여만명에 이른다. 현재 30여개국에 6천여개의 스타벅스가 있지만 아직 우리가 진출하지 못한 나라도 많다.
그만큼 사업이 확장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스타벅스는 현재 6천여개인 매장을 2005년까지 1만여개로 늘리고, 최종적으로 2만5천개가 될 때까지 성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스타벅스가 이룬 성공은 시작에 불과하다."
-스타벅스가 이렇게 성장하리라 예상했나.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90년대 초 누군가가 5년 만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를 만들어 낸 비결을 물어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매장 개점.종업원 교육에 너무 바빠 브랜드 전략을 세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많은 소비자들이 스타벅스에 열광하고 있었다. 어떠한 광고전략도 펼친 적이 없었는 데도 매장이 오픈하면 소비자들은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선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탈리아 특유의 에스프레소 커피와 그것을 재료로 한 카페라테 등 다양한 커피를 최고급 원료로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나아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낭만을 즐기고 문화를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위기는 없었나.
"첨단기술에 투자를 하고 있을 때 커피전문점에 투자하라고 하니 누가 거들떠나 봤겠는가.
그러나 스타벅스의 무궁한 가능성을 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싼 원두를 사서 비싼 값에 판다며 시카고에 본부를 둔 과테말라 노동조합이 흑색선전을 하기도 했다. 이 중으로 된 종이컵에 대해 환경론자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재활용 등을 통해 슬기롭게 헤쳐갔다."
-종업원 복지수준이 높다고 하는데.
"스타벅스 성공에는 고객에 대한 종업원들의 높은 서비스 수준이 밑거름이 됐다. 그런데 복지가 형편없다고 하면 누가 서비스를 제대로 하겠는가. 우리는 88년부터 모든 파트타임 종업원들에게 종합적인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또 91년 말부터는 빈 스톡(Bean Stock.원두주식)이란 이름으로 스톡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시행하지 않고 있지만 사업이 뿌리를 내리면 한국에서도 이같은 스톡옵션제가 시행될 것이다. "
----------------------------------------------------------
하워드 슐츠 회장은…]
하루 고객만 2천만명 해가 지지않는 커피제국
하워드 슐츠 회장은 1953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카나지라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미식축구에 소질이 있어서 노스 미시간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정작 대학 축구팀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졸업 후 제록스에 취직해 워드프로세서 판매원으로 일했다.
3년간의 제록스 근무를 통해 세일즈맨으로서의 역량을 보인 슐츠 회장은 가정용품을 파는 스웨덴의 해마플라스트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의 지위까지 오른다. 그러다 81년 우연한 기회에 시애틀의 스타벅스를 접하게 된다.
스타벅스는 고든 보커, 제리 볼드윈, 제브 시글 등 3명이 71년 공동 창업한 회사로 원두커피를 가공해 소매형태로 판매하면서 동시에 스타벅스란 이름의 커피전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슐츠 회장은 당시 이들의 커피에 대한 열정에 매료돼 고액 연봉의 안락한 생활을 던지고 82년 스타벅스에 합류했다.
이듬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의 경험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밀라노에서 에스프레소와 카페라떼를 맛 본 슐츠 회장은 이탈리아의 커피문화를 미국에 전파시키기로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원두커피 판매에 주력하려는 창업주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85년 현재의 스타벅스와 유사한 '일 지오날레'란 회사를 창업한다. 87년엔 자금을 투자받아 아예 스타벅스를 흡수.합병하면서 회사 이름을 스타벅스 코퍼레이션으로 바꿨다.
이후 고급 이탈리아식 커피로 미국 서부지역을 석권한 뒤 89년 시카고를 시작으로 동부로 매장을 확대했다. 96년 사업 개시 10년만에 매출 10억달러를 넘겼고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본격화 했다. 현재 하루 고객만 2천만명에 이른다. 슐츠 회장은 평소 자신의 회사를 나이키와 비교하길 좋아한다.
흔해 빠진 운동화를 수백달러를 주고 사야 하는 제품으로 끌어 올린 나이키처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커피를 차별화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경영현황
▶설립:1985년 '일 지오날레'로 출발, 87년 스타벅스 합병
▶본사: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매장수:한국을 포함한 세계 30여개국 6천여개
▶직원수:3만여명
▶매출:30억달러(올해 예상치)
▶주요 제품:에스프레소 커피를 재료로 한 카페라떼.카푸치노 등 커피 음료 30여종과 각종 기념품
<><><><><><><>
무한도전 차세대 TV의 대반격
- 세계 최고의 PDP를 개발하라!
▶세계를 놀라게 한 80인치 차세대 TV의 등장
한국이 21세기 세계의 안방을 차지할 차세대 <디지털 TV 시장>을 장악하다!
지난 1월 6일, 우리 기술진에 의해 탄생된 세계 최초 80인치 PDP(Plazma display panel)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 가전시장의 최강자 일본을 제치고 등장한 80인치 PDP TV의 모습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초로 탄생된 두께 8.9cm, 크기 80인치 초대형 PDP TV의 모습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세계 정상을 차지하기 위한 우리 기술진의 숨은 노력이 PDP의 새로운 역사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고화질 PDP의 개발이라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디스플레이 기술력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세계적인 명품으로 우뚝 서고 있다.
▶ 세계 PDP 업계의 '마의 장벽', 70인치를 뛰어넘다!
세계 PDP 업계에서 "마의 벽"으로 통하던 70인치 대를 넘어선 80인치 PDP 탄생!
세계 정상의 PDP TV를 선보이기 위해 탄생된 PDP 프로젝트팀의 시작은 1996년 7월 한여름이었고, 그 무한도전의 시작은 42인치로부터 출발했다. 프로젝트팀이 결성된 지 1년 후, 42인치 PDP가 6인치 모의테스트를 거쳐 드디어 성공의 기쁨을 맛보았다. 또한 그 성공은 정상을 향하여 질주했던 집념의 시간들의 원동력이 되어 결국 63인치, 70인치를 넘어서 세계 최대 80인치를 선보일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PDP 종주국 일본보다 무려 5년이나 뒤늦은 출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PDP 기술을 일궈낸 프로젝트팀의 노력은 그래서 더 값질 수 밖에 없다.
▶ 일본의 아류라는 오명을 벗은 자랑스러운 한국 디스플레이 기술
디스플레이 기술의 선진국 일본! 일본의 후지쓰는 1995년 이미 42인치 PDP를 생산했다. 또한 샤프와 파나소닉 같은 일본의 가전업체들도 일찌감치 세계 LCD 패널에 눈을 돌려 LCD 디스플레이 개발에 투자를 쏟아왔다.
그러나 우리 한국이 본격적으로 디스플레이 산업에 뛰어들어 PDP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7월, 선발주자인 일본을 추격하기엔 너무나 아득한 시간의 거리가 있었다. 또한 후발주자로서의 불리함 때문에 신제품 개발과 품질 확보, 거래선 확보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삼중의 부담도 동시에 안아야 했다.
일본 기술을 베낀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PDP 산업의 종주국, 일본으로 수출 개가를 올리기까지 그렇게 한국의 기술진들은 불과 2년 6개월 여만에 80인치 PDP 디스플레이를 선보여 최고의 PDP 기술력을 이뤄냈고, 세계의 바이어들이 한국의 생산사업장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루게 만들었다.
▶ 세계 1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은 시작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현재 일본은 디스플레이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기술력과 자본을 앞세워 맹추격을 해오고 있으며, 대만 역시 디스플레이 산업을 국가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중국도 세계적 기술을 가진 PDP 업체를 인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기업인수를 통한 기술 따라잡기를 시도 중이다.
그만큼 세계 각국이 디스플레이 산업이 첨단 디지털 산업을 견인해 나갈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다.
절대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는 21세기 디지털 가전 시대에 남들 보다 한발 앞서가는 기술개발이야말로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몫이며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할 것이다.
<><><><><><><>
미 인권담당 차관보 고 홍주의 어머니 전 혜성
방송 : 2000년 1월 3일 밤 10 : 35 - 11 : 30
젊은 여자가 혼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절. 전 혜성은 사회학 공부를 위해 미국행을 감행한다. 그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전 혜성은 보스턴 대학에서 사회학과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대, 예일 법대 강단에 섰으며, 예일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부장직을 거쳐, 현재 교토대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50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이룬 성공은 이뿐만 아니다. 주미 전권대사를 지내고,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 강단에 섰던 남편 고 광림씨와 함께 자신의 슬하에 있던 6남매를 모두 미국 사회에서 최고의 엘리트로 길러 낸 것이다. 6남매 모두가 하버드와 예일, MIT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의사로, 교수로, 주 장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미국사회에서 소수민족인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한국 연구소와 동암연구소 등을 세우고, 한국 사회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민간대사의 역할까지 맡아왔다.
성공 비결 1 : '공부해라'가 아니라 '공부하자'
백인 사회에서 동양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 전 혜성의 가정은 서양 속에 동양의 가치관을 지키는 교육을 한다. 새벽에 멀리 출근하는 아버지를 위해 온 가족이 새벽 3시에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는 등 가정의 유대감을 잃지 않는 것. 지하에 커다란 공부방을 만들어 온 가족이 함께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가는 것이 중요한 가족 행사. 이런 교육 때문에 전 혜성의 아이들은 공부를 재밌어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전 혜성의 가정교육 첫 번째 비결이다.
성공 비결 2 : 代를 이은 가정교육
일제시대에 드물게 개방적인 부모님 밑에서 전 혜성은 딸이지만 아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고 자란다.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멀리 심부름을 보내는 아버지는 혜성에게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미국 유학의 길을 사실상 열어준다. 디킨슨대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난 혜성은 영주권자나 시민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굴하지 않고 법의 예외 조항을 찾아 군대에 취직할 정도의 당당함을 갖는데. 이 자신감은 부모님께 받은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공 비결 3 : 母性
미국에서 하버드 유학생 고 광림을 만나 결혼한 전 혜성은 결혼 직후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생활을 위해 일을 하고 5명의 아이를 낳는다. 공부와 일, 집안일을 병행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최선을 다 하는 전 혜성. 8년간 6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사회학 박사가 된 뒤에도 하버드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고 연구를 계속한다. 예일대에서 남편 고 광림 박사와 함께 교단에 서기도 했고 자녀 둘이 예일대 교수로 재직, 한 가족 4명이 예일대 교단에 선 유례없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아이들을 모두 모유로 키운 전 혜성. 바쁜 생활의 와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직접 머리를 깍아 주고 손수 옷을 만들어 입히는 등의 노력으로 아이들과의 유대감을 계속 유지하는데. 아이들을 최고로 기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재주를 뽐내지 않는 재승덕하지 말라는 교육을 병행한다. 재주보다 덕이 더 높아야 한다는 이 가르침은 자녀들에게도 삶을 살아가는 지침이 된다.
성공 비결 4 :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60년 4.19가 일어나고 민주정부가 서자 고 박사는 미국주재 한국공사로 임명받는다. 그러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날로 사표를 내고 나와 가족들 모두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어지자 아이들에게 한국에 관한 교육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가정교육만으로 한계를 느끼자 전 혜성은 재미한국인 교육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한 강연 등에 나선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에도 뛰어들어 85년 동암연구소를 설립한다.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알고 당당하게 일하는 근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전 혜성이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교육이다.
<><><><><><><>
M&A자문 전문-라자드와 그린힐
소형 금융사이지만 재무자문 서비스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으로 해당 부문에서 세계 유수의 대형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투자은행(IB)들이 있어 자본시장통합법을 준비하는 국내 중소형 증권사에 시사 점을 던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자드(LAZARD)와 그린힐(GREENHILL)이다. 라자드는 특히 기업 지배구조개선펀드인 장하성 펀드의 운용을 맡고 있어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회사다.
두 회사는 시작부터 재무자문 서비스에만 집중했다. 따라서 업무 영역간 충돌이 없었고 덕분에 다른 대형사들보다 빠른 속도로 전문적인 재무자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게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미국의 법적인 환경도 이들 회사가 성장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의 파산법은 파산회사의 채권 및 주식의 기업공개(IPO)에 참여한 투자은행이 해당 파산 회사의 기업구조조정 자문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돼 있어 독립적인 전문 증권사가 대형 투자은행과 경쟁할 수 있는 틈새시장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M&A와 연관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기업구조조정 분야에도 진출해 활황 때는 M&A 위주의 영업을, 불황기에는 기업구조조정 중심의 영업전략을 구사하면서 이익 변동성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도 주요했다. 최근 국내 M&A 시장도 정부의 M&A시장 활성화 정책과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확대, 사모펀드(PEF) 출현 등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내 증권사들이 당장 M&A 자문 분야에 뛰어들기는 시장 경험이 미천하 고 글로벌 네트워크도 부족한 형편이다. 전문 인력과 자본력 등도 턱없이 부족하다 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국내 M&A 시장을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독식하고 있는 이 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외국계에 비해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국계와의 컨소시 엄을 통해 시장 진출을 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하우가 생긴다면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M&A 시장이 커지고 있는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국내 증권사가 M&A시장에 효율적으로 진출하려면 외국계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관련 분야에서 경험을 쌓는 한편 이를 통해 자체 전문인력을 양 성해 전문성을 제고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일정 규모의 자본력 확보에 주력하고 고객과의 장기적인 네트워크 구 축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해야 한다"며 "그 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시장 공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경제 성장 과정에서 부실채권이 많은 중국 기업의 구조조정 분야는 외환위기(IMF)를 경험한 국내 증권사들이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는 시장이 될 수 있 다"고 낙관했다.
◆라자드(LAZARD)-건식품 회사에서 금융자문 전문 회사로= 라자드는 건식품 취 급회사로 라자드 형제에 의해 설립돼 1876년에 금융업으로 전환, 금융자문과 자산관 리에 특화해 성장을 시작한다.
2005년 5월 회사 지분에 대한 기업공개(IPO)를 통해 자본금을 확보하면서 도약 의 기회를 모색했고, 그 이후 계속되는 특화 전략을 구사해 M&A시장의 강자로 거듭 난다.
2005년 2.4분기 현재 전세계 M&A 자문 부문 10위, 전세계 M&A 물량의 10.7%에 해당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라자드의 사업부문은 크게 재무자문과 자산관리, 자본시장 및 기타부문으로 구 성되지만 2005년 자본시장 및 기타부문이 분사하면서 재무자문과 자산관리에 특화된 증권사로써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2004년 현재 재무자문서비스 부문이 전체 수익의 49%를 차지하고 있고, 자산관 리 서비스 부문은 35%, 자본시장 및 기타 부문이 16%를 차지한다.
라자드는 선택과 집중에 의한 업무특화, 높은 기업평판과 유능한 인재 확보, 기 회요인의 정확한 파악, 주력사업 부문의 사업 다각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 다.
설립 초기부터 금융자문 서비스 회사로 출발해 종합증권사에 비해 부서간 이해 상충이 없어 법적공방과 같은 위험요인과 평판위험 등을 줄일 수 있었다.
산업별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우선적으로 채용해 경력자와 비경력자를 한팀으로 OJT를 실시하고 인센티브는 고객, 동료 등으로부터 종합평가에 따르는 등 전문인력 관리에 힘을 쏟았다.
시니어급 인력들이 주도적으로 업무를 처리해 고객들과의 신뢰도 높였다.
기업들의 글로벌화 및 규모의 최적화 움직임, 아태지역 M&A 시장의 성장 움직임 감지,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자산관리 수요 증가, 저금리에 따른 대체투자 수요 파악 등 기회요인을 잘 포착했다.
특히 경기 활황기에는 M&A, 불황기에는 기업구조조정 부문에서 수익을 확보하고 글로벌화를 통한 지역 수익 다변화로 수익 변동성을 축소시켜 나갔다.
그 결과 라자드는 인력과 규모면에서 대형투자은행들이 1/10 수준에 불과하지만 금융자문에 있어 세계적인 투자은행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린힐(Greenhill)-작지만 강한 M&A 전문회사=그린힐은 1996년 모건스탠리와 스미스바니의 사장을 지낸 그린힐에 의해 기업 인수합병(M&A)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증권사로 설립된다.
그 이후 영국과 독일로 영역을 확대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사모펀드 운용과 기업구조조정 자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한편 2004년 기업공개(IPO)를 통 해 성장기반을 다진다 그린힐의 사업부문은 크게 재무자문서비스와 모험자본 투자를 위한 사모펀드 운 용 등 두 부문으로 나뉘어지지만 이중 재무자문서비스가 전체 수익의 86%를 차지한 다.
현재 그린힐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96%가 M&A를 통한 것이어서 다른 투자은행 대 비 M&A 집중도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중소형 증권사임에도 전 세계 투자은행 중 M&A분야 시장점유율 21위(1.4%)에 오를 정도다.
그린힐은 사업 초창기에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M&A 서비스를 미국 식료품 회사 에 우선적으로 제공하고, 이후 글로벌화와 신규사업 진출을 통해 수익원을 다변화한 다.
재무자문 서비스를 M&A에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기업구조조정 부문으로 확대 해 수익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사모펀드 운용 시장에 진출해 사업부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 나갔다.
경제하락기에는 M&A 수입이 감소하는 반면 기업구조조정 수요가 증가해 회사 전 체 수익 안정화에 기여했고, 대형 투자은행과 달리 부서간 이행상충이 발생하지 않 아 독립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모펀드는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수익성이 큰 분야로 추가적인 수익 다변화를 꾀하는데 도움이 됐다. 재무자문부문 인력의 산업 관련 지식과 경험이 사모펀드를 운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00~03년 세계 재무자문 서비스 시장이 70% 감소하면서 대형 투자은행들의 수익이 평균 44% 즐어드는 동안에도 그린힐의 수익은 13% 증가하 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기존 고객 유지 및 우수 인력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신규고객을 확보했고, 매년 말 평가를 통해 확실한 성과보상을 해 2004년말 종업원 1인당 순이익 30만달러를 달 성해 대형 투자은행 대비 우수한 성과를 발휘했다.
'경영관리 > CE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사례 페덱스 프리데릭 스미스,국산 선박엔진 ,유한양행 연만희,세일즈포스닷컴 조회(20) (0) | 2007.06.05 |
---|---|
성공사례 한국스파이렉스사코 박인순,동북아허브 인천공항,삼성 SDS 주혜경,웰스파고- (0) | 2007.06.05 |
벤자민 프랭클린의 리더십 (0) | 2007.06.05 |
인생은 B to D 이다. (0) | 2007.06.05 |
한국의 위상 (1) | 2007.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