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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직업교육

‘영어꽝’이 토익 770점?

동아일보  2008. 4. 7

    이 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6급들이 기를 쓰고 5급 사무관을 달려고 하는 데는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서울시 5급 공무원 이모씨는 2007년 말 토익 성적표와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위·변조한 사실이 들통 나 파면됐다. ‘듣기’ 점수를 105점에서 405점으로, ‘읽기’ 점수는 65점에서 365점으로 바꾸고 총첨 170점을 770점으로 고쳤다. 5급 사무관 승진 심사에서 가산점을 받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승진심사위원회 대상자 명단과 승진 후보자 명부를 받는 대가로 인사담당자에게 100만원을 건넨 혐의도 받고 있다.

이씨는 사무관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정년 퇴직해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공무원 정년은 6급 이하는 57세, 5급 이상은 60세다. 공무원노조에 따르면 5급 퇴직과 6급 퇴직 후 받는 연금 등을 계산하면 2억4000만원가량 차이가 난다.

공무원의 정년연장은 해묵은 핫이슈다. 경기도 구리시 7급 공무원은 “공무원들도 정년을 통일하자는 데 모두 찬성하지 않는다. 6급 이상은 찬성하는 이가 많고 7급 이하는 반대하는 이가 많다. 정년을 코앞에 둔 이들은 당장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겠지만 7급 이하는 인사가 적체돼 승진이 더뎌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시 6급 공무원은 스트레스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 10년차 서울시 6급 공무원 강동수(가명)씨. 강씨는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시작된 ‘창의시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창의시정이란 ‘아이디어 공무원’을 우대하는 제도. 업무와 시정 전반 관련 아이디어를 내도록 한 뒤 점수를 매겨 평가에 반영한다. ‘말 잘 듣는 공무원’에서 ‘개성 있는 공무원’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의도다.

서울시는 자치구보다 직급이 한 단계 낮다. 자치구 등 기초자치단체에서 6급은 팀장이지만 시는 5급 사무관이 팀장 직위를 갖는다. 6급은 일반 팀원이다. 그러나 실무는 6, 7급이 도맡는다. 시에서 6급은 행정의 중심이다. 대개 기획안의 첫 구상은 6급 공무원의 머릿속에서 출발한다. 업무도 6급이 제일 많다고 한다.

취지는 좋았다. 현장에서 출발한 고민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강씨를 비롯한 시 공무원들은 ‘창의 피로증’을 호소했다. 한마디로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발적 참여 형태라고 했지만, 사실상 실국별로 할당하는 강요가 됐습니다. 다른 실국에서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우리만 성과가 없으면 실국장의 심기가 불편해지니까요. 억지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다보면 현실성이 없는 것들도 나오게 됩니다. 면밀한 검토 없이 채택된 아이디어들을 실제 진행하는 일도 많고요. 기본 민원 업무에 창의시정 아이디어 업무까지 하다 보면 업무에 부하가 걸립니다. 문제는 결과적으로 아이디어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예컨대 한강 관련 아이디어들은 법제에 걸려 시행되지 못했고, 1등상을 받은 남산 인공달 띄우기는 생태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지요.”

강씨에 따르면 직원들은 성과로 연결되는 창의 아이디어가 극히 드물다는 걸 알면서도 ‘성과 포인트’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0.1점이 아쉬운 승진 대상자들은 인사철을 위해 아이디어를 비축한다. 성과 포인트를 받으면 승진 순위 100번에서 곧장 10번으로 진입도 가능하다.

선거 따라 춤추는 공직사회

자치구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세훈 시장이 “(인사혁신이) 서울시 본청에서 시작됐지만 자치구, 투자·출연기관도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듯 시가 지향하는 방향은 자치구로 전파된다. 여러 자치구에서 ‘창의시정’을 도입했으며, 서초구와 양천구는 성과 위주 발탁인사를 단행했다.

서울 C구청 7급 공무원 차동원(가명)씨. 그는 “민선 이후 자치구의 ‘지맥’이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각 자치구는 구청장에 따라 지역색이 나뉜다. 임의로 예를 들면 ‘송파 안동’ ‘관악 호남’ 식이다.

“줄대기에는 ‘학연’ ‘지연’을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민선 이후엔 선거 때 열심히 뛰어서 인맥 만드는 이가 부쩍 늘었습니다. 6급까지는 구청장이 승진을 관리하니까 팀장 부인들이 선거를 많이 돕습니다. 예전에는 친형이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한 모 팀장이 바로 요직인 총무과장으로 승진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퇴직하는 D구청 7급 공무원은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인사 기준, 관심 분야가 덩달아 춤을 춰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다.

“과거엔 직속상사를 잘 보좌하며 인맥 쌓기에 힘쓰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선 이후 구청장 한마디에 전체 사업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구청장이 격려 차원에서 한마디 던지면 팀장, 과장들이 알아서 설치는 것이지요. 실무 현장과 괴리가 있더라도 구청장의 지시라면 무조건 따릅니다. 인사가 구청장 손에 달려 있으니 아랫사람들은 ‘아니오’라는 이야기를 못 하지요.”

D구청 다른 7급 공무원은 “민선의 단점은 단체장이 단기간 내 성과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기관장의 욕심일 뿐이다. 사기업은 오너의 의지에 따라 경영이 가능하지만 공조직은 그렇지 않다. 직원들은 구청장이 바뀔 때마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고 했다.

새 정부가 ‘아침형’이라는 소식을 듣곤 공무원들은 아침잠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발 빠른 조직들은 일찌감치 출퇴근 시간을 조정했다. 이들은 ‘머슴론’ 발언 이후 중앙정부는 물론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 가릴 것 없이 같은 바람이 불 것이라 내다봤다. 기자가 “지방부처까지 그럴 필요 있느냐”고 묻자 그는 “직속상사가 일찍 나오는데 늑장 부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중앙부처 지방부처 모두 마찬가지일 터. 단체장이 4년간 한 조직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