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 2021. 03. 10. 17:45
칠곡할매글꼴 홍보대사 맡은
연예인 출신 정재환 성대교수
연필 쥐는 법도 익숙지 않던
할머니들 인생이 용해된 글씨
칠순 넘어 글 깨칠수 있는건
오로지 한글의 위대함 덕분
"한글 덕에 제 인생도 바뀌어"
수원 화성행궁에서 낡은 골목길로 5분만 걸으면 '봄뫼'라는 카페가 나온다. 봄 산(山)이란 뜻의 우리말로, 정재환 성균관대 초빙교수(60·사진)가 주인장이다.
198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 '청춘행진곡' MBC 드라마 '아줌마' 등을 기억한다면 '정 교수'란 단어가 어색할 터. 연예인인 정 교수는 늦깎이로 성균관대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한글운동 외길을 걸었다.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로도 일하는 그는 칠곡군 할머니들의 손글씨로 만든 '칠곡할매글꼴' 홍보대사도 올해 초부터 맡고 있다. 정 교수를 최근 봄뫼에서 만났다.
"칠곡 할머니들이 시집도 내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으셨어요. 저보다 더 유명한데 누가 누굴 홍보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허허."
칠곡할매글꼴은 성인 문해교육을 받은 할머니 5인의 글씨체를 토대로 칠곡군이 만든 무료 서체다. 글을 못 읽는 할머니들을 위한 칠곡군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는데 수료생이 400명을 넘는다. 소식이 알려지자 출판사 구애로 펴낸 칠곡 할머니들 시집까지 화제가 됐다. 심지어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도 최근 제작됐다.
"글꼴 이름도 할머니들 실명을 붙였다고 해요. 칠곡할매 권안자체, 칠곡할매 이원순체 이런 식으로요. 먼 후일 할머니들이 떠나셔도 글씨가 남게 되는 거죠. 연필 쥐는 법도 익숙지 않았던 팔순 할머니들의 세월과 애환이 담긴 글씨여서 더 많이 알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칠곡 할머니들은 일생이 문맹이었다. 글눈이 어둡다 보니 버스를 타거나 우체국 가는 일도 일부러 피했다고 한다. 글씨체에 담긴 사연도 갖가지다.
"이종희 할머니(79)는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녔고 광복 후에는 전쟁으로 학교에 못 가셨다 해요. 일본어도 한국어도 못 배운 채로 자식들을 키우다가 팔순에 이른 거예요. 깊은 골이 파였던 삶이 담긴 글씨인 거죠. 우리 언어가 국한문 혼용체가 아닌 한글이어서 이런 기적이 가능했다고 봐요."
정 교수에게 '제2의 인생'을 발견하게 한 언어도 할머니들이 쓰는 바로 그 한글이었다. 한창 연예인으로 활동 중이던 그는 나이 마흔에 한글사(史)에 매료돼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학교가 천국"이라며 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2007년 석사논문 '이승만 정권 시기 한글간소화파동 연구', 2013년 박사논문 '해방 후 조선어학회 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를 썼다. 300쪽이 넘는 그의 박사논문은 현재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기준 다운로드가 2000회를 넘는다. 묵직한 숫자다.
"KBS 라디오 '정재환쇼'를 진행하다가 길을 깨달았어요. 말을 잘하는 DJ라고 생각했는데 언어를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한 번은 아무 의심 없이 생방송에서 말했죠. '오늘 하루도 단도리(だんどり) 잘하십시오.' 단도리가 일본어인 줄도 몰랐어요. 마흔까지 첫 번째 인생을 살았는데 실수를 계기로 두 번째 삶을 계획했으니 한글이 운명이었나 봅니다."
칠곡할매글꼴 홍보대사로서 정 교수의 다음 계획은 '칠곡할매글꼴 백일장'이다. "참가자인 글쓴이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칠곡할매글꼴로 편지를 써보는 거예요. 할매가 된 엄마에게 쓰기도 하고요. 누구나 늙잖아요. 그 먼 시간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칠곡할매글꼴이 촉매제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이제 환갑"이라며 허허 웃는 정 교수는 "그러나 아직도 학생이라고 생각하며 산다"며 "세상에서 만난 모든 이가 나의 스승"이라고 겸손해한다. 좌우명처럼 품고 사는 말도 그래서인지 '불치하문(不恥下問·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이다.
"스무 살 어린 동기들에게 묻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서 또 배우고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 글꼴에서 또 배우니 저는 아직도 인생이란 학교의 창창한 학생이죠. '봄뫼 할아버지 교사'가 제 노년의 꿈이에요. 그때까지는 학생으로 남으렵니다."
[수원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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