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님의 보복 폭행 사건이 마침내 경찰 수뇌부의 옷을 벗게 만드는 모양이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스무 살이 넘은 아들이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몇 대 맞았다고 조폭까지 동원하여 납치하고 폭행하고 전기봉으로 위협하고, 아들에게 맞은 만큼 때리라고 시키고, 그리고는 그 추한 사건을 덮기 위해 경찰 조직에 집요한 로비를 벌인 이 해괴한 사건의 주인공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재벌 회장님이다. 아들이 고소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그러지 말고 남자답게 직접 가서 보복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자답게? 부성애의 표현으로? 남자답게라니? 이 회장님께서는 싸움은 하면 안 되고, 남을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며,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법을 지켜야 한다고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이 땅의 수많은 평범한, ‘남자답지 못한’ 아버지들을 모욕했다. 거기다가 그의 ‘남자다운’ 그런 행동이 돈과 권력을 과도하게 소유한 데 따른 특권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인식은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들의 가르침이 돈과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의 비겁, 말하자면 ‘노예의 윤리’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는 자괴감을 심어줄 여지도 있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당사자도 그 비슷한 변명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분의 행동이 남다른 부성애의 표현으로 의역되어 전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정상적이고 올바른 부성애를 가진 아버지들을 조롱하는 말로 들린다. 그렇게 하지 않거나 못한 사람들의 부성애는, 이를테면 최소한 그 깊이에 대해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부성애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절대 선인 것도 아니다. 아버지에게 자식이란 철저하게 타자일 수가 없다. 오히려 자기의 일부, 혹은 ‘연장된 자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성애를 포함한 가족애란 다만 확장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애와 확장된 이기주의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회장님이 보여준 것은 이기주의(특권의식과 결합된)의 극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하는 일부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나 국민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역구를 넘겨주는 식으로 아들을 국회의원 만드는 정치인의 행태가 곱게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부성애는 그릇된 것이고, 실은 그 회장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옹졸한 특권의식과 치졸한 이기주의의 부산물일 뿐이다.
특권의식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해 왔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슬로건 아래 이루어져 온 우리의 근대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 키우기에 다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능력이 없어서 무엇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우리도 능력 있고 힘 있는 국민이 되자. 오랫동안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거의 최면을 걸 듯 내몰았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문제는 이 집단적인 최면이 능력을 가진 다음에 대해서는 아무 주문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나서 마음껏 그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할 수 있는 데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까지 은연중에 유포된 것 같다. 그 능력을 옳은 일에 사용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뇌물 받을 자리에 있는 사람은 뇌물 받고, 투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투기하고, 법을 무시해도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법을 무시한다. 보복 폭행을 하고, 조폭을 동원하고, 경찰을 매수하려고 한 회장님의 행동은 아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주 조금 사용한 예에 속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쉽지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조금 덜 쉬울 것이다. 더구나 능력만을 추구해온 그동안의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지금은 이 능력, 자기가 가진 능력을 옳은 일에만 사용하고, 옳지 않은 일에는 사용하지 않을 능력을 키우는 것이, 특히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같다. 가령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있더라도 돌로 떡을 만들어선 안 된다면, 저 광야의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을 기꺼이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