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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잡학사전

주일과 요일의 기원

주일과 요일의 기원

                                                      예수.코리아,    21.08.08 05:44



성경에 7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제정으로 기원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7일중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셨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이란 라가(עגַרָ)란 말인데 조용하다, 평화롭다, 평온하다, 란 뜻이다. 복이란 바라크(ךרָבָ)란 말인데 무릎꿇다 빌다 예배하다란 말이다. 거룩이란 말은 카다쉬(שדַקָ)인데 깨끗하다, 헌신하다, 정결하다, 구별되다,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식일(安息日 편안하게 숨쉬는 날)로 번역했다.

안식일을 쉬는 날 로 인식되어 있는데 한자 안(安 편안 할 안, 즐길 안, 즐거움에 빠진 안)자와 식(息 숨쉴 식, 숨 한번 쉬는 시간, 들여 마신 호흡을 내 뿜는 시간,)으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생존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필요하지 않는 분이다.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마 12:5-8.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므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 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쉬셨다는 말은 창조하시는 일을 끝내셨고 하나님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안식을 정하신 것은 인간을 위하여 정하신 것이다.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날로 정규적으로 칠일중 하루를 정하신 것이다.

창조 당시에는 인간은 지금처럼 노동하지 않았다. 숨쉬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은 인간과 안식하실 날로 정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인간이 숨을 들여 마시고 내뿜지 않는 것처럼 생명이 죽기 때문이다.

그날을 복주셨다고 했다. 복이라는 말은 바라크(ךרַבָ 무릎을 꿇다, 빌다, 예배하다)란 뜻이다.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 거룩이란 말은 카다쉬(שדַקָ 깨끗이하다, 헌신하다, 정결하게하다, 정결하게 구별하다,)이다.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으로 거룩한 날을 주셨다는 말인데 그날은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여 모든 삶을 받아 살아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룩하게 하는 날로 구별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안식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에게 거룩한 자녀로 인정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통한 이해로 쉬는 날로 즐기는 날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놀고 즐기는 날로 당연한 것이고 믿는 자 까지도 안식일을 쉬는 날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이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다. 죄인된 인간이 정해주신 거룩한 날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거룩한 하나님과 영원한 대면을 위해서 인간은 거룩한 자로 구별하여 참여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내려 오면서 함의 후예들이 바벨론 제국을 형성하고 바벨론 종교 바알 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6일 창조는 전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안식일을 차단되면서 바벨론 종교 문화에서 만들어진 요일의 문화가 세계화 되었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에는 바벨론 시대에는 지구는 천체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믿었다. 천체 중에 지구에서 가까운 7개의 별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일곱 개 별이 24시간씩 교대하며 비추어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위성들을 신격화하여 첫날은 달 둘째 날은 화성 셋째 날은 수성 넷째 날은 목성 다섯째 날은 금성 여섯째 날은 토성 그리고 일곱째 날은 태양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1.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기독교.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 당하고 페르시아가 그리스에게 멸망당하고 그리스는 오마에게 멸망 당했다. 그러나 종교는 그대로 흡수하였다.

주일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때에 기원했다. 그 이전 가지는 기독교인들 박해했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 존재했다. 교인들은 7일(안식일)을 주일로 지며오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황제가 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주일이 공식적으로 정해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최초의 기독교의 황제로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고 교회에 많은 공헌을 하여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타뉴브강 남쪽의 나이슨스에서 클로러스(Clonus) 콘스탄티누스 1세인 아버지와 성 헬레나 (S. T. Helena)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후 305년까지 데오클레시안 황제의 통치하에 기독교가 국가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로마는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전 병력을 투입하였다. AD 305년 데오 클레시안 황제가 권좌에 물러나게 될 때에 그 후계자 4인이 물망에 올라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중에 경쟁자가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막센티우스는 이방 종교인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 두 사람이 AD 312년 로마에서 10여 마일 떨어진 티베르강 밀비안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격전을 하게 되었는데 결전 전말 밤중에 콘스탄티누그 1세가 환상을 보게 되는데, 'In Hoc Signo Vinces(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환청과 함께 Xp(Chi Rho: 그리스도의 이름)의 징표를 보고 병사의 방패와 투구에 기호를 그 기호를 새기게 하고 황제는 자신의 철모와 모든 병사들의 방패에 그 글자를 쓰게 하고 출전하여 312년 10월 28일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승리를 주었음을 확신하고 그 후에 그리스도인으로 공공연하게 활동했다. 유명한 역사가 유세비어스는 그가 황제에게 직접들은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 정오 조금 지나서 태양 위에 빛의 십자가와 그 위에 쓰여진 이것으로 이기리라는 글자를 보았는데 이것은 지난밤에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정오에 본 것은 자신 혼자 뿐 아니라 전 병사가 다 보게 되어 그 사기로 이 싸움을 승리하였다. ”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 세는 로마 국교를 기독교로 선포하고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동방 교회가 황제의 관할 하에 있음과 서방 교회 감독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의도에서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옮기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 세 황제는 10번째 성자로 추앙을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AD 312년 5월 21일에 성자 제를 드렸다.


2.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S.T Helena 255-330)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묘와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의 나신 곳, 죽으신 곳, 승천하신 곳에 성전을 세웠다.

그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하여 AD 274년에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헬레나를 버리고 멕시미안의 이붓 딸인 데오도라와 AD 293년에 재혼하였다.

그 후 아들 콘스탄티누스 1 세가 황제가 되면서 어머니를 황태후로 봉직시켰다. 헬레나는 열성적인 신앙이어서 로마인 전도에 힘썼고 국고를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이재민을 전적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AD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둘째 부인인 파우스타의 음모로 장남 크리스포가 죽게 되자 슬픔에 잠겨 80세의 고령으로 성지순레를 떠난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 승천한 갈바리산,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성전을 건축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갇힌 자를 해방하고 순례자들을 도와주며 예수의 여종으로 겸손히 기도생활에 힘쓰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려고 힘썼다. 그리고 팔레스틴에서 죽었고 그의 사신(死身)은 콘스탄티노플에 안치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골고다에서 예배당을 지을 때에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분별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병든 세 사람을 각 십자가 앞에 지나게 하였는데 한 십자가에 앞에서 병이 고쳐지게 되었다.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정하고 기념하였다. 황제는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를 귀부인이란 칭호를 부치고 그녀가 난 곳을 헬레나성이라고 개명했다.


3. 밀라노 칙령(교회의 자유와 기독교 공인 선언)

AD 313년에 갈레리우스오아 콘스탄티누스 1 세 황제가 내린 칙령이다. 밀라노 칙령의 발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인(公認)한 사건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자 A.D. 303~ A.D. 304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혈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勅令)을 발표하였으며, 갈레리우스(Galerius)도 A.D. 311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公認)하였다. 그러나 이들 정책은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각 지역의 총독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A.D.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함께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우선, 그리스독교인 이나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祭儀)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마땅히 종교의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교회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하고,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반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리키니우스(Licinius)는 313년 6월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총독들에게 공식 서한의 형태로 밀라노 칙령의 내용을 전달하여 그리스도교 박해의 중지와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이 서한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통치 말기에 다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보호에 소극적이었다.

이처럼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공인(公認)한 데 그치지 않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4.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정책

그리스도 교회가 법적으로 공인된 것이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국민들에게 종은 결과를 가지게 했다. 기독교의 정신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그리고 그의 직속 신하들이 실시했던 법령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교직자들을 외부적 감독이라 칭했고 궁중에서 설교하도록 하였다. 특히 유명한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같은 인물을 궁중으로 들여 세우고 이단자들을 단절하고 교회 일치에 박차를 가했다.

축첩 제도를 엄벌했고 이혼 제도를 제한했고 죄인의 이마에 화인 치는 것을 금했다. 이 중에 괄목할 만한 업적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십자가형 폐지.
     십자가형의 처형 제도는 로마인들이 제의된 처형 제도이다. 이 처형은 가장 가혹한 제도로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유래되었다. 로마인들을 이 제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이 제도를 야만인들의 제도라 하여 인정하기 싫어하는 제도이다.

십자가형은 선고가 떨어지면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반사(半死)상태에 이르도록 피를 보기까지 매질을 가한다. 매질하는 이유는 형틀에서 빨리 죽게 하기 위함이며 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매질이 끝나면 죄수 자신이 형틀을 형장까지 짊어지고 가야 한다. 자신이 지지 않으려면 역시 매질을 가한다. 이유는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에서이다. 형장에 도착하면 대다수의 죄수들은 못질을 하지 않고 줄로 묶는다. 못질하는 죄수는 드물다. 못을 박는 죄수는 발바닥 아래 나무토막을 밖아 고인다. 왜냐하면 못자국이 찢어져 몸이 떨어져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형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십자가 형틀은 인류를 구속하신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군대의 기치를 십자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십자가형을 폐지했다. 그 수치스런 십자가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로 인하여 로마에 영광의 십자가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당연히 금지되어야 했다.

 2) 희생제와 유아 살해 금지
     로마에 있어서 가부장 제도가 있었다.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아이는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아버지에게 주어졌기에 아이를 죽여도 법률에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아를 질식시켜 죽이거나 밖에 버리기도 했다. 이 버려진 아이들을 주어다가 길러 노예로 파는 직업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정신을 인식시켜 희생 제사와 유아 살해 제도를 폐지시켰다.

 3) 노예제도 수정.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기 전에는 로마 인구 절반이 노예였다. 이들은 법적으로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주인의 재산에 불과 함으로 주인의 마음대로 팔리고 죽어 가고 했다.

초기 로마 시대에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노예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때 법에 의하여 그에 속한 노예 300명을 남녀노소, 유죄, 무죄를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노예들은 이마에 화인을 찍었다. 그러기에 어디를 가든지 숨을 수가 없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탈취 노예, 가내 출산 노예, 포로 노예 등으로 구별하였고 노예 경매장에서 공공연하게 경매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방 노예(애급, 헬라, 수리아, 유대)가 서방 노예(게르만, 갈리아, 사르대니아, 브르타니아)보다 값이 더 비싸게 팔렸다. 초기 노예의 수는 1 : 5이며 로마의 시민에게는 1대 3 꼴이었다. 가구당 노예 수는 가이샤家에 20,000 여명 있었고 중, 하 계층家에는 8명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이었다.

이 노예제도도 기독교 정신이 확산되면서 줄어들게 되었다. 공화 정치 시대에는 엄청난 노예해방이 있었다. 뒤이어 자유인과 노예들의 결혼으로 1세기 말엽에는 노예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1세기 말엽에는 노예와 자유인의 혼혈을 금하기 위하여 어떤 노예 소유자라도 죽을 때에 100명 이상 해방하지 못하게 법률화했다.

 4) 검술시합 폐지
     마의 검술은 이름이 높다. 원형 경기장이 그 시합 장소로 일반인들에게 자유로이 공개되었다. 관중도 많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의 쾌락을 돋우기 위하여 사람을 죽게 했다. 시합에서 패한 사람의 심장이나 신장, 간장은 신에게 바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이 검술 폐지 법률을 새로운 수도 콘스탄틴노플에서 시행하였다. 그 법률이 선포된 후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합 자체는 AD 404년까지 계속 되었다.


5. 주일 기원.

주일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이전에는 기독 교인들만에 한하여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황제 통치하에 일주일 가운데 맨 처음 날을 안식일(예배일)로 정하고 로마 전역에 제도화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지켜지게 되었다. 특히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 외에 법정 개최를 금했고 군사 훈련도 금했다. 그러나 공무 집행은 시행하였으나 점차 성스러운 날로 인식되어 점차적으로 자연히 지켜지게 되었다.

초대 교인들은 안식일이란 말 대신 주일이라 했다. 로마인들은 일요일을 원래 그들의 섬기는 태양신(바알신)의 날 태양신이 다스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식했고 성령 강림일 , 교회 탄생일을 기념하여 지켰다. 또 의의 태양신 그리스도의 날이라 칭하기도 했다.(계1:10, 요1 :1-3, 행2:1-2, 행20:7, 고전16:2) 등을 근거하였다.


6. 요일의 기원.

 1) 바벨론 신화와 그리스 신화 요일.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로 하여금 태양신의 날은 주일로 정했지만 요일은 바벨론 신화와 그리스 신화로 근거한 요일을 그대로 사용했다. 지금도 그 요일을 세계가 사용하고 있다. 당시 교회는 천동설을 믿었던 시대이다 바벨론 점성 학자들은 하루를 24시간으로 하여 태양신(바알신)이 다스리는 날 Sunday, 월신(바알의 아내 신 아세라)이 다스리는 말 Monday, 화성신(火星神)이 다스리는 날 Thesday, 수성신(水星神)이 다르시는 날 Widesday, 목성신(木星神)이 다스리는 날 Thusday, 금성신(金星神)이 다스리는 날 Friday, 토성신(土星神)이 다스리는 날 Seterday,로 믿었다. 그래서 이 7신들이 하루씩 교대해 가면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지금은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별이 신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은 이 요일을 채용할 당시 모든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성경적 요일을 지켰더라면 좀 더 복음이 구체적으로 빨리 전해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이 되었고 기독교가 역사를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 관심 없이 로마 요일을 교회에서 쓰고 있다는 것은 좀 생각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주일이 정해진 것은 큰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1000년이 넘게 교회에서 역사를 지배해 왔었다. 그런데 성서에 창조의 7일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 창조주일을 요일처럼 공식화 하지 못하고 바벨론 점성학자들이나 신화로 구성된 요일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성서적인 창조의 7일을 공식화했더라면 기독교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2) 성경 7일 원력.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어 세계에 복음을 전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바벨론 신화에 근거한 월력이 역사 안에 버젓이 지배해 온 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가 1500년 여간을 역사를 주도해 왔다. 그런데 성경에 창조의 7일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신화로 제정한 요일이 지금까지 쓰여진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교리에는 큰 싸움을 하여 교파가 수십 갈래로 나누어 졌다. 그런데 가장 평범한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에 쓰여지는 원력이 우상숭배(바알. 아세라)의 뿌리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죄송하기 짝이 없다. 바벨론의 점성학이란 바알신(태양신)과 아세라(월신)에서 발생된 별신(聖神)숭배 사상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 관심 없이 교회에서 수용했고 지금까지 관심 없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후대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성경적인 요일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무명인 사람이 지만 시도해 보았다.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쳐 깨뜨리려는 것이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래도 바위를 치자는 마음으로 시도했다.

이 성경적 요일의 달력이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이 소원이며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한국)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달력 제작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영리 목적이 더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성경적 요일 달력을 제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달력이 분포되어 지지 않은 미얀마에서 시도했다. 미얀마선교를 하는 나로서 시도할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는 전도지는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달력은 모두 좋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제작하게 되었다. 미얀마 내지 선교회에서 성경적 7일 달력 시작되어 전도방편으로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달력의 요일은 바벨론 신화에 근거한 로마식 요일을 쓰고 있다. 성경에 분명하게 7일 창조가 나와 있는데 왜 지금까지 바벨론 점성 학자들의 신화에 근거한 요일 일 (太陽), 월(月), 화 (火星), 수 (水星), 목(木星), 금(金星), 토(土星), 이다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어서 성경적 7일, 창조의 진리를 알리기 위해 성경적 7일 월력을 만들어 미얀마 내지 선교회에서 시도하였다.

첫째 날 월요일은 빛을 창조한 날,
둘째 날 화요일은 궁창을 창조된 날,
셋째 날 수요일은 땅과 바다가 창조된날,
넷째 날 목요일은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날,
다섯째 날 금요일은 새와 물고기가 창조된 날,
여섯째 날 토요일은 동물과 인간이 창조된 날
그리고 일곱째 날은 안식일을 신약 시대 주일을 메시아 부활 하신 날로 했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7일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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