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 홍대용과 벗들의 풍류
송 지 원(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담헌 홍대용은 고뇌하는 지식인이면서 풍류를 아는 멋진 인물이었다. 그의 음악 이론적 지식은 당대의 어느 누구에 비하여 뒤지지 않았고 악기 연주 수준도 상당하였다. 특히 그의 가야금 연주는 일품이어서 지우(知友)들이 함께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곤 하였다. 영희전(永禧殿)의 북쪽 담장 바깥 부근에 있었던 담헌의 별장 ‘유춘오(留春塢)’에서는 가끔 줄풍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고뇌하는 지식인이면서 풍류를 아는 멋진 인물 늦봄이거나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정원이 깊어서 대낮에도 조용한 담헌의 유춘오는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찼다. 섬돌 위에는 향기로운 꽃잎이 떨어져 온통 꽃빛을 이루었다. 그렇게 아 름다운 한낮 어느 시간에 풍류를 아는 지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홍대용은 가야금을, 홍경성은 거문고를, 이한진은 통소(洞簫)를, 김억은 양금을, 장악원 악공(樂工)인 보안은 생황을 연주하였고 김용겸은 연장자라 조금 윗자리에 앉아 흥을 돋우었다. 홍원섭은 순수한 감상자 자격으로 자리에 함께 하였다. 무대와 객석이 훌륭하게 갖추어진 셈이다.
이들이 함께 나눈 음악은 바로 현악기가 중심이 되어 연주하는 줄풍류였다. 홍대용은 섬세한 현악기인 가야금을 한 음 한 음 띠우면서 소리의 유희에 침잠했다. 홍경성은 거문고의 묵직한 여음에 매료되고, 김억은 양금의 맑은 소리에 가슴이 트였을 게다. 음악이 한참 무르익어가니 갑자기 김용겸이 자리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천상의 음악을 듣고 절 한 번 하는 것은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음악에 고무된 노장의 행동에 후배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터이지만 그런 모습 또한 아름다운 풍류가 아닐 수 없다.
홍대용은 음악을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그가 연행(燕行)을 다녀오면서 양금(洋琴)을 직접 구입해 왔다. ‘소리’에 민감한 담헌에게 처음 듣는 양금 소리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양금을 사 오긴 했지만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소리를 내 보았다. 악기를 사온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담헌은 양금으로 우리나라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조율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양금은 담헌 말고도 이미 여러 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조선에 여러 대의 악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대로 소리 내지 못했던 터였기에 그 업적은 매우 소중하여 18세기 한국 음악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홍대용이 양금을 토조(土調)로 풀어낸 것은 1772년 6월 18일 유시(酉時, 오후 5-7시경) 무렵, 그의 나이 마흔 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 일시를 상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에 낱낱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홍대용이 양금을 토조로 풀어낸 이후 조선의 여러 금사(琴師)들이 이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양금은 새로운 소리를 갈망하던 18세기 사람들의 귀를 충족시켜 주었고, 그들의 벗이 되었다. 줄풍류를 연주할 때 양금은 청아한 울림으로 음악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박지원과 함께 고담준론에 음악까지 홍대용의 양금사건을 기록한 박지원은 그보다 여섯 살 연하지만 둘의 우정은 남달랐다. 둘이 만나면 시간을 잊으며 고담준론을 펼쳤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에는 각각 악기 하나씩 맡아 고아(古雅)한 풍류를 즐겼다. 음악으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지음(知音)이었다. 1783년, 홍대용이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은 집에 있는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 버렸다. 지음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
글쓴이 / 송지원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논문: 「정조의 음악정책 연구」외 다수 · 공역: 『다산의 경학세계』, 한길사, 2002 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