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코리아 20.12.11 05:06
1. 서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관성 있는 근본 가치에 대한 해체 조짐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들 역시 그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 동성결혼, 성전환, 4차 산업의 발달 등은 인류의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보기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다. 거기다가 2019년 마지막 달에 들이닥친 ‘코로나(KOVID)-19’는 교회를 직접 뒤흔드는 역할을 했다. 그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주일 공 예배 중단’과 ‘예배당 폐쇄’라는 이상 현상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AD1세기 이후부터 항상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모임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름은 동일한데 반해 외형적으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교회의 본질이 불변의 고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어느 정도 다양한 외적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지상 교회는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성장과 변천을 되풀이했다. 그 가운데는 참된 교회가 있었는가 하면 이름만 교회였을 뿐 본질을 버린 거짓 무리들이 줄곧 있어 왔다. 그와 같은 양상은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참된 교회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그것을 위해 가장 근접한 위치에 서 있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개혁교회’라는 용어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교회란 특정한 교단이나 교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개혁주의 사상’을 지향하고 그에 조화되는 실천적 삶을 유지하는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건전한 교리 이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절대 진리라는 사실을 믿고,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 지상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오늘 현재의 문제뿐 아니라 내일 곧 다음 세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오늘 번성해 보이다가 내일 허망하게 무너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오늘 다소 힘든 모습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내일의 자녀들이 건강한 신앙인으로 성장한다면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럴듯한 오늘의 교회 현장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미래의 교회를 미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불변하는 진리의 본질과 변천해 가는 신앙인들의 형태에 연관된 내용이다. 예를 들어 지상 교회는 외적인 조직의 획일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의상과 두발의 형태, 식생활에 관한 문제 등은 시대를 초월해 고정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도들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모든 면에서 신앙의 본질을 중심에 둔 경건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의 값어치와 절대로 타협하지 못할 내용들이 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동성애, 동성 결혼, 성전환 수술 등을 인정할 수 없다. 또한 어떤 형태의 ‘진화론’이라 할지라도 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들은 시대적 풍조와 더불어 확증되지 않은 과학주의적 주장을 앞세우지만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그에 대해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타락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참된 교회로 성장해 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 성도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그와 같은 참된 교회는 성경이 요구하는 기본적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교회의 직분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항상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이해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교회에는 항상 무지한 자와 문맹자가 존재한다. 또한 지상 교회에는 문제성 있는 교인들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건강한 교회는 결코 교인들을 엘리트 집단화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가정에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있고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아이들은 욕구에 대한 추구와 반성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자라가게 되며 모든 사람들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
지상 교회에서도 이처럼 늘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항상 다양한 문제들을 일으키며 성숙한 성도들을 통해 선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해 가야 한다. 물론 건전한 평가와 더불어 일차적인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은 성숙한 교인들과 어른들이 우선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반성과 평가를 기초로 한 실천을 통해 다음 세대가 올바른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의 교회를 중시하는 이유는 현실적 만족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대에 처한 성도들은 항상 이삼십 년 후의 다음 세대 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십 년 후가 되면 지금 열 살인 아이들이 마흔 살이 되며 스무 살인 청년들은 쉰 살이 된다. 그들이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아 진리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지상 교회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키우는 종교 조직’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자라나는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교회를 인위적으로 키우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면 성경이 요구하는바 본질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가운데 그 본질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정을 인위적으로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참된 교회는 ‘나의 교회’ 혹은 ‘우리의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교회’이며 그 교회에 ‘나와 우리’가 속해 있다. 즉 ‘나 혹은 우리’가 교회를 세워나간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성경에서 요구하는 참된 교회에 의해 ‘나와 우리’가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개혁교회’라고 할 때는 그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절대 진리인 성경과 역사적 교회 가운데 확립 확인된 교리, 그리고 건전한 교회적 질서와 삶이 조화롭게 작용하는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개체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극도로 타락한 21세기의 기독교 현실을 염두에 두고 그에 연관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개혁교회’에 연관된 기본적인 이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개혁교회’란 기독교의 여러 교파들 가운데 하나를 지칭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교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개혁교회’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 가운데 ‘역사적 신앙 고백’과 교회의 표지가 드러나게 된다.
이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오순절 날 강림하신 성령의 사역, 그리고 종교개혁시대 계시된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한 믿음의 선배들의 교훈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시대적 세태의 유행에 편향되지 않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 자체를 절대적인 교훈으로 삼는다. 그와 같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본질과 요건을 갖추어야 되는지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 ‘온전한 교회’와 ‘완전한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로 인해 그의 완벽한 의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은 여전히 죄인이다. 즉 세상에 살아가면서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확립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죄의 속성을 지닌 성도들이 모인 지상 교회는 ‘완전한’(perfect) 영역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는 완벽해질 수도 없다. 그리고 현실 교회는 완전한 상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보다 윤리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우려가 따르게 된다.
그 대신 지상 교회는 항상 ‘온전한’(sound) 교회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으며 지상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에 순종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온전하다’는 것은 ‘정상적’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완벽하다’는 것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가정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부를 중심하여 세워진 이 세상의 가정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이는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족 구성원이 되어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한 가정’은 세상에 많이 존재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건전한 성품을 소유한 가족들이 모여 온전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고 부모 자식 간에 큰소리치는 일들이 종종 있지만 온전한 가정일 수 있다.
개별 인간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온전한 사람’은 존재한다. 온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때로 이웃과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감기나 몸살에 걸려 상당한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이처럼 지상 교회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온전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교회 가운데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성도들 사이에 나타나는 성격이나 견해 차이로 인해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점차 성숙해 가야 하며 더욱 온전한 교회로 성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바는 지상 교회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항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자신을 비추어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온전한 사람이 날마다 거울을 통해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바르게 하듯이 성숙한 교회는 개혁된 상태로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이 끊임없이 변해가고 교회와 성도들은 그 변천해 가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우주적 보편교회’와 ‘시대와 지역적 공교회’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 항상 우주적 보편교회와 시대와 지역적 공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참된 지교회들은 예외 없이 우주적 보편교회와 말씀에 따른 신학과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받아야 할 공교회에 속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적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은 지교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교회에 속하지 않는 지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지교회들은 항상 우주적 보편교회를 의식하는 가운데 그에 조화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공교회의 질서 가운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시대에 처한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판단과 주장이 아니라 우주적 보편교회와 공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속한 교회가 온전한 교회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각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와 참된 공교회가 확립한 건전한 신학 및 신앙에 얼마나 잘 조화되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3) ‘독립체’로서 지교회
참된 각 지교회들은 보편교회와 공교회에 속해 있지만 독립된 공동체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지상 교회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현실적인 모든 형편이 제각각 다르다. 생활 환경과 여건이 좋은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교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귀족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항상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뒤섞여 있으며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들이 존재한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은 자와 낮은 자들이 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괜찮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다.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이 있으나 그것 자체가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그런 세속적인 것들이 중요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참된 교회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 각 개체 교회들 가운데는 반드시 존재해야 할 표지는 순수한 말씀선포, 올바른 성례의 시행, 정당한 권징 사역이다. 즉 그런 표지가 있어야만 참된 교회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공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가 가장 중심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관한 사역은 목사 직분자가 감당해야 한다. 목사의 설교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언어전달행위이다. 언어를 전달한다는 것은 ‘정확성’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의 언술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감동을 끼치는 것이 올바른 설교가 될 수 없다. 미사여구를 섞어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설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악한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에서는 노회나 총회의 관여나 간섭에 따라 설교 본문을 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 교회 당회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가 목사이지만 치리하는 직분을 맡은 장로들은 성도들을 심방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상황을 기초로 논의하며 설교 본문을 정해야 한다. 설교자가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단독으로 설교 본문을 정하는 것은 주관적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또한 개혁교회에서는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자기를 포기하고자 고백하는 성도들이 세례를 받게 되며 언약 가운데 유아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성장하여 입교하게 된다. 세례 교인들이 직접 성찬을 나누는 일은 일 년에 한두 차례 행해지는 요식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의미와 더불어 행해져야 한다.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나누는 것 역시 당회와 더불어 개교회가 결정하여 시행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례와 유아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당회의 결의에 따라 적절한 교육과 더불어 그 당사자나 부모의 고백이 확인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례가 중요한 언약의 표징이 된다고 해서 그 자체가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 또한 성찬상의 음식은 천상의 나라에서 분배받아 오는 구체적인 성격과 더불어 공교회인 교단(노회)으로부터 받아 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찬은 모든 세례 교인들이 참여하는데 유아 세례교인들도 그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즉 떡과 포도주를 직접 받지 않는다고 해서 성찬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산모가 태중의 아기에게 간접적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
또한 개혁교회 안에서는 권징사역이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권징은 잘못하는 교인들에게 벌을 주거나 징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교정을 위해 끊임없이 상호 말씀으로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성향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며 그 근본 주체는 개교회의 당회가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개체 교회의 재정적 독립 채산의 원칙이다. 즉 노회나 총회의 지시를 받아 재정을 사용하거나 정책을 실행하지 않는다. 항상 이웃 교회를 위한 관심과 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지만 외부의 간섭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재정에 있어서 개 교회는 독자적으로 책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만인제사장(priesthood of all saints)이 성도들 각자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교회의 나이어린 아이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제사장이 되어 그 책임과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만인제사장에 관한 이해를 할 때 그것이 개체 교회 단위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3. 교회의 조직에 대한 이해
우리 시대는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규범조차 무너진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자 자기의 위치나 자리를 잊어버린 채 개인적인 판단과 경험에 따라 자기의 욕망에 따라 모든 것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자 가족 간에도,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도, 이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직분과 직분회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더불어 맡겨진 직무가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 가운데서 행해지는 공적인 내용들 중에 본질을 해치는 정도의 지나친 형식주의가 활성화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교회의 공 예배 시간에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에 담긴 본질적 이해 없이 입술로 노래만 부른다고 해서 충분하지는 않다. 또한 성도들의 교회 이동에서 ‘이명증’(移名證)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신뢰할만한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의미가 동반되어야 한다. 즉 실체적 의미가 결여된 채 형식을 채택하는 것은 도리어 교만을 유발하는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 직분과 직분회
교회에는 각기 다양한 항존직 직분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요구에 따른 것으로서 인간들이 효과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창안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로서 직분과 직분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에는 항상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가 맡긴 항존 직분자들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각 직분에는 고유한 권위가 존재하며 동시에 상호 평등의 원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직분자에게 잘못된 권위주의는 배격되어야 하나 그 안에 담긴 소중한 권위 자체가 붕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직분자들 간의 평등이라는 말이 권위 자체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공교회와 각 개체 교회에는 반드시 각 직분에 따른 직분회 및 회의체가 있어야 한다. 당회, 노회, 집사회는 단순한 회의체가 아니라 직분회이다. 물론 직분회 역시 회의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와 달리 총회, 제직회, 공동의회는 상시적 직분회가 아니라 회의체라 할 수 있다. 회의를 마치게 되면 그 회의체는 자동 해산하게 되는 것이다. 회의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관에서 논의할 사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기관에 맡겨진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의를 위해서는 개회 성수가 매우 중요하다. 대다수 한국교회의 경우 성수가 없이 모이는 데로 회의를 개최하게 되는데 수백 명이 넘는 직분자들을 두고 있으면서 제직회에는 불과 수십 명이 모여 논의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필자가 속한 교단에서는 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당회 4/5. 집사회 3/4, 공동의회 4/5, 제직회 3/4 이상이 회원이 참석해야 한다.)
(2) 회원제도
지 교회에는 반드시 명확한 회원제도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정 회원이 된다는 것은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허락된 권리와 의무가주어진다는 말과 같다. 매 주일 공 예배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 개최되는 공동의회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 등이 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회원으로서 자신의 재능과 물질의 일부를 교회를 위해 연보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처럼 한 개체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권을 지닌다는 말과 같으므로 교회는 충분한 신앙의 검증 없이 아무렇게나 정회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정회원은 기존 성도들의 회합인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 당사자의 판단이 아니라 교회의 의사와 결정에 따라야 하며, 회원이 된 후에도 교회의 정당한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 공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 가운데는 정회원, 준회원, 손님 교인, 방문 손님 등 다양한 신분의 성도들이 존재한다. 방문 손님은 특별한 일로 인해 일시 방문하는 성도를 의미하며, 손님 교인이란 본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으나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나오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준회원은 상당 기간 공 예배에 참여하며 본 교회 가입 의사를 지닌 성도에 대하여 당회와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곧 정회원이 되기 전 언약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성도들을 일컫는다. 준회원이 되면 정회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공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해야 하며 기본적인 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일반 사람들이 계 모임을 하거나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유지할 때도 무분별하게 아무렇게나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중한 심사를 거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국가의 시민권을 얻거나 회사나 학교의 정식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모임과 비할 수 없는 엄격한 가입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로 이동해야 할 형편에 놓인 성도들은 개인의 종교적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 가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표지를 면밀히 살피는 가운데 해당 교회 당회와 대화를 나누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적성에 맞는 교회를 추구하는 대신 자신을 교회의 지도에 맡겨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이처럼 어느 성도가 교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타교회로 이동해 가게 될 경우에도 동일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개인이 자유롭게 판단하여 마음대로 오갈 수 있 곳이 아니라 엄정한 문(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유로 본 교회를 떠나게 되어 회원권을 반납하게 될 경우에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국가와 가정을 비롯한 모든 상식적인 모임이 그런 엄격한 절차를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3) 교회와 가정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가정은 소속된 교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굳이 가정과 교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말해야 한다면 당연히 교회가 가정보다 중요하다. 가정이 나약하고 굳건하지 못할 때 교회가 그 가정을 굳건히 지켜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개체 교회의 건전성을 따질 때 개개인 교인들의 성품이나 수준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전체 각 가정들의 영적이며 정신적인 건전성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 즉 영적으로 건강한 가정들이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교회는 영적인 건강 지수가 떨어지게 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가야 한다”
4. 교회적 실천
지상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가 존재한다. 그것이 항상 소중하게 드러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튼튼한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공 예배
지상 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명은 매 주일 진행되는 공 예배이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정기적으로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그의 계시된 말씀에 따라 경배해야 한다. 만일 언약적 의미와 더불어 공 예배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주일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의 의미가 살아난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시간을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주장하거나 설파하는 방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참된 설교자는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을 오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당회의 논의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설교하는 목사는 자신의 화려한 언술이나 설득의 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좇아 말씀을 순수하게 전달해야 한다. 따라서 참된 설교자는 성령께서 계시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변질시키지 않고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공 예배 시간에는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넘어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감사와 기쁨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값지고 소중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교리 교육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성숙한 성도들이 올바른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교리와 신학에 대한 틀을 굳건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건전한 신앙과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목사와 장로들의 직분회인 당회가 먼저 올곧게 서야 하며 항상 교육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어른 성도들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어갈 어린 성도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3) 성도들과 직분자 사이의 지속적인 교회적 질문과 답변
성도들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뢰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단순한 형식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간 신앙 안에서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과 교리와 신학에 대한 이해를 겸손한 대화로 나눈다면 서로 간 더욱 깊이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공적인 모임에서 편안하게 질문하고 대화하는 훈련을 하는 것은 많은 도움을 준다. 이는 마치 아이들이 부모에게 되풀이하여 묻고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며 여러 학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성도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 확립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성장의 중심에는 함께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가 목회하는 실로암 교회의 경우 주일 오후 시간을 시작하기 전에 누구든지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목사가 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장로를 비롯한 직분자들은 다른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신 질문해 줄 수도 있다. 즉 몰라서 하는 질문도 있고 다른 이들을 위한 간접 질문도 있다. 하지만 호기심 위주의 무리한 질문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그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성격상 공개적으로 질문하기 어려워하는 성도들은 종이쪽지에 질문을 적어 목사나 장로에게 주면 그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질문과 답변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때 신학과 신앙의 통일성과 더불어 교회 내부의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 또한 그 시간을 통해 감정적 맹신이 아니라 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지적이며 체계적인 신앙을 갖추어 가게 되는 것이다.
(4) 성도들 간의 교제와 관계
동일한 개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간 항상 평안하고 좋은 관계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렇게 살아가길 원할지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때로 다른 형제와의 관계가 힘들고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인내하며 견뎌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성도들 사이에도 상호 간 싸우고 화를 푸는 관계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격상의 차이라든지 일반적인 행사 가운데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죄성으로 가득 찬 인간인 우리는 지나치게 신사적이거나 너무 좋은 교회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도리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과 싸우거나 다투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부부 사이, 부모 자식이나 형제간에는 자주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과정을 통해 신뢰 관계가 굳건히 되어 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도를 넘는 언어와 행동을 동원한 지나친 싸움은 절대 금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개체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자기 집 아이가 아니라 이웃 집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집 아이들에 대한 깊은 교육적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자식만 잘 키우고자 하는 노력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한평생 함께 살아갈 좋은 친구와 신뢰할 만한 이웃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역사 가운데 지상 교회를 상속해 갈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책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5) 빛과 소금의 직분
하나님의 교회는 타락한 이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거나 수행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참된 교회라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빛과 소금은 그 성격상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빛은 외부를 밝히는 역할과 내부의 좋고 나쁜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과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을 동시에 한다.
이처럼 지상 교회와 성도들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는 가운데 교회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과 타락한 인간의 죄악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빛을 통해 세상의 실상을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의 죄상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이와 동시에 성도들은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한 성품과 모든 사역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지상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 맛을 내는 것에 연관되어 있다. 이는 이 세상에서는 살아갈 만한 진정한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오직 참된 소금이 가미됨으로써 세상의 맛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교회 내부에서 나타나며 세상에 대해서도 그 역할이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금방 부패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6) 말씀으로 균형 잡힌 교회에 속한 성숙한 성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서 말씀으로 균형 잡힌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개인적인 생활과 태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속한 교회, 가정, 국가 사이의 관계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균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도들의 삶은 항상 교회 중심으로 이어져 가야 한다. 굳이 가정 중심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본질적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비교하여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교인들의 각 가정보다 중요하며 사회와 국가보다 중요하다. 교회는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에 예속된 가정은 혈통적 가족인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는 특별한 영역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정은 늘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성도의 가정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에서 그것을 풀어 해결해 주어야 한다. 즉 교회의 문제를 가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교회와 더불어 신앙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상의 모든 성도들은 국가에 속한 신실한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속국가에 무조건 맹종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교회의 자녀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친다면 교회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하며, 국가가 ‘동성애, 동성결혼, 성전환 수술’을 합법화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교회가 힘써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단위적 공교회를 이루고 있는 각 교단 총회가 미리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교단 헌법에 명시하여 선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4차산업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역기능을 동반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체에 대한 해석이 더욱 복잡하게 되어 우려할만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과학주의에 빠진 자들이 더욱 발달된 문명을 동경하고 추구하면서 자랑거리로 삼아 왔으나 그것이 파멸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숙한 성도들이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올바른 입장을 가짐으로써 다음 세대의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7) 고향의 기능을 해야 할 교회
우리 시대는 대체적으로 ‘고향’을 상실한 안타까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자기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라난 곳을 찾아가도 산중 시골이 아니면 고향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고향의 외양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내용은 거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향에 가면 옛날 어릴 적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이든 상태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옛날에 드나들던 문방구점과 이발소, 방앗간이 있으면 그 주인을 만나 안부도 물으며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함께 살아가던 연세든 어른들로부터 그들의 자녀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얘기를 들을 수도 있다. 고향은 그러해야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고향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개체 교회가 성도들의 고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나마 소망이 된다. 어릴 때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목사님과 어른들은 항상 고향의 버팀목이 된다. 멀리 시집간 처녀가 나중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모 교회를 방문해 젊은 시절의 신앙생활과 추억을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힘든 문제들을 만나게 될 때 고향이 그 방향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옛날 자라나고 살아가던 그리운 고향이 자신을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못하도록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붙잡아주는 고향이 사라지면 정신적인 외로움으로 인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교회와 더불어 특정 지역에 세워진 ‘예배당 건물’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 수십 년 후에 고향 교회를 찾았을 때 가시적인 형태의 옛날 예배당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고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고향을 방문하면 옛날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장로와 집사 등 직분자가 되어 있고 돌아가신 성도들의 소식을 들으며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삶의 의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지상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올바른 교회관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일컫는 ‘개혁주의 교회’란 성경 말씀에 온전히 부합하는 교회를 말하고 있으며 그 교회가 어지럽고 타락한 세상을 끊임없이 해석하며 삶 가운데 그 의미를 적용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타락한 세상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에 속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부모들은 자기의 왜곡된 경험과 이성을 배경으로 하여 자기가 원하는 길로 자녀를 인도하고자 한다. 그것이 패망의 길인지 아닌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무지한 태도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과연 무엇을 상속해 주어야 할 것인지 신중하게 숙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재산, 명예, 좋은 직장, 남부럽지 않은 가정과 같은 것들은 언제든지 소멸할 수 있는 보장성 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상속해 주는 것은 자녀들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예기치 못한 역기능의 실체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숙한 부모라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참된 교회를 상속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믿음의 친구와 이웃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언약 관계 속에서 그 일이 순적하게 진행될 때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신뢰할 만한 성도들과 함께 믿음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참된 가치가 해체되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란 말은 이제 고전적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성공한듯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작은 바이러스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인생이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대형 지진이 발생하면 어쩔 도리없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절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욱 크고 심각한 문제는 현실 기독교회들이 점차 참된 모습을 상실한 채 세속화되어가는 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다양한 종교단체들이 더욱 심하게 타락해 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와 같은 위태로운 환경에 처해질 것이란 현실 앞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현재의 외형적 모양새 다듬기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대신 다음 세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관심을 더욱 확장 시켜야 한다. 지금 이 정도이니 30년 후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30년 후에 우리의 교회는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리석은 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벗어난 채 세속화되고 신학과 신앙이 엉망으로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도 왜곡된 상태의 겉모습을 추구하며 그것을 자랑하기 좋아한다.
그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극도로 이기주의화된 세속화에 물든 기독교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신실한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하며 타락한 세상과 투쟁하는 신실한 교회를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모든 것이 뒤엉켜버린 21세기에, 참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많아져 천상의 나라를 향해 깨어나기를 바란다.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장)
'교육자료 >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인은 정치가와 정부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0) | 2020.12.18 |
---|---|
"교회 폐쇄법", 무엇이 사실인가? (0) | 2020.12.14 |
병든 형제를 위한 기도 (0) | 2020.12.10 |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0) | 2020.12.08 |
하나님의 다섯가지 이름 (0) | 2020.12.02 |