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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시모노세키의 벼루

제47호 (2007.5.30)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시모노세키(下關)는 혼슈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일본 해륙 교통의 요지이다. 시모노세키는 1.5킬로미터의 간몬 해협을 사이에 두고 규슈와 연결되는데 이곳을 통과해서 일본의 내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본의 수에즈’라고도 불린다.


시모노세키, 일본 내해의 입구에 위치한 대외교류 창구


시모노세키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 같은 북방 국가와 교류하는 창구이므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고, 혼슈의 서북 지역에는 신라나 가야 계통의 고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다. 조선 전기에는 시모노세키를 지배한 오우치(大內) 씨가 조선 국왕에게 직접 사신을 파견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출신인 모리(毛利) 씨가 군대를 이끌고 경상도 지역을 침략했다. 그리고 일제 때에는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과 대륙으로 진출하는 일본인이 시모노세키를 드나들었다. 이를 보면 시모노세키는 한일 간의 관계가 좋을 때에는 교역의 거점이지만 충돌이 발생하면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 기지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통신사들이 시모노세키에 들렀다. 통신사는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3회, 도요토미가 집권했을 때 2회, 에도 막부 시기에 12회를 합하여 총 17회나 파견되었는데, 쓰시마로 파견된 1811년의 통신사를 제외하면 모든 통신사가 이곳을 방문했다. 당시 이곳의 이름은 적간관(赤間關, 아카마가세키)이었는데, 부산포를 출발한 통신사 일행이 험한 바닷길을 건너다가 시모노세키를 지나면서부터 파도가 잔잔해졌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이었다. 또한 시모노세키는 “들어가는 배가 천 척, 나오는 배도 천 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선의 출입이 많은 항구 도시였는데, 조선에서 건너간 통신사가 처음으로 만나는 일본의 번화한 도시였다.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통신사가 받은 선물 가운데 제일의 명품은 벼루였다. 통신사는 대부분 유학자들이라 검박한 생활을 중시했지만 학문 탐구와 관련이 있는 문방구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치를 허용하는 분위기였는데, 그중에는 시모노세키의 벼루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모노세키의 벼루는 돌이 붉거나 푸른색을 띠며 윤기를 내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특히 붉은 색 벼루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1711년에 임수간은 벼루를 선물로 받았다. 시모노세키 사람들이 크고 작은 벼루와 금칠한 종이를 선물하면서 글씨를 써 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임수간은 시모노세키의 돌로 만든 벼루는 예전부터 진귀한 물건이란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1763년에 남옥은 선물로 받은 벼루를 자세히 관찰하고는 검푸른 빛이 도는 벼루는 조선의 감포나 연일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고, 붉은 것은 안동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시모노세키의 벼루도 조선의 벼루만큼 품질이 좋다는 말이다.


오랑캐 물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탐나는 물건


유득공은 친구 이정구가 시모노세키 벼루를 가진 것을 보고 억지로 뺏었다. 일본을 방문했던 이정구가 현지에서 구해 온 벼루였다. 미안한 마음에 유득공은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벼루를 뺏은 것은 미불이나 소동파도 그런 적이 있으며, 벼루의 붉은 색은 붉을 적(赤)자를 쓰는 적간관 지명과 잘 어울린다는 내용이었다. (유득공의 시에 대해서는 안대회 교수가 2월 14일자에 소개하였으므로 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조선의 통신사들이 목격한 일본은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자기보다 부유하긴 하지만 유교식 예법을 모르는 오랑캐라며 자존심을 지켰다. 그런데 시모노세키의 벼루에 대해서는 그런 자존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오랑캐의 하찮은 물건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탐이 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역되는 물품에는 기호품이나 사치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모노세키의 벼루는 조선의 선비라면 하나쯤 가지기를 희망했던 일본의 명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