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와 1원 1표의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 원리는 작동원리와 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1인 1표의 민주주의와 1원 1표의 자유시장경제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즉 민주주의가 사유재산권을 마음대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헌정주의를 제시하고 국가가 자유시장경제를 침해하는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은 정부론을 내세웠다.
‘자본파업’ 현상, 민주주의와 국민경제를 위협하는 수준 시장경제의 1원 1표 원리가 주로 일반시민들의 사회경제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소비자 주권을 의미했던 시대에는 1원 1표의 자유시장경제 원리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융자유화·자본자유화 이후에는 1원 1표 원리가 소비자 주권의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자본의 이탈 권력(exit power)을 의미하게 되었다. 개인과 기관의 자산 위탁 경향으로 자본시장은 과거보다 더 집중되고 위계화되었으며, 파생금융상품 발달로 투자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거미줄처럼 서로 연계되어 있다. 금융자산을 실제로 운영하는 금융 엘리트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정신과 신고전파 경제학이란 분석도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지휘 없이도 동일한 방향으로 군집행동(herding behavior)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자본투자자들이 특정한 경제정책이나 경제상황을 거부하는 ‘자본파업’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행동금융학(behavioral finance)은 자본시장의 투자자 행동이 반드시 이성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자본파업’의 이탈 권력이 아무 때나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정신을 어기는 정책이 세계경제의 약한 고리에서 나타났을 때 이에 반발하는 투자자들의 군중심리가 일단 발동하기 시작하면 그 이후의 눈덩이 효과는 이성으로 예측하기 힘든 영역이 돼버린다. 자본파업은 예측하기 힘든 군집행동이기 때문에 더 무서우며, 국민국가 수준을 넘어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금융중심지 시티를 보유한 영국도, 부패가 가장 적고 경제사회의 투명성도 가장 높다는 북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모두 금융자유화 이후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었다. 자본의 군집행동 공격을 받지 않으려면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막론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재정건전성과 물가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금융자유화·자본자유화 시대에는 국민국가의 정책 자율성이 제약을 받는다고 점잖게 말하지만, 실제 내용은 국민들이 원하는, 국민경제가 필요로 하는 거시경제정책이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거시경제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책임은 결국 정치, 곧 민주주의가 질 수밖에 신자유주의자들은 금융세계화가 초래한 이러한 시장규율(market discipline)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민국가가 정책 자율성을 갖게 되면 민주주의 포퓰리즘이 재정건전성과 물가안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민주 선거로 선출될 거라고 거의 믿지 않는다. 경제는 정치논리가 아니라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말도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반영한다. 즉 경제정책을 민주주의에 맡기면 단기적 시계(time horizon)의 정치인들, 포퓰리즘과 정치 부패에 의해 왜곡되고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정책은 소란스러운 민주주의 보다 경제전문가라는 냉철한 후견인(guardian)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자들 중에는 금융통화위원회가 통화정책을 결정하듯이 재정정책도 재정정책위원회를 만들어 경제전문가가 결정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지 않는 플라톤의 철인 국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을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경제전문가가 결정한 정책이 실패한 경우 정책 실패의 모든 책임은 결국 정치가, 민주주의가 질 수밖에 없다. 한국이 나갈 길은 전문가나 철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대중들의 의사소통 과정인 민주 선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적 합의로 결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며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이지만, 공동체를 관리하는 최선의 제도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규율을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것인지 민주적 토론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부작용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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